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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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S. 럭크만(Dr. Peter S. Ruckman) 저 / 편집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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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 2012년 12월 15일 초판3쇄
쪽수 : 785
무게 : 1090g
크기 : 153*223*40mm 신국판 무선제본
ISBN : 9788988795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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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 상세설명

    잠언에는 세상 어떤 사상가의 조언에서도 얻을 수 없는 심원하고, 고귀하고, 정직하며,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오직 영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깨닫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잠언을 썼다. 그러나 솔로몬은 르무엘과 아굴의 잠언도 포함시키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책이며, 필요할 때에 사람들을 그분의 도구로 쓰신 것뿐이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많은 오류들이 있지만, 특히 잠언서에 가장 많이 오류를 범해 놓고 있다. 조언과 지침이 다른데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들은 성경 구절을 성경 구절로 증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이제야 독자 여러분은 참다운 잠언 해석집을 갖게 된 것이다. 열심히 읽고 공부하여 자신이 성숙함은 물론이요, 이 아름다운 지식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시길 바란다. 

    상품 정보 고시

  • 이 책을 내면서 / 7
    서  문 / 9


    잠언  1장 / 21
    잠언  2장 / 45
    잠언  3장 / 59
    잠언  4장 / 86
    잠언  5장 / 105
    잠언  6장 / 117
    잠언  7장 / 130
    잠언  8장 / 141
    잠언  9장 / 160
    잠언 10장 / 168
    잠언 11장 / 185
    잠언 12장 / 205
    잠언 13장 / 231
    잠언 14장 / 255
    잠언 15장 / 294
    잠언 16장 / 339
    잠언 17장 / 376
    잠언 18장 / 414
    잠언 19장 / 443
    잠언 20장 / 478
    잠언 21장 / 515
    잠언 22장 / 548
    잠언 23장 / 574
    잠언 24장 / 594
    잠언 25장 / 614
    잠언 26장 / 638
    잠언 27장 / 660
    잠언 28장 / 680
    잠언 29장 / 707
    잠언 30장 / 732
    잠언 31장 / 758


    추    신 / 777 

  • 서문 


    이 책은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시리즈”가 다 그렇듯이) 현재 우리가 지닌 <킹제임스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말씀이며, 어떤 오류도 섞이지 않고 보존된 말씀이라는 “주관적 편견”으로 시작된다. 다른 주석서 서문에도 언급된 것처럼 이 “편견”은 이 세대의 95%의 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이 가진 편견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킹제임스성경>은 분명히 반카톨릭 성경으로 본질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양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성경이다. 진짜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과거, 현재, 미래의 교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마 13장, 딤후 4장, 계 2,17,18장). 진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친카톨릭적 성향을 가진 성서들을 결코 존중하지 않는다. 1880년 이후에 나온 성서들이 모두 친카톨릭적 편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보다도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증명될 수 있다. [방금 한 말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필사본 증거>(Pensacola Bible Press, 1970)를 참고할 것을 권하는 바이다. 방대한 양의 증거도 없이 무조건 필자의 말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웨스트코트와 홀트는(1881-1884) 얄팍하고 표면적인 필사본 증거 지식을 근거로,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필사본들이 비잔틴 계열 필사본들보다 우월하다는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여덟 구절을 뽑아 냈는데, 1880년 이래로  성경 번역자들은 모두들 그 이론을 “과학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였다. 성경에서 단 여덟 구절을 근거로 자신들의 이론을 정립한 학자들의 놀라운 태도를 알고 싶으면 <필사본 증거> 맨 뒤에 있는 대조표를 보면 된다. 이 대조표는 1880년 이후에 나온 24개 역본에서 발췌한 42개 구절이 <킹제임스성경>과는 상치되고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와는 일치함을 증명해 준다.]


    <킹제임스성경>은 그 접근 방식부터 명백하게 반카톨릭적이다(성경 본문은 둘째 치고). 그 접근 방식은 1880년 이후 전미 교회협의회(NCCC)나 개인이 번역한 모든 번역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하다.


