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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요약정보 및 구매

피터 S. 럭크만(Dr. Peter S. Ruckman) 저 / 편집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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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 2020년 7월 24일 개정판 1쇄
쪽수 : 814쪽
무게 : 1030g
크기 : 153*223*35mm 신국판 무선제본
ISBN : 9788988795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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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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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 상세설명

    그 동안 성경 주석가들은 모두 욥기를 손대었고, 다른 책은 간과하면서도 유난히 욥기에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어떤 사람은 수박 겉핥기 식으로 다루었고 어떤 사람은 핵심에 이르지도 못한 채 펜을 던지기도 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다른 책과 달리 너무나 광범위하고 심오한 부면을 다루고 있으므로 참으로 성령님께서 쓰시는 손길이 아니면 이 책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들이 욥기 주석서를 쓰면 쓸수록 욥기를 제대로 주석한 주석서의 필요성은 계속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을 1978년에 피터 럭크만 박사가 해 낸 것이다.

    냉정히 돌이켜 보면 다른 모든 주석가들도 나름대로 의욕은 있었지만 욥기의 진수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은 그 책에 들어 있는 영적 부면을 어느 정도 다루기는 했지만, 욥기가 다루고 있는 예언적 사실을 보는 데는 극히 미흡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피터 럭크만 박사를 다시 평가하게 될 것이며,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여러 가지 신비들을 이 책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진리의 지식에 눈을 뜬 사람은 자신만 알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독자 여러분의 영적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원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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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을 내면서 / 5
    서문 / 9

    욥기  1장 / 45
    욥기  2장 / 67
    욥기  3장 / 84
    욥기  4장 / 102
    욥기  5장 / 113
    욥기  6장 / 131
    욥기  7장 / 150
    욥기  8장 / 165
    욥기  9장 / 177
    욥기 10장 / 196
    욥기 11장 / 205
    욥기 12장 / 217
    욥기 13장 / 237
    욥기 14장 / 253
    욥기 15장 / 275
    욥기 16장 / 297
    욥기 17장 / 312
    욥기 18장 / 322
    욥기 19장 / 332
    욥기 20장 / 357
    욥기 21장 / 369
    욥기 22장 / 397
    욥기 23장 / 411
    욥기 24장 / 429
    욥기 25장 / 445
    욥기 26장 / 454
    욥기 27장 / 472
    욥기 28장 / 487
    욥기 29장 / 517
    욥기 30장 / 531
    욥기 31장 / 548
    욥기 32장 / 574
    욥기 33장 / 586
    욥기 34장 / 609
    욥기 35장 / 638
    욥기 36장 / 648
    욥기 37장 / 672
    욥기 38장 / 686
    욥기 39장 / 736
    욥기 40장 / 759
    욥기 41장 / 779
    욥기 42장 / 792
  • 서문 


    성경은 보편적인 책이다. 그래서 성경은 나이나 성별에 상관 없이 모든 인류의 모든 형태의 삶에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 66권은 25세기가 넘도록 계속 이어져 내려왔으며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쳐왔다. 성경은 “진리의 대양에 있는 한 방울의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진리의 대양이 한 방울로 응집된 것이다. 다섯 개의 대륙에서 성경 독자 50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성경에서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나 성경 중 가장 위대한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로마서,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을 들 것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선호했고, 샘 존스(Sam Jones, 1847-1906)와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잠언과 야고보서를 사랑했다. 예언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편중한다. 소수만이 누가복음과 베드로전서를 꼽을 것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마태복음을 선택하고, 오순절파와 성결교는 십중팔구 사도행전을 선택할 것이다. 갓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진리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책에 관심을 기울인다. 고린도후서가 사역에 관한 가장 위대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사도행전을 선호한다. 몇몇 배짱좋은 사람들은 히브리서를 좋아하고, 이사야서나 시편 같은 구약을 손꼽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그러나 문학인에게 있어서 책 중의 책은 욥기이다. 욥기는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깊이 느끼는 사람에게는 책 중의 책이다. 시편은 혼의 마음 속 외침을 생생하게 묘사할 뿐이며, 잠언은 지혜의 샘을 다룰 뿐이다. 그런데 이 지혜가 갑자기 욥기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욥기에 관해서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욥기야 말로 인간 지성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일 것이다”라고 했다. 필립 샤프는 “이 책에 필적하거나 이 책의 선배라고 할 만한 책은 없다”라고 기록했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욥기에 관해 “욥기와 같은 문학적 업적을 남긴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말했다. 딘 브래드리는 “욥기는 성경에서 독보적인 책이며, 세상의 문학 작품 중에서 영감받은 히브리 시의 꽃으로 우뚝 솟아 있다”라고 말했다(<성경 주석가>, 엑셀 저, 베이커 출판사). 왓슨은 사무엘 데이빗슨을 인용해서 “제 일급 광도를 가진 별처럼 욥기 저자의 눈부신 천재성은 사람의 감탄을 자아낸다”라고 말했다. 테니슨 경(1809-1892)은 “욥기는 고대와 현대의 모든 시 중 가장 위대하다”라고 했고, 루터는 욥기는 “성경의 어떤 다른 책들보다 웅장하고 숭고하다”라고 했다.


    이런 문학적 평판 외에 두드러진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이 있다 :
     1. 욥기는 이 세상의 모든 책들 중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책이다. 욥기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책들, 즉 (B.C.1800), (B.C.2000), (B.C.2000), (B.C.1600), (B.C.2900), (B.C.2600), 그리고 소위 (B.C.3400)에는 다음 네 가지 공통점이 있다.
      a. 역사 속에서 일어난 예언적 자료가 부족하다.
      b. 기록 당시의 시대를 뛰어넘는 과학적 자료가 부족하다.
      c. 짜임새와 극적 전개가 부족하다.
      d. 인류가 가진 최초의 주요 문제, 즉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에 관한 토론이 부족하다(이 문제는 인류가 항상 가져온 문제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바빌론 책들(B.C.2400), 니퍼(Nippur)의 책들(B.C.2220), 아메네모페(Amenemope, B.C.1400), 그리고 플라톤(Plato), 탈레스(Thales), 파멘디스(Parmendies), 플로티누스(Plotinus),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의 저서들에 비해 욥기는 우뚝 솟아 있다.


