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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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요약정보 및 구매

피터 S. 럭크만(Dr. Peter S. Ruckman) 저 / 편집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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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 2021년 2월 26일 개정판 1쇄
쪽수 : 376
무게 : 510g
크기 : 153*223*19mm 신국판 반양장 사철제본
ISBN : 9791187227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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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브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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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품 정보

    상품 상세설명

    하나님의 말씀을 우유나 빵, 꿀, 사과, 고기 등으로 비유한다면, 히브리서는 그중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책이다. 그만큼 히브리서는 질겨서 우유만 먹던 그리스도인들은 소화해내기 힘든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는 것을 봐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3장이나 6장 등에서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다.”든지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든지 하는 말들은 끊임없이 학자들의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성경 교사들의 그와 같은 잘못된 해석은 믿음이 여린 성도들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함은 물론이요, 그들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히브리서는 신약의 어느 책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이 강조되어 있고, 믿음에 관한 가장 위대한 장이 히브리서에 들어 있어 많은 성도들의 사랑을 받아온 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긴 “고기”에 해당하는 본문들이 이 책에서 종종 발견될 때 사람들은 그러한 구절들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앞으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히브리서는 교회시대와 환란시대의 과도기적인 책이다. 그래서 교회시대에 해당되는 본문이 발견되는 반면 환란시대에 해당되는 본문도 발견된다. 구약과 신약의 교리가 다르듯이, 환란시대의 교리는 교회시대의 교리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다른 열 세 권의 바울서신은 그렇지 않다. 그 서신들에는 오직 교회시대의 교리만이 발견된다. 이점이 바로 많은 학자들이 히브리서를 올바로 풀지 못하고 실수를 범하는 부분이다. 그들의 모든 오류는 이 책의 교리적인 위치를 올바로 설정하지 못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시작부터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석서들은 상당히 많은 교리적인 오류들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그러한 오류들을 바로잡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피터 럭크만 박사는 원문비평학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권위자일 뿐만 아니라(그는 <킹제임스성경, 1611>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유일한 성경이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동시에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는 것”(딤후 2:15)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그는 성경의 각 책들과 각 장, 절을 대할 때 각각의 본문에 대한 교리적인 적용을 칼로 나누듯이 정확하게 해낸다. 물론 그러면서도 각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양식도 놓치지 않고 성도들에게 제공해 준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기존에 잘못 알려져 있던 거짓 교리들의 누룩들이 제거되고, 주님께 헌신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올바로 무장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훌륭한 군사로 성장하기 바란다. 