    둘째로, 1611년 <킹제임스성경>은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간이었던 1700-1901년에 선교 현장에서 사용된 영어 성경으로 그 기간은 역사상 전무 후무한 기간이었다.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다 아는 바와 같이, 교회사의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계 3장)는 20세기에 들어서서 이 성경을 버리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치고 사람들이 “더 분명하게 번역된”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향후 30년이 교회사적으로 지금보다 더 발전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또는 가르치는) 사람은 그렇게 믿거나 가르친 적이 없다. 그것은 전천년주의를 거부하고 국제 사회주의나 교회 국가 UN의 입장을 채택한 정치·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역본들에도 불구하고 <킹제임스성경>은 여전히 그 능력과 권위를 과시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역본들을 팔기 위해서는 다음의 속임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1. 성경처럼 보이게 하려고 검은 가죽 표지를 씌워서 판다.
      2. 여백에 <킹제임스성경>(AV) 본문을 함께 실어 비교할 수 있게 한다.
      3. “KJV”이라는 이니셜을 사용함으로 RSV나 ASV와 비슷하게 보이게 만든다.
      4. 현대의 광고 기법을 동원해서 판매를 촉진시킨다.


    전미 교회협의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지상에서 없애 버리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향후 20년 내에 그들이 “권위” 있다고 부르는 “성서”를 공동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그 “권위” 역본은 절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나 성령님으로부터 권위 있는 역본이라는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 성경은 사회주의적인 교회 국가의 인정을 받고, 연방 정부의 지원까지 받을 것이며, 실형 선고와 소송과 “정신 질환자 요양소”와 면세 혜택 박탈 등의 방법을 총동원해 사람들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기도나 상식, 논리, 주장, 학위, 개정, 교육, 설교, 연구, 비평 등 그 어떤 것으로도 전복될 수 없는 영적 능력이 <킹제임스성경>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성경을 전복시키려면 교회와 국가의 연합 체제가 그 성경을 없애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켜서 그 성경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길밖에 없다.


    세 가지 이유(반카톨릭성, 선교의 부흥을 이끈 점, 인류가 그 책에 대해 갖는 증오심) 때문에 <킹제임스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읽기에 가장 합당한 성경이다. [그러면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으로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기 원하는 궤변론자들에게 줄 대답은 이렇다. 헬라어 표준원문(<킹제임스성경>이 번역된)의 번역본들은, 1881-1884년 성경 개정 위원회가 바티칸 사본을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리기 이전에 이미 미 대륙과 중국, 인도, 일본 등지에 퍼져 있었다.]


    잠언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은 문제의 양면을 모두 철저하게 살펴보지도 않고 미혹된 광신자들처럼 맹목적이지 않다는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100년이 지나도 같은 길을 고수하는 전통주의자들이 있지만, 진짜 전통주의자들은 1611년 <킹제임스성경>을 고수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또 다른 “전통주의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A.D. 230년 오리겐이 최초로 닦았고, 유세비우스(A.D. 350)와 제롬(A.D. 450)이 지옥까지 단번에 연결시켰으며, 티셴돌프(1880)와 웨스트코트 및 홀트(1880)가 현대식으로 포장한 “외길”을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이 “외길”은 신약보다 구약에서 더 분명하다(<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 참조). 왜냐하면 오리겐 당대의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은 감히 솔로몬의 지혜(하나님의 영감으로 히브리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지혜)를 “스토아”(인간의 타락한 지혜인 헬라의 영지주의)로 바꾸려는 야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잠언 연구에 접근하는 우리는 <킹제임스성경>에 전수된 공인된 원문을 고수할 것이고, 변개된 성경들이 본문에서 고쳐 놓은 단어나 구절은 고려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잠언에 관한 문헌은 실로 방대하다. 잠언을 공격한 첫 번째 인물은 오리겐인데, 그는 능력이 닿는 한 최대로 성경 본문을 공격했다. 바실과 비드(Basil and Bede, 672)도 주석을 썼고, 델리취(Delitzsch, 1878), 클라크(Clarke, 1878), 플럼터(Plumptre), 워즈워드(Wordsworth), 미카엘리스(Michaelis, 1720), 멜랑히톤(Melancthon), 로웬슈타인(Lowenstein, 1838), 버토우(Bertheau, 1847), 힛직(Hitzig, 1858), 조클러(Zockler, 1867), 에왈드(Ewald, 1837), 엘리콧(Ellicott, 1889) 등도 잠언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썼다. 교훈적인 면에서 이들 주석에서 얻을 만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 통찰력이나 정확한 교리적 해석, 예언적 적용, 성경 본문에 대한 믿음에 관해서는 상당히 부족하다(<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계시록> 서문 참조).