    2. 욥기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92) 시대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물리 과학에 관한 진술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향후 30년 내로 성취될 예언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불교 신자나 도교 신자나 브라만교 신자나 유교 신자가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영의 세계에 관한 계시들이 있고, <사자의 서, The Book of the Dead>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삶을 계시하고 있으며,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회심과 헌신의 영적 예가 있고,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사역에 관한 모형이 있으며, 플라톤(Plato)이나 소크라테스(Socrates), 막스(Marx), 프로이드(Freud), 다윈(Darwin) 등의 저서에서는 결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고난과 고통에 대한 해답이 있다. 성경의 정경에 포함된 책이나 그렇지 못한 책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기록된 최초의 책인 욥기가 그 뒤를 이어 나오는 모든 책을 압도하고 있다. 최소한 고통과 고난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그렇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약 5:11), 주께서는 의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해 세 사람을 선정하셨는데, 그 중 한 명이 욥이다(겔 14:20). 욥기 31장에는 십계명의 요구를 훨씬 뛰어넘는 개인의 의가 제시되어 있다.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주석서(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시리즈, 말씀보존학회, 1996-1997)에서 NASV의 오류를 다루었기 때문에 그런 엉터리 번역을 여기서까지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라오디케아 시대(1900-1980)의 배교를 잘 보여주는 <리빙 바이블>(1966)과 NEB(1960)를 소위 현대 “성서들”의 표본으로 선택해서 주석서에서 그것들에 관해서 가끔씩 언급할 것이다. NASV처럼 <리빙 바이블>도 책을 팔기 위해, 논리적 긍정주의자들의 전매특허인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속임수를 사용한다. 그 책은 명백히 성경을 의역한 것이다. 테일러도 서문에서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책의 표지에는 “의역된 리빙 바이블”(The Living Bible paraphrased)이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살아 있는” 성경이 무엇인가? 그들은 독자들이 읽고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성경”(The Living Bible)이라고 믿도록 하면서 그 책의 저자는 그 안에 작은 글씨로 그의 저서는 “의역”일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의역했단 말인가? “의역된 살아 있는 말씀,” 이것이 라오디케아 시대의 전형적인 접근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놀랄 것도 없다. 이것이 1880년 이후로 진짜 “살아 있는” 성경인 <킹제임스성경, 1611>을 전복시키기 위해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해 온 일이다.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시리즈를 읽어본 독자들은, 그 책을 선전하면서 일구이언하고, 이중 기준을 적용시키며 두 얼굴을 가진 허튼 수작을 잘 간파할 것이다. 밥 존스 대학의 닐과 커스터는 “헬라어 원문”을 들먹이며 이런 일을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헬라어 원문이란 네슬, 사우터, 웨스트코트, 홀트, 웨이스, 알란드 등이 만든 열두 개의 히스키안(Hesychian) 원문을 의미한다. 로크만 재단(Lockman Foundation)도 이런 식의 일을 잘 한다. 테일러의 저서인 <리빙 바이블>은 테일러가 “살아 있는 성경”을 의역한 것이다. “살아 있는 성경”이 무엇인가? 테일러가 의역한 것은 성경이 될 수 없다.


    히믈러(Himmler), 괴벨(Goebbels), 에히만(Eichman), 히틀러(Hitler), 훼스(Hoess), 괴링(Goering), 디트리히(Dietrich)는 이미 40년 이전에 이런 다중적인 의미에 정통했다. 독일 나치의 집단 수용소는 이런 형태의 용어를 사용해서 효과를 봤다. 1884년 이후 시중에 나온 모든 번역본은 이런 고의적인 거짓말이 특징이다(<뉴 스코필드 성경> 서문 참조). 현대인들은 헬라어 어근이나 라틴어를 더 이상 공부하지 않으며, 1940년부터 1960년 사이의 대학원생들은 1920년부터 1940년 사이의 고등학교 졸업생이 이해한 정도의 언어와 문법 이해력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분석할 수 없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테일러의 <리빙 바이블>은 8백만부 이상이 팔렸는데, 이것은 빌리 그래함의 열성적인 선전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리빙 바이블>을 이 주석서에 포함시켜서 부패한 다른 번역본들인 RSV, RV, ASV, 칠십인역, 그리고 클라크, 레인지, 제미에슨, 포셋, 브라운, 더멜로우와 다른 사람들의 주석서들과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 [테일러는 현대의 전천년 “근본주의자”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하고(The Living Bible 424, 436쪽 참조), 향상된 계시를 담고 있는 참조 구절들을 파괴시키고(Ibid., 441, 445쪽), 1582년 예수회 성경과 타협하고(Ibid., 761, 994쪽), 바로 코 앞에 있는 진리도 찾아내지 못한다(Ibid., 428, 777쪽). “반역한 여자”(삼상 20:30) 대신 “암캐”(bitch)라는 표현을 집어 넣고, “뒤로 물러나 있거나”라는 표현 대신 “변소에 갔거나”(왕상 18:27) 같은 표현을 집어 넣는 정도는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배설물(dung, 빌 3:8)처럼 전혀 현대적인 표현이 아니다.] 케네스 테일러(Kenneth Taylor)의 저서를 읽는 독자들은 그가 결코 “살아 있는 성경”을 출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거룩한 성경을 자기 멋대로 의역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책 표지에 그런 말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리빙 바이블>로 그냥 통용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아니다. 요즘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쉽게 속는다. 사람들은 “성경”을 산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산다. 그러나 그 책은 성경이 아니다. 마치 ASV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성경이 아닌 것과 같다.


    테일러가 쓴 책의 제목은 철학과 “향상된 사고”를 내세우는 현대 학파의 혼동과 아주 유사하다(비에너, 마게나우, 레이첸바흐 등). <존재하시는 하나님, The God Who is There>라는 제목의 프란시스 쉐퍼가 쓴 책에서 이런 것을 잘 분석하였다(1968). 그 책의 주요 골자는 헤겔, 사르트르, 다다, 가우진, 반 고호, 폴록, 미로, 세잔느, 몬드리앙, 카뮈, 키에르케고르, 클레, 아인슈타인, 하이데거, 번스타인, 헨리 밀러를 따라서 그들의 종착역까지 가보면 불가지론적인 정신 착란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 종착역에서는 단어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미술, 문학, 과학, 종교, 음악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철학의 “무의미” 학파를 대표한다. “자료”라는 단어는 논리적 긍정주의 학파(꽁트, 러셀, 마흐 등)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마치 화성학, 대차 평균, 음영, 원근, 구도, 음색, 화음, 문체, 타이밍, 문법, 구성 등이 현대 전위 음악이나 미술 문학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과 같다. 단어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문제를 뒤얽히게 하고, 서로 맞지 않는 색깔을 함께 쓰고, 원근과 비율을 무시하고, 음색과 가치를 왜곡시키고, “자료”와 “증거”를 잘못 처리하면서 거의 100년 간 용어들을 잘못 사용한 후에 이제는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리빙 바이블>은 쉽게 설명된 성경이 아니라 쉽게 설명한다는 미명 하에 본문을 바꾸어서 의역한 것이다. <뉴스코필드성경>도 공인 역본이 아니며, NASV도 미국의 표준 성경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바스, 니버, 틸리히, 알란, 리차드슨, 존 로빈슨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과 같다.


