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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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요약정보 및 구매

피터 S. 럭크만(Dr. Peter S. Ruckman) 저 / 편집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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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 2016년 3월 28일 개정판1쇄
쪽수 : 214
무게 : 330g
크기 : 153*223*12mm 신국판 반양장 사철제본
ISBN : 979118591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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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베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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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 상세설명

    에베소서는 옥중서신으로 잘 알려진 바울서신이다. 모든 바울서신서가 그리스도인을 위한 진리들로 가득차 있지만, 특히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들로 가득차 있다. 에베소서 1장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그분의 소유라고 말씀하시며, 2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창조하신 새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3장에서는 교회를 통하여 이방인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 상속자가 되고, 약속의 동참자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4장에서는 교회가 한 믿음과 한 침례로 한 분 주를 섬기는 한 몸임을 보여준다. 5장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와 아내임을 보여주고, 6장에서는 영적 악에 대항하여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임을 보여준다.


    에베소서 3장과 5장에서 바울은 신비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전쟁에 대한 위대한 교훈이 에베소서 6장만큼 분명하고 상세하게 기록된 곳은 없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에베소서 1장을 오해함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주권, 절대적인 개인 예정론 등을 주장하는데, 이는 그들이 1장에서 거의 매 구절마다 나오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분 안에서”라는 단어의 의미를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3장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세대주의자들 역시 그 신비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도 에베소서에만 발견되는 명령이다(5장). 계속해서 에베소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것은 유기체와같이 자라나는 건물이며(2장), 이 온 몸은 머리로부터 각 마디로 공급받아 적절히 성장할 수 있다(4장)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품 정보 고시

  • 서 문 / 5
    일러두기 / 17


    에베소서 1장 / 23
    에베소서 2장 / 53
    에베소서 3장 / 83
    에베소서 4장 / 103
    에베소서 5장 / 140
    에베소서 6장 / 180 

  • 서문 


    이단들을 식별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끌어다대는 근거구절들을 성경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학생들이 참된 기독교 교리들을 정립하기 위해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를 공부하고자 할 때 유명한 주석가들 중 한 명도 그 위험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 저자들은 그 책의 역사적인 배경에만 페이지를 할애하고, <킹제임스성경>을 공격하기 위해 수많은 종이들을 낭비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 해석하면 현대 이단적 교리에 넘어질 수 있는지를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1881년이후의 대부분의 주석가들과 개정자들, 성경 교사들이 성경을 그들이 살고 있는 현 시대와 연결시키지 않고, 성경이 어떻게 그들 주위의 사회에 영향을 주는지를 알지 못함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단지 “자유주의자”나 “신정통주의” 목사들뿐 아니라, 전천년적인 “보수주의자”나 무천년적인 “복음주의자”들도 포함된다.


    에베소서는 이러한 대표적인 예다. 알프레드 마틴, 트렌치, 립시우스, 렌돌, 더멜로우, 윌리암스, 벌링거, 클라크, 레인지, 제미에슨, 포셋, 브라운 등이 쓴 에베소서 주석의 서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에 200년 이상이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가지 교리에 대해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이 두 교리들이 모두 에베소서로부터 나왔지만 헬라어 학자들은 그것들을 이론화할 수도 없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어떤 사람도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로부터 에베소서와 이 두 교리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다. 이 두 교리들은 에베소서 1장과 3장에서 나온 극단적 칼빈주의와 극단적 세대주의이다.