    <칠십인역, LXX>과 <킹제임스성경> 본문이 차이를 보이는 부분에서는 물론 <칠십인역>이 변개된 것이다. 소위 “칠십인역”의 진위성에 대해서는 창세기 주석과 <필사본 증거>에서 충분하게 논의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많은 부분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칠십인역”은 사도 바울이 죽은 뒤 100여 년 뒤에 기록된 것이며, 이제껏 발견된 모든 증거들로 볼 때, (티셴돌프, 바이스, 웨스트코트, 홀트, 라흐만, 그리스바흐, 트레겔레스 등이 발견해 낸 증거들까지 포함해서) <칠십인역>을 기록한 사람들은 신약성경을 책상 위에 펴 놓고 헬라어로 된 구약을 자기들 나름대로 만들어 냈음이 입증된다. 칼(Kahle) 등의 학자들은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에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이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 성경을 읽었다는 허황된 얘기를 믿는다. 1세기에 그리스도인이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학자들은 “B”(바티칸 사본), “A”(알렉산드리아 사본), “알렙”(시내 사본) 등을 인용하며 <킹제임스성경> 본문과 비교하지만, 이들 사본들은 바울이 목베임 당한 다음 250년 뒤에 기록된 것으로 그러한 비교는 전혀 의미가 없다.


    소위 “칠십인역”이 허구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현존하는 <칠십인역>의 복사본들은(알렙, B, A, C 일부) 구약성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칠십인역>의 사본들에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과 구약의 히브리인들과 교회 시대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모두 거부한 외경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도 구약 외경이 마틴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나 1611년 <킹제임스성경> 구약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잠언을 연구할 때 “칠십인역”과 <킹제임스성경> 본문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서 결코 <칠십인역>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정통 유대인들은 잠언을 항상 구약 정경에 포함시켰다. 잠언은 유대인들의 구약 22권과 <킹제임스성경>의 구약 39권에 포함되어 있다. <킹제임스성경>은 구약 정경의 모든 책들을 정확히 담고 있으며, 히브리어 성경과는 책을 나눈 숫자만 다르다. 구약 권수가 서로 다른 문제를 주의 깊게 연구해 보면, 영감과 향상된 계시에 관계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바이블 바벨, Bible Babel> 참조, 1960). 오늘날 학자들이 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주의 깊게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소라 원문의 “22”라는 수는 기독교 시대 이전의 구약성경 책 수이며, 종교개혁 성경의 “39”에 맞먹는 수이다. 한편 트렌트 공회가 구약 정경의 수로 제시한 “42”라는 수는 전혀 근거가 없다.


    잠언은 31장, 915절, 15,043단어로 되어 있다. “잠언”(proverb, 히브리어로는 “마샬”)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1. 비슷하게 만들다
      2. 지배하다
      3. 비유와 직유    
      4. 함께 놓다, 나란히 두다


    이것은 호세아 12:10(『내가 또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하였고, 내가 환상들을 많이 늘렸으며, 선지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비유를 사용했노라.』)이 지혜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것이며, “원어”를 몇 년 동안 공부하는 것보다 “as”나 “like”(-처럼, -같이) 같은 사소한 말들이 더 많은 진리를 보여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헬라의 영지주의자들은 (20세기의 대학 교수들처럼) 진리의 일부분밖에 알지 못했다. 오리겐이 성경의 모든 것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려고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오리겐은 진리를 다룰 때 마르시온이나 발렌티누스 등과 동일한 잘못을 범했다. 모든 시대의 자유주의자, 현대주의자, 믿음 없는 사람들도 그와 동일한 잘못을 범했다.