    이 주석서에서 계속해서 전제로 삼는 것은 1611년 <킹제임스성경>이 지금까지 오류가 증명된 적이 없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권위들은 이 궁극적인 권위로 판단되어야 한다. 이 성경을 모든 철학자, 음악가, 변호사, 의사, 과학자, 헬라어 학자, 인류학자, 히브리어 학자, 개정자, 주석가, 사제, 교황, 주교, 설교자, 교육자의 저서와 나란히 놓고 성경과 불일치할 때는 그 저서들을 내던져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학자들이 욥기에서 범해 놓은 오류들을 바로잡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욥기는 영적인 문제만을 다루는 책일 뿐이며, 그들은 욥기에서 예언을 다루는 구절들을 대부분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영적인 문제만을 고수한다면 누구라도 욥기 주석을 훌륭하게 써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들은 너무나 강하고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 쓴 대부분의 욥기 주석서는 읽을 만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석서는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왜냐하면 욥기 26, 37, 38, 40, 41장에 가면 99%의 보수주의자들이 너무나도 분명한 성령의 말씀을 오만하고도 퉁명스럽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틸리히(Tillich), 니버(Niebuhr), 랄프 소크만(Ralph Sockman), 파이크 주교(Bishop Pike), 유진 카슨 블레이크(Eugene Carson Blake)가 이런 사람들이다.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 현대 보수주의 학자들이 갖는 태도는 무신론자나 사탄 숭배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킹제임스성경>의 66권을 접할 때 취하는 태도와 같은 태도로 이 위대한 책에 접근할 것이다. 즉 본문을 있는 그대로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며(살전 2:13) 자신이 성경을 고칠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경건한” 학자들은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경건한”이라는 말을 여기에 집어 넣은 이유는 이 말이 현대의 파괴적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믿음의 “근본 사항”들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로서 “경건”하다는 평판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 마음에 맞게 성경을 갈기갈기 찢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마태복음, 사도행전, 요한계시록, 빌립보서, 골로새서 주석을 공부한 독자는 <킹제임스성경> 본문이 대적자들에게 제기하는 문제들을 그들은 단 하나도 답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1969년부터 1978년 현재까지 그들이 내놓은 반박 사항은 욕과 비방과 잡담과 오만한 비웃음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에겐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니까. 무지와 구체적인 증거 부족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보면 그들이 다루는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자격 있는 권위자들”과 “인정받는 학자들”이 우리를 전혀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그들을 대할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9년간 그들은 <킹제임스성경>이 지식을 가르쳐온 사람들을 어떻게 바로잡아 왔는지 자세히 읽어 왔다. 지난 9년간 “저런 과격한 극단주의,” “저런 미치광이 같으니라구”만을 중얼거렸다면 그들은 성경적인 어떤 것을 토론하는 데 성경이나 성경 저자에 대해 사실은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주석서에서는 사람들의 수많은 오류들을 계속해서 바로잡을 것이다. 이들은 밥 존스 대학, 펜사콜라 기독 대학, 그레이스 성경 협회, 리버티 성경 대학 등의 교수진들이 쓰는 교과서를 저술한 사람들이다. 이런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적 진리의 무오한 책이 있다. 이 책으로 케일(Keil), 레인지(Lange), 델리취(Delitzsch), 엑셀(Excell), 드라이버(Driver), 데이빗슨(Davidson), 움브라잇(Umbreit), 에왈드(Ewald), 피크(Peake), 버드(Budde), 굿(Good), 메이어(Meyer), 덤(Duhm), 막스(Marx), 시에그필드(Siegfield) 슐롯만(Schlottman) 등을 특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아주 훌륭하게 바로잡을 수 있다.


    “광신적인 극단주의”나 맹목적인 편견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 철학, 비평, 추측, 연구, 조사, 분석, 반대 의견, 변이 그리고 자신들이 성경을 고칠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변개시킨 것을 주의깊게 살펴본 이후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은 물리학 분야의 아인슈타인, 로렌즈, 밀러, 퍼미 등이 했던 주장만큼이나 건전하며, 지난 500년간 국제 정책 분야에서 유엔이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해왔던 주장보다 훨씬 더 건전하다.


      1.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 분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물질계의 피조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3.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이 피조물들과 직접 의사소통
         을 하신다. 즉 말로 의사소통을 하신다. 
      4. 완벽한 계시를 축자적으로 영감을 불어 넣으실 만큼 능력 있으신 하나님은 오류없이 그것을 보존
         할 만큼 능력이 있으시다. 
      5. 진리를 찾는 죄인들이 이 계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정이 아니라 사실을 다룬다(The Monarch of the Books, 1973, The Christian's Handbook of Manuscript Evidence, 1970 참조).


    다른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 여전히 어둠 속에 있을 수 있어도(고후 4:4) 우리는 그렇지 않다.


    성육신한 진리를 찾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여전히 기록된 진리(요 17:17)를 찾아 헤매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기록된 진리와 성육신 하신 진리가 있다. 우리의 독단적 성향과 확신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학자들을 완전히 분노케하고 흥분시켜서 그들이 거의 살인을 할 지경에 이른다 할지라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학자들은 절대 진리를 자신들의 “관대한” 무지로 대체시키기 위해 “관용적인 불가지론” 뒤로 숨어 버리지만, 우리는 성경을 변개시키지도, 그들에게 순응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누군가가 무지하면 “무지하게 내버려 두라”(고전 14:38)고 말한다. 이 구절은 30년간 헬라어 문법을 공부해 온 근본주의 신학교의 박사들과 RSV 개정 위원회의 구원받지 못한 신학 박사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무슨 말로 변명한다 해도 무지는 무지다[힐스(Hills)의 <킹제임스성경 수호, King James Bible Defended>, 84-85쪽 참조].


    성경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진리의 원천이시며, 우리 구원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시고, 모든 선하고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며, 모든 지식과 지혜의 처음과 마지막이신 분의 조명을 받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인도자가 있기 때문에 “과학적 해석,” “비평 서적,” “의심할 여지 없는 학자적 지위,” “기념비적인 연구,” “광대한 기술 자료”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진리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는 미혹당한 죄인들의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 휴대용 200와트짜리 등불이 있는 사람에게 손전등이 왜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문맥 속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믿을 것이다. 4000명의 “헌신된 천재들”이나 “경건한 학자들”이 이 진리를 바꾸고자 하는 구절들에서도 우리는 그들을 가볍게 받아넘길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의 저자가 계시고,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성경을 상고하라.』(요 5:39)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우리 가까이에 두셨다(롬 10:8).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는 케일(Keil), 델리취(Delitsch), 게세니우스(Gesenius), 하카비(Harkavy), 움브라잇(Umbreit), 포셋(Fausset), 모로(Maurer), 모펫(Moffat) 등의 파괴적인 학자들은 필요 없다.