    상품 정보 고시

  • 들어가는 말 / 5

    히브리서 1장 / 15

    히브리서 2장 / 39

    히브리서 3장 / 64

    히브리서 4장 / 81

    히브리서 5장 / 107

    히브리서 6장 / 133

    히브리서 7장 / 160

    히브리서 8장 / 178

    히브리서 9장 / 191

    히브리서 10장 / 223

    히브리서 11장 / 261

    히브리서 12장 / 313

    히브리서 13장 / 349

  • 서문 


    신약성경에는 특별히 어려운 세 개의 책이 있는데, 그것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이다. 보통 요한계시록을 어려운 책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요한계시록은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뿐이지 기록되어 있는 대로 믿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예언들은 사실이며, 성경에서 그 예언들을 해석해 주고 있기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천 년”이라는 말이 나올 때, 그것을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기에 그 “천 년”이 문자적인 천 년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인 완전한 기간으로 볼 수도 있다는 무천년주의 이단 이론이 등장하는 것이지, 기록된 대로 믿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 “천 년”을 문자적인 천 년의 기간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해도 잘 해결되지 않는 책들이 있는데, 바로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히브리서가 그러한 책들이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 세 책에서 걸려 넘어진다. 그 이유는 이러한 책들이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하나의 경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경륜에 걸쳐 해당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책들은 율법시대면 율법시대, 교회시대면 교회시대, 이렇게 하나의 경륜에만 맞추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에서 신명기까지의 율법들은 구약 율법시대에 해당하는 책들이다. 따라서 거기에 나오는 제사법이나 의식법들을 신약시대의 규례로 가져오지 않고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례라고 생각하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또 로마서에서 빌레몬서에 이르는 13권의 바울서신은 교회시대를 향한 서신이다. 따라서 거기에 나온 교리들과 명령들은 현 교회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에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줄로 알면 되고,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지키고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말하면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키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면 된다. 이러한 명령들과 교리들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책들은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경륜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 언급한 세 권의 책들, 곧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히브리서는 그 경륜이 섞여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태복음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고, 사도행전은 유대인의 경륜과 교회의 경륜 사이에 있으며, 히브리서는 교회와 환란 사이에 있다. 그래서 이러한 책들을 가리켜 “과도기적인 책”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의 환경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 66권의 모든 내용을 우리가 처한 상황, 즉 교회시대에 맞춰보려는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마저도 교회에다 적용하려고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구약의 율법을 조금 바꿔서 영적으로 적용하는 사람이 있고(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주일을 지키라.”로 바꾸는 것), 그 율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사람이 있다(예를 들면 토요일을 지키는 안식교도들).
      어느 정도 세대 구분을 한다는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의 기본적인 구분을 하게 된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을 나눌 줄 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신약성경 안에 있는 구약적인 책들을 대하게 되면 바로 넘어지고 만다. 특히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대하면 그 말씀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데, 문제는 그 말씀이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말씀과 상반될 때 발생한다. 우리는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 사도 바울을 통해 기록된 로마서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 일들이나 다가올 일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으리라.』(롬 8:38,39)는 말씀을 보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24:13)라는 말씀을 보게 되며, 히브리서에서도 동일한 종류의 말씀들을 보게 된다. 『한 번 깨우침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며, 성령의 동참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 만약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시킬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공개적으로 조롱함이라』(히 6:4-6).
      이같이 서로 상반된 구절들은 항상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대립하는 구절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오히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마태복음이나 히브리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앞으로 히브리서의 각 장들을 연구할 때 보겠지만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구절들을 억지로 해석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역시 틀렸는데, 바로 하나님의 경륜의 차이를 모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성경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해도 쉽게 풀리지 않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부분은 더 철저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한 구절을 떼어내서 그 부분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문자적인 해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문자적 해석이란 그 말씀이 어떤 시대에 사는 누구에게 주신 말씀이냐 하는 것까지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에게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마태복음 주석을 참조할 것). 히브리서는 “마지막 날들”(last days, 히 1:2)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들을 사는 사람들에게 교리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마지막 날들”이 언제인가는 히브리서 1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분명한 점은 이 기간이 교회시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히브리서는 교회시대와 환란시대의 과도기적인 책이다. 그래서 어떤 구절들은 교회시대의 성도들이 받아들이기에 매우 어렵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강조하는 한편, 과거 출애굽 당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삼아 안식의 땅으로 들어갔듯이 미래에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삼아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히브리인들의 모습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히 3,4장). 모세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한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안식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견디지 못함으로 인해 광야에서 떨어져 나갔듯이, 미래에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유대인들도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바로 이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히브리서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이 책이 “유대인서”가 아니라 “히브리서”라고 되어 있는 것을 기억하자. 히브리인들은 “믿는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며(히 5:12-14; 6:1-3), “성령의 동참자”가 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히 6:4).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은 아직 불완전하여, 언제든지 믿음에서 떨어지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교회시대의 성도들처럼 구원의 완전한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에게 과거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떨어져 나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심지어 성령의 동참자가 된 사람들조차도 떨어져 나가면 회개시킬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히 6:4-6). (그래서 이들은 교회시대의 성도들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고, 12장에서는 인내라는 행위를 강조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믿음과 행위를 온전히 행사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필수적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끝까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환란 때의 성도들을 돌봐 주신다는 것은 천년왕국으로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하신 산상설교에서도 강조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들을 보라...』(마 6:25,26)

      히브리서가 교회시대와 환란시대의 과도기적 책이라는 것은 환란시대뿐 아니라 교회시대에도 주시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에서도 그랬듯이 이 책에서도 교회시대에 적용시킬 수 있는 말씀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는 9,10장과, 믿음을 강조하는 11장, 그리고 성도의 행실을 강조하는 13장 등이다. 특히 9,10장에서 발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피의 속죄는 교회시대의 성도들인 우리가 든든히 붙들 수 있는 부분이다. 율법이 할 수 없었던 단번 속죄와 양심의 정결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성도들의 믿음과 생활에 있어 큰 힘을 준다. 또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친히 고난을 받으셨기에 고난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말씀(히 2:17,18; 4:15,16)은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기에 충분하다. 바로 이러한 구절들로 인해 히브리서는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동안 성도들에게 사랑받아 왔다. 
      그럼에도 히브리서는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유대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교회시대에 해당될 수 있는 본문들조차 유대인들에게 적용이 가능하며, 그것은 12장까지에 이른다. 그렇기에 히브리서의 본문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구분하는 세대적인 지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을 만한 구절들을 많이 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의 본문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풀어 나갈 것이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저자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인데, 많은 학자들이 이 부분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바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히브리서 13장의 결말이 다른 바울서신들과 같은 문체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은혜가 너희 모두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히 13:25), 바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12장까지의 내용이 바울서신들의 문체나 내용과는 상이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대신해서 누가나 아폴로, 심지어 프리스킬라까지 그 저자로 제시하곤 하는데, 이러한 대안들을 증거할 만한 구절들은 없다. 오히려 1611년 판 <킹제임스성경>은 이 책의 제목을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Hebrews)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전통원문을 보존하고 있던 동방정교회는 처음부터 이 책이 바울서신이라고 믿었으나 서방교회는 초기에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전통적으로 바울이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후대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비평받을 뿐이다.
      우리는 히브리서가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믿는다. 다만 13장을 제외하고 이 책의 대부분이 바울서신과 내용이나 형식에서 다른 것은 그 기록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갈라디아서 1:16,17에 보면, 그는 회심한 후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아라비아 광야로 들어갔다. 그는 사도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갈 1:12).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서 12장까지는 바울이 초기에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며, 13장은 후에 기록했다고 여겨진다. 1장에서 12장까지는 야고보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서신서들 중에 초기 기록이다. 그래서 아직 유대인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시대의 교리로 가득 찬 다른 13권의 서신을 기록한 후에 기록된 13장은 그 서신서들과 같은 관점과 형식으로 기록된 것이다. 