    오리겐은 성경 구절들을 과학과 철학을 향해 도약하는 발판으로 사용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 본문에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자기 멋대로 정의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그 단어의 뜻은 거부한 것이다. 오리겐이 사용한 이 방법을 오늘날 그대로 재현한 것이 콜럼버스 기사단이 발행하는 문서이다(<로마 카톨릭식 성경해석, Rome, the Great Private Interpreter>, 말씀보존학회, 1996). 그들은 이단적 교리를 가르칠 때 처음에는 성경을 인용하지만, 그 교리에 대해 다른 성경 구절들이 설명하는 바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전형적인 수법을 사용한다.


    잠언은 (성경의 모든 진리가 그렇듯이) 영적인 일들을 영적인 일들로 비교함으로써(고전 2:13) 지혜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경에 사용된 어떤 단어의 의미를 논할 때 성경이 말하는 그 단어의 정의를 벗어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는”(막 7:13) 결과를 낳게 된다.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성경을 비평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방법을 쓰고 있으며, 오늘날 미국의 믿을 만한 신학교들도 바로 그 방법대로 가르친다.


    오리겐은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했다. “Proverbs”(“잠언,” 히브리어로 “마샬림”)이 비교, 즉 “진리를 병행하여 제시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는지, 오리겐은 성경을 인용한 뒤 인용한 성경과는 전혀 무관한 자신의 생각을 열거했다. “현대” (불가지론의) 신학도 오리겐과 똑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주석가나 신학자가 성경 본문의 뜻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바꿈으로써 현대의 사사로운 신학 해석이 나온 것이며, 이러한 20세기 신학의 성향은 다음의 사항들과 일치한다.


      1. 세계 평화 
      2. 완전 통합
      3. 인간 지혜의 고양
      4. <킹제임스성경> 본문을 파괴시킴
      5. 로마 카톨릭 교회 전통의 장려


    그와 같은 성경 해석 방법은 성경을 종교 정치가들의 교과서로 전락시키며, 결과적으로 “역본들”과 “번역본들”은 아무런 객관적 기준도 없이 번역자나 발행인의 주관적 기준만을 따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잠언에 나오는 모든 단어, 상징, 예표, 활동의 정의를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믿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잠언 연구에 들어간다. 그 정의들이 교회 공의회, 주석가, 신학자, 종교 정치가들의 정의와 상치될 때에도 우리는 성경이 내린 정의를 절대 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공회나 주석가들이나 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을 <킹제임스성경>의 절대 무오한 권위 아래 굴복시킬 것이다.


    잠언을 주해하면서 1881, 1901년 성경 개정 위원회가 만든 수많은 오류들을 일일이 지적할 뿐 아니라, 학자들이 “원문의 뜻을 살린다”는 등의 위선적인 변명을 해 가며 히브리어를 들먹거리면서 본문에 변개를 가해 놓은 부분들도 지적할 것이다.


    학자들은 잠언이 대구(對句), 삼행절, 사행절, 오행절, 육행절, 칠행절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성경을 최종 권위로 삼기를 이미 거부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길고 어려운 단어로 나열한 것일 뿐이다.) 어떤 학자는 잠언의 구절들을 “동의어 나열형,” “대구형,” “합성형,” “통합형,” “발전형,” “비유형,” “수(數)형”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것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이 참으로 똑똑하며, 몇 년 동안 비싼 강의료를 내면서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깊이 있게” 배우는 것이 참으로 멋진 일임을 과시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런 용어들을 나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잠언 5:4; 6:13; 7:10; 8:9; 11:30; 12:4; 18:1,2; 20:26; 25:7,27; 26:27; 27:24; 30:5,6,14, 16,20,30,31; 31:4,8,9을 명확하게 주해하지 못했다. 긴 단어(인간의 지혜를 자랑하는 헛된 말들 - 벧후 2:18, 유 16)가 신실한 가르침, 믿음으로 하는 성경 공부, 영들을 분별함, 사실의 명확한 제시, 신실한 주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즉 언어학적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며 그 말씀을 많은 전리품(시 119:162)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의 상한 영과 참회하는 마음을 결코 대신할 수 없다.