    학자 연합 소속의 다른 많은 학자들을 포함해서 위에 열거한 학자들은 성경적 문제를 다룰 때는 참으로 불필요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절대 권위가 없으며 단지 자신들의 두뇌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의 말이나 혹은 하나님의 책을 수정하려고 할 때 그들에게는 어리석은 죄인들이 만들어 낸 오류 투성이의 자료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진 곧은 자는 결코 휘거나 치수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히브리어 본문[드로시(DeRossi), 케니콧(Kennicott), 맛소라 본문]와 헬라어 본문(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 등)을 <킹제임스성경>으로 판단할 것이다. 그것들에 잘못이 있으면 우리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것들을 바로잡아 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오한 말씀을 보존하시는데 지금까지 증명된 단 하나의 오류도 없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의심할 여지 없이 지지하는” 대학(밥 존스 대학, 휘튼, 펜사콜라 기독 대학, 성경 침례, 하일스 앤더슨, 테네시 템플)에 다니고 있다고 속임당하고 있는 신학생들은 성경의 절대 권위를 믿는 미국내 주요 기독교 대학은 두 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성경”은 존재하지도 않고, 이미 사라졌으며, 입수할 수도 없고,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원본”일 뿐이다. 설령 그들이 원본을 발견한다 해도 발견하자마자 <킹제임스성경>을 수정하는 것처럼 뜯어 고칠 것이다. 현대 기독교 교육에서는 이중 기준을 적용한다(The Monarch of the Books 참조). 그 결과 두 권위가 서로 상충될 때는 학교가 최종권위가 되어 신의 역할을 한다. 현대에도 신비적인 부두교가 있다. <신앙, Faith>, <성경적 관점, The Biblical Viewpoint>, <주의 칼, The Sword of the Lord> 같은 잡지에 그런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 학자들이 최종권위다. ‘신뢰할 만한 것’과 ‘신뢰할 만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구별해 주겠다. 사람들이 우리처럼 똑똑해질 때까지 우리가 그 역할을 담당하겠다. 그런 다음에 이렇게 배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똑똑해질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뻔한 거짓말에 속지 않는 우리에게 지난 18세기 동안 주석가들이 써 놓은 주석(출애굽기, 호세아, 요엘, 아모스, 미카, 나훔, 창세기, 잠언, 오바댜 주석)은 모두 시간 낭비이며 토론하는 것도 무익하다. 아무리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죄인일지라도 성경은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 구원받았고 “경건하며,” “헌신되었다”고 해서 옛 본성이 뿌리째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육은 여전히 육이며, 육이 무덤 속에서 썩어갈 때도 <킹제임스성경>은 건재하다. “수천 개의 필사본”을 찾는 “수천 명의 선한 사람들”이 1800년 이후로 “믿을 만한 번역본들”을 양산해 왔다는 현 시대의 환상은, “수천 권”의 책을 읽는 “수천 명의 독일인들”이 제 3제국(1933-1945)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에 제 3제국의 설립과 발전을 추적해 올라가면 15명에게로 집약되는데, 이들 중 10명도 다른 사람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수천 명의 경건하고 헌신되고 열성있는”(존 R. 라이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 사람들은 종교개혁 본문을 ASV(1963)와 NASV(1963)같은 쓰레기로 대체시키면서 40명의 교사들을 열거한다. 이 교사들이란 배교한 9명의 지도자들을 따랐던 어리석은 자들이다. 오리겐(Origen), 어거스틴(Augustine), 그리스바흐(Griesbach), 제롬(Jerome), 웨스트코트(Westcott), 홀트(Hort), 티셴돌프(Tischendorf), 샤프(Schaff), 네슬(Nestle)이 바로 그들이다. 소경들[로버트슨(A.T. Robertson), 메이첸(J.G. Machen), 웨스트(Wuest), 티엠(Thieme), 왈부어드(Walvoord)]이 소경들을 따를 때 아무리 “헌신되고.” “열성있다”해도 모두 시궁창에 빠지는 꼴이 된다. 이 주석서에서 우리가 전제로 삼는 것은 하나님은 참되시나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는 지난 6천년간 우리가 만나고, 대화하고, 가르침을 받고, 보고, 책으로 읽고, 밑에서 배운 모두가 해당된다. 우리의 전제는 성경을 만지작거리는 어떤 죄인도 성경으로 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죄인은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신학교에서 받은 신학 박사나 문학 석사 학위를 자랑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것은 성경을 기록하신 분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분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시다(시 119:99,100). “자격을 갖춘 권위자들”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우리 아이들을 바로 잡아주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그들을 바로잡아 줄 것이며, 그들의 학위나 명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욥기는 42장, 1,070절, 10,102단어(영어 <킹제임스성경>의 경우)로 되어 있다. 각 장은 대환란의 각 달에 해당한다. 욥은 7일 낮과 밤을 땅에 있었다(욥 2:13). 1일은 다니엘의 칠십째 주의 1년에 해당한다. 욥기는 144개의 논리적 단락으로 나눌 수 있고, 크게는 6개로 대구분을 지을 수도 있다(1-2장, 3-14장, 15-21장, 22- 31장, 32-37장, 38-42장). 참으로 “우연하게도” 144,000명의 “하나님의 종들”이 환란 때 인을 받으며(계 7장), “6”은 적그리스도와 연관해서 너무도 눈에 띄는 숫자이다.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나온 144,000명의 동정인 유대인들은 대환란 때 두 번 나온다(계 7,14장). 이들은 “영적 이스라엘,” “여호와의 증인들”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욥기는 다니엘의 칠십째 주를 다루는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논리적 구분을 보고서 놀랄 것은 없다. (학자 연합에서는 “장을 세는 것”과 전천년주의에 대해서 벌써부터 피의 복수를 할 것처럼 소리를 지르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그런 소리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욥”이란 말은 박해받는다는 뜻이다(환란 때 이스라엘처럼). 욥은 이스라엘이 환란 때에 있게 될(사 63:1) 에돔 땅에 있다(애 4:21). 욥을 박해한 자가(욥 1:6-9) 환란 때 이스라엘을 박해할 것이다(계 12:13). 그래서 욥의 “사로잡힘”도 당연히 종국에는 회복된다(욥 42:10).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사로잡힘이 환란 끝에 돌이켜지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부활도 포함되기 때문에(겔 37:12,13, 행 26:6,7) 욥의 죽은 자녀들도 욥기 끝에서 부활한다(욥 42:13). 그러나 400명의 주석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욥기는 곧 시작될 대환란 때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을 다루고 있으며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이다.