      히브리서는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평을 받아 왔다. 이 비평들은 저자에 대한 문제로부터 각 본문 구절들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신학자들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신학자들과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이 책이 많은 비평을 받고, 많은 오류를 자아내게 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 3:4)는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눈을 떠 진리를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본문을 연구해 보자. 히브리서는 총 13장과 303구절로 구성되어 있다.  




    책 속으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

    13 그 어떤 피조물도 그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나니, 오직 만물이 우리가 회계해야 하는 그분의 눈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나게 되느니라.

    이제 우리는 “기록된 말씀”의 권위에 관한 한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을 대하게 되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이다. 특별히 기록된 말씀이 칼로 비유되는 것에 관한 관련구절들은 시편 149:6과 에베소서 6:17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12절). 여기서 “살아 있다.”라는 말은 영어로 “quick”인데 이 말은 베드로전서 4:5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에서 쓰인 말과 같다. 이와 비슷하게 에베소서 2:1-5에서는 “살리다.”라는 뜻으로 “quicken”이라는 말이 쓰였다. 이 말은 “어떤 것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이 있는 칼 정도가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예리하다. 양날이 번뜩이게 선 칼을 맨 손으로 잡고 장난치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만일 이 칼을 5분 정도만 갖고 놀면 그 손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칼은 잘 쓰게 되면 사람을 살리고 잘 쓰지 못하게 되면 사람을 죽인다. 불행하게도 미국의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이 칼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맨손으로 이 칼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손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도 위태롭게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다루지 못하고 마구 휘둘러댈 때 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12절). 혼과 영이 분리 될 수 있다는 것을 볼 때 이 둘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에서도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 바, 혼과 영은 서로 다른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다는 이분설은 옳지 않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이 몸과 혼과 영으로 되었다는 삼분설을 말하고 있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한다면(딤후 2:15)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혼은 몸과 같이 생긴 존재이다(창 2,3장 주석 참조,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Ⅰ, 1995, 말씀보존학회 간>). 그러나 영은 바람이나 공기 같은 것으로, 형체가 없다(골 2:11 주석 참조,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골로새서, 1996, 말씀보존학회 간>). 누가복음 16:23,24의 지옥에 간 부자의 실례에서 볼 수 있는 것같이 혼은(지옥에 간 것은 그 부자의 혼이다.) 눈과 혀와 입을 가졌다. 그는 눈으로 아브라함과 그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또한 그는 뜨거움도 느꼈다. 말하자면 혼이란 몸이 갖고 있는 것들을 갖고 있는, 곧 몸처럼 생긴 형체(bodily shape)라는 것이다.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12절).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영을 나눈다는 것은 별 무리 없이 들린다.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의 죽었던 영은 살아나고(거듭남) 그의 혼은 구원받는다. 그러나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른다는 말은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관절과 골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갈라지는가? 이 구절은 욥기 40장에 적용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욥기 40:15-19에 연결시킬 줄 모른다. 아무리 헬라어와 히브리어와 라틴어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구절을 그 관련구절로 연결시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 단어의 헬라어 의미를 아무리 잘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공부하지 않는 한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본문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적용된다. 욥기 40장을 보라. 『이제 내가 너와 함께 만든 비히못을 보라. 그가 소처럼 풀을 먹는도다. 이제 보라, 그의 강함은 그의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그 배의 중심에 있도다. 그는 그의 꼬리를 백향목같이 움직이고 돌들로 된 그의 힘줄은 함께 얽혀 있도다. 그의 뼈들은 강한 놋 조각들 같고 그의 뼈들은 철 빗장들 같도다. 그는 하나님의 길에서 으뜸이며 그를 만든 이가 자신의 칼로 하여금 그에게 다가가게 할 수 있느니라』(욥 40:15-19). 사탄(비히못)의 뼈는 “강한 놋 조각들” 같고 “철 빗장들”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칼이 그에게 다가가 그를 찌른다. 여기서 “그를 만든 이의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칼이 사탄의 뼈들을 가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입에서 칼이 나와 원수들을 치신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전혀 어색할 것이 없다(계 19:15).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것은 기록된 구약 성경이었다.)으로 물리치셨다(눅 4:1-10).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찔러 쪼개야 한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칼이라고 부른 이유이다(엡 6:17).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 그렇게 많은 신학자와 그렇게 많은 원어 학자들이 있었지만, 지난 500년 동안 미국이나 유럽 어디에서도 욥기를 히브리서 4:12 본문의 관련구절로 가져온 저작물은 하나도 없었다.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12절).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행동의 동기를 안다. 만약 죄인이 악한 의도로 성경을 다룬다면 그는 말씀에 실족하여 넘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 학자들이 성경을 다룰 때 그 말씀은 그들을 넘어뜨릴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을 속이신다. 그들이 악한 의도로 성경을 다룬다면 그들은 결코 성경을 깨달을 수 없을 뿐더러 오류에 오류의 꼬리를 물어 결국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때때로 하나님은 선지자를 속이신다(겔 14:1-11). 하나님이 속이실 때는 그들이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을 때이다. 하나님께서 속이신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속여 그를 파멸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이 다루면 하나님의 말씀도 그를 그릇되이 다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이려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속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혼미케 만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라. 그 말씀이 당신을 다루시는 방법에 두려워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의 판단자가 된다. 그 말씀은 심판날에 죄인을 심판할 것이다(요 12:48).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이 부분은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이 말씀 앞에서 판단받을 것이다. 어떤 개인이든지, 교회든지, 신학교든지 그들이 행하는 것들의 옳고 그름을 이 말씀으로 판단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비추어서 많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근본주의 학자들과 신학교들을 비성경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든지 그들을 판단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대할 때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주님은 내가 어리석고 무능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내 머리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내가 가진 어떤 지혜나 재능이나 건강, 지식, 이해력도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일 뿐,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단 5초 이내에 나에게서 빼앗아 가실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하소서, 주여, 내가 듣겠나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만약 주님이 나를 책망하신다면 그것은 나에게 옳으니이다. 다만 내가 바라건대, 주의 말씀에서 뭔가를 내게 주소서. 어떤 것이라도 내개 보이소서. 주님이 내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취할 것이며,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것을 믿을 것이며, 또 그것을 실행하겠나이다.”