    나름대로 잠언을 담고 있는 사본들(탈굼, 페쉬타, 마소라 원문, 소위 “칠십인역”) 중 <칠십인역>이 가장 심하게 변개되었다. 그 사본을 근거로 만들어진 RSV(1952), ASV(1901)도 수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첨가시켰다. <칠십인역>을 쓴 “철학자”의 주관적이고 즉흥적인 생각에 근거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잠 4:12,18; 11:16; 28:22; 25:20; 26:11; 17:4; 1:16; 8:32; 11:3,4; 15:31; 16:1,3; 18:23,24 등 참조). <칠십인역>(그 기록 연대는 A.D. 150년이나 그보다 더 나중일 수도 있다)의 저자들은 구약의 외경 “지혜서”(Ecclesiasticus, 이는 전도서 “Ecclesiastes”와 상당히 유사한 이름이다)와 일치하도록 많은 부분을 고침으로써 본문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다.


    잠언의 저자는 솔로몬이다(잠 25:1). 솔로몬은 자신의 글에 르무엘과 아굴의 잠언도 덧붙였는데(잠 30:1; 31:1), 이 사실 때문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잠언이 여러 사람의 글들을 모아 솔로몬의 이름만 붙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익히 들어 온 바다. (계시록을 사도 요한이 아닌 장로 요한이 썼다고 한 유세비우스, 이사야를 두 사람이 썼다고 한 교황 요한 23세.) 솔로몬이 잠언의 저자이다(잠 1:1). 이것은 신명기 34장과 창세기 14:14에서(주석 참조) 제기되는 문제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강단 주석>은 한 사람이 잠언을 썼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문체로 써야 하며, 동일한 주제를 다양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사람의 글을 모은 것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론적인 발상보다 상식이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여러 종류의 문체로 글을 쓸 수 있다. 게다가 지혜를 가르친다는 저자가 동일한 주제를 반복할 때마다 똑같은 표현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중요한 주제를 반복해서 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학자들은 잠언이 솔로몬이 죽고 나서 200-300년 후에(또는 그보다 더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 추정은 B.C. 200-600년경의 헬라 철학자들의 주가가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게 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인 솔로몬의 글이 헬라 철학이 자랑하는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기록되었다면, 헬라의 “과학과 철학”은 진리를 모방한 싸구려 “모조품”임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대의 제임스, 듀이, 러셀, 키에르케고르, 아인슈타인 등이 남긴 말은 그 어떤 것도 <킹제임스성경>을 따라잡지 못했다. 현대 철학자들이나 그들의 조상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뭔가 “독창적인” 말을 남기기에는 이미 200-400년이나 늦어 버렸다. 솔로몬이 이미 다 말해 놓았기 때문이다(전도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비 지식을 통해 우리는 이제 가장 위대한 책인 성경에서도 가장 위대한 책 중의 하나인 잠언을 공부할 준비가 된 셈이다. 힌두교나 브라만교에서 발견되는 소량의 지혜는 그나마 이 책(욥기와 전도서를 포함해서)에서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은 서른 한 장 안에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격언과 경구, 잠언, 훈계가 응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을 공부해 나가면서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욥기는 생의 중요한 문제, 즉 고난, 악, 죽음, 응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 세력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반면, 잠언은 일들의 원인, 결과, 선하거나 악한 가치관을 제시하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절대 무오의 법을 정립하여 인류로 하여금 하늘의 주(잠 2장)를 대적해서 연합하는 것을 막고 있다. 잠언의 내용은 “차든지 덥든지” “위 아니면 아래” “의 아니면 악” “공의 아니면 불의” “하늘 나라 아니면 지옥” “옳은 것 아니면 틀린 것”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런 주제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제롬이 변개시킨 로마 카톨릭 성경, 누가복음 2:14, 잠언 1:11 주석 참조)를 가져오기 위해 진리를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귀에는 거슬리는 주제들이다.