    욥기의 예언을 다룰 때 학자들이 보여 주는 자료는 너무나 미미하다. 이는 C.I. 스코필드의 열렬한 찬양자였으며 전천년설을 표방하는 학자였던 윌리암 비더울프조차도 욥기에서 재림에 관한 참조 구절을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비더울프의 <천년 왕국 성경>(재림 성경)에는 욥기 19:25가 재림에 관한 유일한 참조 구절로 되어 있다. 그가 50개의 다른 참조 구절들을 놓쳤다는 것은 신비에 가까운 일로 최종권위로서 <킹제임스성경>의 본문을 거부했다는 사실만이 이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 바튼, 페이네도 <성경 예언에 관한 대백과사전>이라는 저서에서 피상적이고 얕은 지식만을 싣고 있다. 페이네 박사는 욥기에서 예언에 관한 참조 구절 10개를 발견한다. 마지막 9개의 장에서만도 20개 이상의 참조 구절이 있는데도 말이다.


    적그리스도, 마귀, 환란 때 군대의 이동, 재림의 경로, 환란 때의 이스라엘의 상황, 휴거에 수반되는 현상들, 아마겟돈 전쟁 등에 관한 묘사 외에도 환란 때 죽음을 구하는 사람들, 환란 후반기의 재앙들, 이 기간 중에 있을 마귀 숭배 등이 나온다. 보수주의 학자들이 이 모든 참조 구절들을 지나쳐 버리는 이유는 고의적으로 <킹제임스성경>을 깎아내리고 성경에 나온 진술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본문에 없는 말을 한다”고 비난한다. 편견에 가득 차서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고 대신 허튼 소리를 늘어 놓는 이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자만심이 강한 사람들이 우리를 박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코 앞에 있는 것 외에는 보지 못한다. 욥기에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합친 것보다 재림에 관한 참조 구절이 더 많다.


    잠시 중요한 자료를 살펴보도록 하자.


    자유주의자, 근본주의자, 불가지론자, 영지주의자, 무신론자,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욥기의 기록 연대와 저자가 가장 두드러진 논의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인간 저자는 욥기 32:16에서 일인칭 단수로 나와 있으며, 같은 문맥에서 청중을 “그들”로 언급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욥기 32:16은 시중의 모든 번역본에서 변개되었으며, 1800년 이후로 모든 주요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믿을 만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믿을 만한” [섬너(Sumner), 버논(Vernon), 멕기(McGee), 라이스(Rice), 로버트슨(Robertson) 등 잘못 인도함을 받은 형제들의 말을 인용하자면] 번역본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욥기처럼 오래된 책의 저자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교의 성경을 거부하는 배교자들과 보조를 맞추어 1800-1980년의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아무도 욥기의 저자를 알 수 없다”는 우화를 만들어 냈다. 욥기 32:16의 엘리후의 말을 삭제하거나 변개시킴으로써 이런 일을 자행하는 것이다. 심지어 포셋마저도 독일과 영국의 성경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엘리후는 욥기를 쓸 만한 능력이 없었다고 주장한다(주석, 9쪽). “선두 그룹의 학자들”은 “욥기”의 저자를 알 수 없다는 데 무조건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게 해서 욥기의 연대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잡고서 족장 시대(B.C.2000-1600)와 모세 시대(B.C.1600-1300)부터 시작해서 솔로몬 통치(B.C.1000)나 포로기 이후(B.C.520-400)까지 추측한다. 엘리후가 저자라면, 이 책의 기록 연대를 야곱과 에서시대 이후로 바꾸려는 모든 시도가 좌절되기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교 문학의 종교적 입지를 고수해야 하는 것이다. 왓슨(해석자 성경, 2권, 694쪽)은 “모세 이전에는 그렇게 정교한 표현을 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렇게 ‘당황스런 것들’을 다뤘을 리 없다.”고 말한다.


    사무엘 콕스는 연대를 솔로몬 이후로 잡는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조”는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 체계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솔로몬 이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욥이 가진 개념”을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콕스가 내놓은 “결정적 증거”는 아담에서 다윗까지 이어지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에 욥이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욥기가 솔로몬 이전에 기록됐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히브리서 저자는 어떻게 해서 유다(창 44:18-25), 피느하스(민 25:6-10), 칼렙(수 15:13-20), 요나단(삼상 14:1-5), 셈을 언급하지 않는가? “궁핍과 고난과 학대”(히 11:37)가 욥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를 묘사하는 것인가? 하워드 휴즈를 묘사하는 것인가?


    왓슨은 욥기와 <사자의 서, The Book of the Dead>가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인정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사자의 서>에는 구성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예언적 자료도, 인간이 갖는 주요 문제에 대한 해답도 없기 때문이다. 욥기가 <사자의 서>를 따른 것이라면 그 기록 연대가 모세 시대보다 훨씬 이전이 된다. <사자의 서>가 욥기의 일부를 베낀 것이라면 <사자의 서>가 첫 번째로 기록된 책이 아니다. B.C.34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자의 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전혀 책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몇 십개의 관에서 발견된 종이 조각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레난은 욥기가 기록된 이후에 엘리후가 자신에 관한 부분을 첨가했다고 주장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욥기가 “포로기(B.C.600-400)의 히브리 사상가들”에게 가깝다는 이유로 욥기를 “포로기 이후”의 것으로 생각한다. 사무엘 콕스와 메레디스 클린(위클리프 주석)에 따르면 저작 연대가 솔로몬 시대거나(<성경적 예증, The Biblical Illustrator>, 베이커 출판사, 9쪽), 그렇지 않으면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것이다. “그 책의 웅장함과 자연스러움”은 “선지자들의 종말론적 예언” 이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독단적인 주장은 욥기에서 50개의 종말론에 관한 진술을 폐기시킨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콕스와 크리네가 욥기에 얼마나 많은 “종말론적인 예언”이 있는지 안다면 그들은 기절할 것이다. <새성경 주석, New Bible Commentary>에는 대다수의 죽은 정통주의 배교자들이 욥기에 접근하는 접근 방식이 잘 나타난다. 저자인 헤브너는 욥기의 저작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다른 문학 작품에 나오는 시보다 별로 중요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오에스터리와 로빈슨을 인용하면서).