    성경은 또한 분별자이다. 성경은 나누고 분리한다(신 32:8, 행 17:26). 성경은 서로 다른 어떤 것도 같게 취급하지 않고 분리한다(왕상 3:9, 고전 2:14, 욥 6:30). 어떤 것이 사실인지, 어떤 것이 옳은 교리인지 성경은 스스로 분별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다(딤후 3:16). 성경 기록의 첫째 목적은 죄인들에게 무엇이 그렇고 무엇이 아닌지 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그 어떤 피조물도 그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나니』(13절). 모든 피조물이 나타나는 것은 누구 앞인가? 문장에서 “그분”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12절을 보라.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서 인격체로 등장한 것이다. “그분 앞에” 나타난다고 말할 때 “그분”이 가리키는 것이 단지 12절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에 제한된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분”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자, 로마서 9:17로 가보자. 사도 바울은 거기서 “성경”이(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이) 파라오를 세웠다고 말한다.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성경숭배자”가 된다.) 또 갈라디아서 3:8로 가보자.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성경이 “예견의 능력”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성경숭배자”가 된 것이다.

    본문의 말씀이 “성육신한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분명히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성경에 인격성을 부여한 것처럼 인격성을 부여했다. 이것은 수사학에서 쓰이는 것같이 단순한 “의인법” 정도가 아니다. 바울은 분명히 성경에 인격성, 더 나아가 신격까지 부여한다. 로마서 9:17은 출애굽기 9:13의 상황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성경도 없었다. 단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셔서 파라오에게 지시하라고 하셨다. 갈라디아서 3장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상황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두 가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에 “성경”을 집어넣었다. 자, 히브리서 4:13은 로마서 9:17과 갈라디아서 3:8과 더불어 성경에 인격성을 부여한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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