    이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열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다”(히 4:12)는 점을 명심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답은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앉은 우상의 수에 반비례한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겔 14:1-7). 우상이 완전히 제거된 머리와 마음으로 계시의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진리만을 믿어야 한다. 성경에 접근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전통이나 교회, 종교, 학위, 언어학적 재능, “과학,” 교육, 철학, 문학의 우상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판사들이 소송 사건을 다루듯이 <킹제임스성경>을 다룰 것이다. “피의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객관적 증거”로써 유죄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죄이다. 따라서 <킹제임스성경>이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객관적 증거”로써 유죄가 판명될 때까지 우리는 로마의 종교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성경을 다룰 것이다.


    잠언은 철학가들의 철학서요, 교육가들의 교육 지침서이다. 솔로몬이 기록했고, 이스라엘 자손이 정경으로 인정했으며, 신약 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고, 히브리어나 헬라어 학자들의 도움 없이 28세기 동안 보존되어 온 잠언은 독자들에게 “조상들의 지혜”와 “잃어버린 동방의 지혜”와 “말씀의 숨겨진 지혜”를 제공한다. 이 지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아퀴나스, 오리겐, 마르시온, 스피노자, 칸트, 티벳인들, 장미 십자회, 무당들, 틸리히, 유가(瑜加) 수행자들이 결코 얻지 못한 지혜이다.


    『기록되기를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명철을 없애리라.” ...이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아무 육체라도 그분의 면전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되리라』(고전 1:19,25,27,29).

     





    책 속으로


    에스라 3

     

    1:7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  내 아들아, 네 아버지의 훈계를 듣고, 네 어머니의 법을 버리지 말라.
      9  그것들이 네 머리에 은혜의 장식이 되고, 네 목을 두르는 사슬들이 되리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7절). 지식과 지혜의 책(시 111:10)은 이 말로 시작된다. 모든 학자들(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모두)이 이 “시작”을 공격함으로써 아무도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게(눅 11:52)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요한일서 4:18을 인용하면서 잠언 1:7을 묵살시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진노와 불못의 하나님(계 20:14)을 제시하는 구원 계획이나 설교는 암흑 시대 카톨릭 교회의 낡아 빠진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부정적인 설교가 사람들에게 “죄의식 콤플렉스”를 준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건전하지 못한 동기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셨다” 등. 한편 보수주의자들은 “두려움”(히브리어로 “이랏”, 헬라어로 “포베오”)이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잠언 1:7을 묵살한다. “두려움”이 “경건한 외경심”이라는 것이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조차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더포드 판사가 지옥을 “무덤”이라고 할 때는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두려움”이 두려움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믿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논리라면 “지옥”이 “무덤”이 안 될 이유도 없다.