    지금까지 기록된 최초의 저질 책을 공동 집필하는 데 움브라잇(Umbreit), 모러(Maurer), 제미에슨(Jamieson), 포셋(Fausset), 브라운(Brown), 버나드 램(Bernard Ramm) 그리고 다른 “복음주의자들”이 힘을 모았다. 그러나 C.I. 스코필드(<스코필드 관주 성경>, 569쪽)는 최소한 욥기가 초기 저작물임을 주장한다. 벌링거는 뒤로 물러나서 모세를 그 저자로 볼 수 있는 시기인 B.C.1516년까지 연대를 옮겨 놓는다. 아담 클라크는 욥기가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하면서 모세의 율법이 욥의 인생과 행위에 있어서 쟁점이 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참조 구절들을 인용한다(욥 31:9,16,26,32). 다른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은 시인,” “문학적 천재,” “포로기 이후의 서기관” 등을 들먹거린다. 성경 비평, 성경 신학, 성경 개론[벵겔(Bengel), 셈럴(Semler), 펠(Fell), 벤트리(Bentley), 파우루스(Paulus), 바우어(Baur) 등] 등에 관한 문학 작품집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식의 “학자들”이 무엇을 만드는지 잘 안다. 즉 요구르트를 만드는 것이다.


    개방적인 마음을 가진 불가지론적 태도를 취하는 상대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따르자면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이사야의 절반을 썼고,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계시록을 썼으며,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마태복음을 썼고,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창세기를 썼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결국에는 진리의 하나님이 사도행전 17장의 “알지 못하는 신”이 되어버린다. 적어도 하나님의 계시의 빛으로 보면 “자비로운 불가지론자”는 불경건한 무식자일 뿐이다. 욥기 32:16을 믿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유이다. 여기는 자유 국가니까. 그러나 성경을 믿는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분별있는 사람으로 여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말라. 그들에게 없는 자료가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가 왜 그들의 무지에 동화되어야 하는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광고하고 다니지 말라. 무지로 전향하는 일은 오늘날 기독교 교회들이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무지한 자들은 오늘날 교회에게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필요한 것처럼 “교부들” 시대에도 자신들의 엄청난 어리석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칠십인역(A.D.150-350)의 저자들에게는 욥기가 너무나 어렵게 여겨졌기 때문에 기원후에 나온 필사본들에서는 욥기의 사분의 일이 사라지고 없다. 던은 1, 2, 42장이 “어떤 인기 있는 책의 조각들”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빗슨은 욥기의 연대를 포로기 시대인 B.C.597년으로 잡는다. 프톨레미와 게세니우스는 우스가 아리비아 사막 북쪽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실제보다 200마일 이상을 잘못 잡은 것이다. 롤링슨은 300마일 동쪽으로 그 위치를 옮겨서 갈데아 우르 지방으로 잡는다. 다른 비평가들의 견해를 빌자면 욥이 아브라함, 모세, 솔로몬, 다윗, 아하수에로, 느부캇넷살 시대에 살았던 아라비아인, 이집트인, 시리아인, 이스라엘인, 이두메인, 혹은 함족이 돼버린다. (하기야 인생의 묘미는 다양성이니까...)


    욥기 본문을 볼 때 욥기의 저자가 욥을 위로하러 왔던 세 명의 “위로자들”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상당히 많다. 이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욥 32:1-16 참조) 벌링거는 욥기의 연대와 저자에 관한 기술에서 현명하게도 엘리후를 빼버렸다(<컴패니언 바이블>, 666쪽!!!). 벌링거가 욥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저자를 제외하고 모두 열거했다는 사실은 세대주의자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파괴적 비평가가 <킹제임스성경>의 본문에 접근할 때 취하는 전형적인 태도이다. 헬라어와 히브리어 어근에 대한 많은 설명으로 둘러 싸여서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콥틱어, 시리아어, 칼데아어 단어 입문서와 어휘집, 그리고 번역본들과 탈굼(Targums, 구약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한 것)들, 비평 서적들과 주석서들, 필사본과 “부연 설명”으로 가득 찬 세속 역사 자료들이 필립 샤프를 질식시키는 바람에 이 현대의 학자라는 사람은 자신이 논하고 있는 책의 주요 인물조차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욥, 하나님, 사탄 외에도 욥기에서 주요 인물 중 하나가 엘리후이다. 엘리후가 말하는 부분이 여섯 장에 걸쳐서 나오며, 이것은 전체 욥기 중 가장 긴 말이다. 욥 자신마저도 여섯 장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욥 26-31장). 엘리후가 빌닷, 소팔, 엘리파스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벌링거는 왜 알지 못했는가?


    간단하다. 그는 지금까지 살았던(1700-1900) 최악의 독일 합리주의자요, 영국의 이신론자로서 욥기의 진짜 저자를 없애는 데 너무 열중한 것이다. 벌링거가 전천년 근본주의자라는 사실은 <킹제임스성경>을 믿는 문제에 접하게 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엘리후는 자기 자신이 욥기의 저자라고 말한다(욥 32:16). 그리고는 자기 자신을 뺀다(욥 42:1-10). [후반부에서는 “세 명의 친구”만이 언급된다(욥 42:7). 욥기의 기록 연대는 즉각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자격을 갖춘 권위자들”에게는 쓸만한 것이나 논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1800년 이후의 모든 학자들과 주석가들은 욥기 32:16을 슬며시 지나친다. 학자들의 논쟁은 그들에게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후가 저자라는 사실에 근본주의자들, 무신론자들, 불가지론자들, 보수주의자들, 카톨릭,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대한다.


    1. B.C.1900-1600년에 쓰인 언어치고는 “너무 발전되었다.” [NCCC의 <해석자 성경>이나 위대한 19-20세기 자유주의자인 브릭스(Briggs)가 쓴 저서 중 어떤 것이라도 살펴보라.]


    2. 출애굽기와 파라오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참조 구절이 너무나 많다(욥 13:24; 4:9; 15:24; 26; 18:15; 12:17,24; 7:25; 8:17,18,19; 8:8,10; 20:17; 29:6; 15:27; 6:4; 16:13). [열거한 것 중 80%가 미래에 성취될 전천년주의적 예언이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이 사실을 놓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중 90%가 진리를 변개시키는 무천년주의자나 후천년주의자이기 때문이다.]


    3. 내용이 전혀 “원시적”이지 않다. [솔로몬이 욥기를 기록했거나 최소한 욥기를 번역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아담 클라크가 세워놓은 비교 설명을 참조할 것(Ibid., 7-11쪽).] 종교적으로 자유주의자인 라잇풋(1880)만이 엘리후가 저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라잇풋은 즉각적으로 엘리후가 모세 이후 시대까지 살았다고 덧붙인다. 욥기 마지막 부분에 이르게 되면 이러한 “첨가”와 만나게 될 것이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반론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A. “현대인”이 가장 진보했다는 가정은 모든 진화론자들의 종교적 독단이다. 그라프 벨 하우젠 학파의 이런 광신적이고 극단적인 엉터리 이론은 참으로 지루하다. 많은 학교에서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연대를 B.C.1000-400년으로 보고 있다. “언어가 너무 진보”했거나, “제사장 개념이 너무 발달”했다거나, “일신론의 고도의 윤리적 기반이 없었다”는 등의 이유를 댄다. 이런 애들 장난에 대해 로버트 딕 윌슨은 50년도 더 이전에 답변을 해 놓았다(<구약의 과학적 고찰>, 무디, 1959). 그러므로 그 기본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하겠다[힐스(Hills), 킹제임스성경 수호, The King James Version Defended, 1973, 70-82쪽]. 언어의 혼란이 일어난 바벨탑 사건 이후 테만 지역에서 언어가 얼마나 잘 발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들은 엘리후의 저서를 모세가 히브리어로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출 2:10). 세속 증거로 성경을 계속해서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세속 증거는 성경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고안해 낸 것이다. 세속 증거를 성경으로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법칙이다. 자신들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과학적 상대주의자들의 타락한 가정에 성경이 매일 것 같은가! 말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적 상대주의자들, 국제 사회주의자들, 긍정적 사고가들, 고고학자들, 논리적 긍정주의자들, 경험적 물리학자들이 성경에 복종해야 한다(히 4:12,13). [뒤범벅이 되기 전에, 하늘과 땅이 없어진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성경으로 자신의 사고 체계를 바로잡으라.]


    B. 출애굽기에 대한 참조 구절들로 추정된다. 욥기를 과거의 역사에 한정시키고, 고난에 관한 영적 교훈으로만 적용 범위를 제한시키려고 애쓰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욥기가 적그리스도(욥 40:15), 다니엘의 70째 주(욥 24장), 마귀(욥 41장), 재림(욥 37:1-5), 이스라엘의 회복(욥 42장)을 그린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출애굽기 15장은 휴거의 모습이며(출 15장 주석 참조), “욥기”가 이 문제를 논하는 곳에서 성령께서는 출구를 크고도 분명하게 제시해 주신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만이 성경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대한 참조 구절(욥 20,29,31장)들로도 생각된다. 스트라우스, 아스트룩, 레난, 드웻, 그라프 등의 진화론에 근거한 가설을 기반으로 해서 모세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윤리적 원리나 회생제에 대해 그렇게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담 클라크가 출애굽기 18:12과 창세기 8:20(혹은 12:8)을 봤더라면 욥이 드리는 번제나 희생제가 “모세 이전”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교도 왕(창 20:5)은 욥기 31:9를 전혀 문제삼지 않았으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야단칠 때(창 20:8- 11) 모세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아담 클라크는 (자신의 주석서 2-11쪽 서문에서) 모세 이전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무지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로마서 1:19와 2:14절로 그의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C. “문체”에 대한 논쟁은 학자 연합이 잠언에 관해 우리에게 제시하는 속임수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문체”는 아라비아 시인들의 작품과 일치하는데 그들은 심판과 운명의 여신에 관한 많은 철학적 질문에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다. 스타일은 드라마나 서사시이고 호머(Homer), 버질(Virgil), 오비드(Ovid), 호레스(Horace), 바가바드기타(Bhahavadgita)의 작품과 보조를 같이한다. 문학의 초기 역사에서(B.C.1800-1700) “욥기”에 필적할 만한 작품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이 최초의 진짜 “책”을 기록하셨고, 그 책에서 인류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첫째가는 주요 관심사인 죄와 고통의 연관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필적할 만하거나 유사한 작품을 정신없이 찾고 있는(B.C.500년 이전에) 학자들은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게 된다. 하나님 자신이 인류에게 직접 전달하신 것에 정말로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그분 자신이 기록하신 것에 필적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엘리후가 B.C.1700년이 되기 훨씬 전에 이 책을 썼다는 타당한 4가지 객관적인 증거들이 있다.


    1. 출애굽기에 나온 연대를 비교해 보면 벌링거가 제시한 연대(B.C.1996)보다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이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라킨(Larkin)은 B.C.2111년으로 못 박고 있는데 이는 벌링거보다 115년 앞서는 것이다. 이 115년이 에서와 그의 아들들의 연대(창 36장)에 더해지면 욥기 2:11의 “테만인”은 B.C.1780년에 욥을 “위로”하게 된다(창 36:15). 왜냐하면 테만은 에서의 손자이고 에서의 형제인 야곱은 B.C.1700년 전에 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35-37장 주석에서 어셔 주교가 제시한 연대는 B.C.1800-1780인데 이 날짜는 이집트에서의 “430년”을 고려해 볼 때 맞지 않는다(출 1:8-10 주석 참조).


    2. 욥기에 나오는 인물의 배경은 모두 족장 시대이다. 수하인 빌닷(욥 2:11)은 수아와 연관되며(창 25:2), 예레미야 49:8의 에돔과 명백히 연결된다. “테만인 엘리파스”는 창세기 36:10-11에서 그 이름을 얻었고, 분명히 예레미야 49:7과 아모스 1:11,12에 나오는 에돔과 연계된다. “후스”(창 22:21)의 형제는 같은 문맥에서(렘 25:23) 찾아볼 수 있으며, 계속해서 예레미야에서 참조 구절을 얻을 수 있다. 예레미야는 52장으로 되어 있다(4×13). “예레미야”란 단어는 “쫓겨난”(cast out)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그 책에서 13번 나온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계시록 11:1-4의 모습을 미리 보면서 예언한 것이다. 이 때에 아이를 갖는 여자들에 대해 경고하신 구세주께서(마 24:19) 예레미야에게 결코 아이를 갖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렘 16:2). 소팔은 엘리파스와 빌닷처럼 신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스 땅”에 소팔이 살았다고 추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레미야가 “우스 땅”을 에돔과 동시에 언급하기 때문이다(애 4:21, 렘 25:20). 창세기 36:28에서 우리는 우스 자신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그 땅 이름이 붙여졌다) 에돔 땅에 살았던 “호리인”임(창 36:20,21)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욥기의 배경은 시내가 아니라 에돔이며, 그 등장 인물은 에서의 손자들과 동시대인들이다. 모세와 동시대인이 아니다.