    두려움(잠 1:7)은 열왕기상 1:50; 8:43, 창세기 19:30; 26:7에 나오는 두려움과 같다. 신약에서 “주를 두려워함”이나 “주를 두려워하라”는 표현에 사용된 “두려움”은 요한복음 9:22, 마태복음 10:31, 마가복음 4:41, 갈라디아서 2:12, 요한일서 4:18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말 그대로 “무서워하다”는 뜻으로 바울은 이 두려움을 “떨림”(빌 2:12, 엡 6:5, 고전 2;3)이라 했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되, 경외함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할지니』(히 12:28)라고 함으로써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학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두려움은 “경건한 외경심”이 결코 아니다. 어느 시대의 어떤 주석가가 무슨 말을 하든지 두려움은 “경건한 외경심”이 결코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따랐다. “지옥에서 불타는 것보다는 지옥을 무서워하는 게 낫다”는 속담과 『다른 자들은... 두려움으로 구원하되』(유 23)라는 말씀은, 기독교 교육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새롭고 문명에 뒤떨어지지 않는 “근본주의”에 밀려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현대 복음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학자들과 과학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안달한 나머지 하나님을 “교사·학부형 연합회”에 참가할 정도로 덕망 있는 분으로 바꿔 놓으려 한다. 원어사전이나 뒤적거리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학자들은 “주를 두려워함”이 무슨 뜻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의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말의 뜻을 출애굽기 20:18-20에서 분명하게 제시해 놓으셨다. 거기에는 “경건한 외경심” 같은 것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나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을 전혀 두렵지 않은 분으로 만드는 배후에 깔린 동기는 분명하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 두려워 떨게 마련이기 때문이다(헤롯, 펠릭스, 아그립파, 빌라도 등).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잠 29:25). 두렵지 않은 하나님을 제시하려고 성경을 희석시키는 학자들은 결코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다(사 66:2,5). 그들은 이름난 신학교 교수진들 앞에서 자기들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생각될 때만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다. “두려움”은 “두려움”이다. 헬라어나 히브리어 학자가 이 단어를 놓고 무엇이라 둘러대든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2절 주석 참조). “어리석은 자”가 등장한다. 잠언 처음부터 끝까지 어리석은 자는 현명한 자와 대조를 이루며 여러 번 등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는 다음과 같다.


      1. 지혜를 멸시한다(잠 1:7).
      2. 죄를 비웃는다(잠 14:9).
      3.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한다(잠 20:3).
      4. 다른 사람들을 참소한다(잠 10:18).
      5.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를 흉내낸다(잠 26:11).
      6. 눈이 땅 끝에 가 있다(잠 17:24).
      7. 자신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주는 벌에 저항한다(잠 17:10).
      8. 자신의 마음을 신뢰한다(잠 28:26).


    이 밖에도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시 14:1), 구약을 믿지 않는 자(눅 24:25), 부활이 없다 하는 자(고전 15:36), 영적인 의미로 다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마 23:9), 말을 많이 하는 자(전 5:3), 땅에 쌓아 둔 보화와 재산을 신뢰하는 자(눅 12:20) 등을 성경은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다. 이 성경적 정의대로 하자면 세상의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물질만능주의자, 카톨릭 신부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럼에도 성경이 내린 이 단어의 정의를 말해 주는 주석서가 단 한 권도 없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네 아버지의 훈계...네 어머니의 법...』(8절).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는 나아마(왕상 14:21)와 솔로몬에게 적용된다. 르호보암을 겨냥한 훈계가 그 예이다(왕상 1,2,12장). 그리스도인에게 “아버지의 훈계”는 썩지 않을 말씀의 씨로 그리스도인을 낳으신(요 1:12,13) 성령님의 훈계를 말하며, “어머니의 법”은 새 예루살렘(갈 4:26)의 법을 말한다. 새 예루살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이며, 이는 모든 카톨릭 신자들의 “어머니”인 마리아와는 완전히 반대된다. 성경은 이처럼 분명하게 구분을 짓고 대조를 시키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엉뚱한 말에 미혹당하지 않게 마련이다. 갈라디아서 4:26은 미혹된 이탈리아 통치자들의 사사로운 해석을 바로잡아 주는 말씀이다(<로마 카톨릭의 사사로운 성경해석> 참조).


    솔로몬은 “훈계와 법”이 “은혜의 장식”과 “목을 두르는 사슬들”이 될 것이라고 아들에게 말한다. 잠언 6:21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두 경우 모두 훈계와 법에 주의를 기울하는 사람을 “단장해” 준다. 베드로전서 3:1-4에서 『온유하고 고요한 영』이 경건한 여인을 단장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외적인 단장이란 금, 은, 보석으로 된 귀고리나 팔찌 같은 것을 말하며(<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Ⅱ>, 창 24장 주석 참조), 머리에 하는 장식은 면류관처럼 만들어진 화환으로 비유될 수 있고, “사슬들”은 목걸이같이 금속을 꼬아 만든 줄을 말한다(창 41:42, 단 5:29, 솔 4:9). (pp.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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