    3.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아담이 살았던 이전 시대에 관한 참조 구절을 완전히 간과한다. 그때 홍수가 있었다(욥 8:8; 21:12; 22:15,16; 20:7-15; 31:33; 15:19). 이 구절이 언급되면 주석가들은 연대기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주석을 달지 않는다. 욥기의 등장인물들이 범죄자들과 범죄에 관해 말할 때 그들 마음 속에 아담과 홍수 때의 육체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욥기가 “모세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면 왜 파라오가 언급되지 않는가? 파라오는 출애굽 이후로 “죄수 중 우두머리”가 아닌가? 게다가 욥기에 창조에 관한 주제가 왜 계속해서 나오는가?(욥 25:5; 26:7-14; 38:4-10; 15:15 등).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왜 언급되는가?(욥 1, 2, 38). 여호수아, 재판관기, 사무엘상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언급이 없다.


    4. 연대 문제를 단번에 확고하게 매듭짓자면 욥기 어느 곳에서도 “모세의 율법”에 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수아나 느헤미야를 읽어 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이후에는 (출애굽 이후) 히브리 성경에 “모세의 율법”이나 “율법 책”이라는 표현이 9번은 언급되며, 포로기 이후 기간에는 15번 이상 언급되는 것을 알 것이다. “토라”(히브리어로 “율법”이란 단어가 출애굽기 12:49와 말라키 4:4 사이에 100번 이상 나온다. 그런데 그 단어가 욥기에서 유일하게 언급되는 때는(욥 22:22) 하나님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 있는 뭔가에 관한 언급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욥 41,42장) 욥에게 그 말씀을 하셨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벌링거가 말한 것처럼 욥이 잇사칼의 아들이라면(창 46:13) 어떻게 자신의 할아버지나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야곱의 아들들이 아브라함의 축복에 대해(창 12:1-4) 몰랐다고 말하려는가? 욥이 야곱의 자손이었다면 욥에게는 그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축복을 약속받은 후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욥이 야곱의 자손이었다면 엘리후가 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겠는가? 엘리후는 나홀의 둘째 아들이며 아브라함의 형제인 부스의 자손임이 명백한데도 말이다(창 22:21). 본문을 있는 그대로 보면(욥 32:16) 엘리후라는 이름의 증인이 이 책을 기록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책은 우리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제시해 준다.

     





    책 속으로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주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더라.
      7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시니,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말씀
        드리기를 “땅에서 여기저기, 위아래로 두루 다니다 왔나이다.” 하니, 
      8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종 욥을 유의해 보았느냐? 세상에 그와 같은 사람
        은 아무도 없나니, 그는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자니
        라.” 하시니라.
      9 그때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리이
        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소유한 모든 것에 사면으로 장벽을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
         께서는 그가 손으로 하는 일에 복 주셨고, 그의 재산이 그 땅에서 늘어나게 하셨나이다.
     11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밀어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쳐 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를 정
         면으로 저주하리이다.” 하더라.
     12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이 네 권세에 있으나,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라.” 하시니, 사탄이 주의 임재 앞에서 물러가니라.


    이때 욥의 인생의 무대에 “우리 형제들의 고소자”(계 12:10)가 등장한다. 그는 성경에서 50번 이상 등장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성경에는 18명의 적그리스도의 유형이 나온다(<짐승의 표>, 말씀보존학회, 1997. 참조). 성경에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 관한 정보보다 이 “죄의 사람”(살후 2:1-3)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정보가 더 많다. 성경에서 사탄은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 하나님 다음이다(슼 3:1-2). 천사장조차도 사탄을 비방할 수 없다(유 9절). 그는 별 노력도 들이지 않고 “온 세상”(계 12:9)을 미혹할 수 있다. 그는 거의 6000년간의 기록된 역사 속에서 그와 함께 링에 오른 모든 사람을 패배시킨다(한 사람만 제외하고).


    성경에 나오는 사탄은 통치자이며(그리스도처럼), 신이고(그리스도처럼), 천사이며(그리스도처럼,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갈라디아서>, 말씀보존학회, 1997. 4:14 참조), 메시야이고(“기름부음 받은,” 겔 28:14), 왕이다(욥 41:34).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는 흰 말을 타며(계 6:1-2), 성경을 인용하고(눅 4:10), 도시인 신부를 가지고 있으며(계 17장), 그리스도처럼 그에게도 사역자들, 사도들, 교회들이 있다(행 19:37). 그가 활동하는 주요 영역은 종교 영역이며 “종교”를 제거하기 위해 종종 과학과 교육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일시적으로만 그럴 뿐이다. 이 선견지명이 있는 “이 세상의 신”(고후 4:4)에게는 미래에 성취될 계획이 있다. 외계에서 지구로 내려와서(계 12:3-12) 인류의 지배자이며 구세주로 자처하며 보좌에 앉는 것이다(살후 2:1-10). 그는 과거에는 그룹이었으며(겔 28:14), 현재는 용이며(사 27:1-2), “빛의 천사”로 나타난다(고후 11:1-14). 모든 천사는 남성이므로 그도 외계에서 온 한 남자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며(계 13:18, 사 14:16), 과학, 교육, 종교가 지난 5,800년 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더라』(6절). 여기에 사탄과 함께 온 “하나님의 아들들”(6절)은 아담 이전의 존재들이다(욥 38:7 주석 참조). 그들은 시편 82편과 창세기 3:5의 “신들”로 창세기 6장 주석에서 이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 장면은 열왕기상 22장과 연결된다. 거기서는 거짓말하는 영이 아합을 속이고 “한 방” 먹인다.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더라』(6절)는 말이 과거 시제로 단순한 서술체로 본문에 나온다. 그러나 고통, 죽음, 마귀 숭배, 배교, 무지, 거짓말, 도둑질, 굶주림, 살인, 저주로 가득찬 6000년이라는 인간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말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이다. 사탄이 시몬 베드로와(눅 22:31) 다윗(대하 21:1)을 노린 것처럼 여러분을 노렸다면, 그러한 상황에서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은혜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기도와,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모든 약속과 성령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위로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더라”는 “다가올 사건들”의 전조이다. 이런 선언에 참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피가 얼어 붙을 것이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7절) [마 26:50에서 이 질문의 짝을 살펴보라.] 이 질문에는 사탄이 지상에 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행 14:12 주석에 나오는 “쥬피터”에 대한 설명과 계시록 12:10의 “우리 하나님 앞에서”에 관한 주석 참조!] “땅에서 여기 저기”(7절)라는 말은 “두루 다니는” 베드로전서 5:8의 “울부짖는 사자”와 일치한다. “땅에서”(in the earth, 7절)라는 표현은 8절에서 욥을 언급하며 나오는 “세상에”와 일치한다. 물론 이 말은 지구 안(inside the earth)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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