    이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발전시켜 칼빈과 벌링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며, 또 그들이 바울과 같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바울 콤플렉스”에 강박관념이 있다. 존 칼빈의 가르침으로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정통 기독교가 확산되었기에 칼빈이 “바울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벌링거도 무엇보다 바울서신, 특히 옥중서신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바울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의 설교는 좋은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으며, 테넌트와 휫필드(1714-1770)도 마찬가진데, 이들은 모두 온건한 칼빈주의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뉴 잉글랜드의 퓨리탄들은 빌리 선데이나 데이비드 리빙스톤을 배출하지 못하며, 온건한 세대주의자들에 의해 쓰인 <스코필드 주석 성경>(뉴스코필드가 아니라)과 같은 것을 만들 수 없다. 극단적 칼빈주의나 극단적 세대주의는 아무 것에도 기여하지 못하고 다만 잘난 체 하며 “우리는 진리를 찾았는데, 당신들은 아직 오류속에 빠져 있습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극단주의자들이 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킹제임스성경>을 5000군데가 넘게 바꾼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댑니, 스트롱, 카이퍼, 핫지, 칼빈, 질, 벌콥, 스템, 오헤어, 벌링거, 베이커 등은 종교개혁 성경인 <킹제임스성경>안에 있는 “진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의 모든 자유주의 설교자들처럼 그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킨다. 그들의 속도는 다양 할지라도 그들 모두는 경기장으로 들어서기 전에 똑같은 공장에서 만든 신발을 신었다. 그들 모두는 에베소서에서 시작한다. [에베소서 주석 1:4,5,11; 3:1-6의 주석을 참조하라.]


    에베소는 원래 항구였다. 그러나 결국 카이스터(Cayster) 강과 대양이 연결된 수로를 막음으로 3류 항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에베소는 바울 당시에 국제적인 도시였으며,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극장으로 유명했다. 이 극장은 무려 5만 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에베소 사람들은 쾌락을 사랑하였다(딤후 3:4). 또한 에베소는 다이아나 여신 숭배의 중심지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이아나 신전”이 있었다. 그 신전은 길이가 425피트, 너비가 220피트였으며, 60피트 높이의 기둥이 127개나 있어 그 신전을 떠받쳤다.


    에베소서를 쓰기 전에 그곳에서의 바울의 사역은 사도행전 18, 19,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유세비우스는 사도 요한이 팟모 섬에 추방당하기 전에 에베소에 머물렀다고 말한다.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를 쓸 때 그는 비록 “첫사랑”을 저버렸지만(계 2:4) 하나님 말씀에 수고하는 신실한 교회를 향해 말한 것이다.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할 때는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엡 3:1; 4:1),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때가 사도행전 28장의 투옥 때라는 것에 동의를 한다. 이 서신은 거의 모든 내용에서 골로새서와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엡 1:7과 골 1:14, 엡 1:10과 골 1:20, 엡 3:2과 골 1:25, 엡 5:19과 골 3:16, 엡 4:32과 골 3:13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드웻, 바우어, 데이비슨 등은 본 서신의 저자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지만 더멜로우처럼 그들이 유능한 학자라는 이유로 그런 불신자에게 대답하느라 시간이나 종이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더멜로우 주석>, p.958). 독자들은 성경분야에서 “유능한 학자들”의 의견이 거의 매번 어떤 의미도 없음을 알고 있고,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고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바울이 기록하지 않은 대부분의 서신도 바울이 구술했기 때문에(갈 6:11 주석 참조,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갈라디아서, 말씀보존학회 간, 1997>) 그가 기록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 서신서 역시 바울 자신이 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엡 1:1; 3:1). 우리는 드웻, 바우어, 데이비슨 등이 가진 학위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적인 학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언어학자들과 어원학자들은 이전에 배운 교육들이 영적인 통찰력을 준다고 착각하고 있다(엡 1:3,4 주석 참조).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자신이 집어든 에베소서의 모든 서문들에서 “회람용 글자”에 대한 내용을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는 또한 케네스 웨스트가 “에베소에 있는”(엡 1:1, at Ephesus)이란 말에 대한 오리겐, 웨스트코트, 홀트의 의견에 동조하여 커트 알란드, 네슬과 같이 그 단어들을 괄호속에 집어넣어 버리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이 경우에 <현대인을 위한 기쁜 소식, 1966>은 적어도 “...who lives in Ephesus”라고 함으로 케네스 웨스트(무디성경신학원, 명예교수)보다 정통에 더 가까이 갔다. 그러나 <필립스 역본, 1958>은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 편지가 읽혀지는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쓰여졌다고 말한다.


    이런 엉터리 같은 일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변개된 필사본인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이며, 이 사본들은 유세비우스, 어거스틴, 그레고리, 로버트슨 등에 의해 우상화 되었다. 이 두 필사본들은 이단 말시온(A.D. 160)과 죽은 정통주의 배교자 오리겐(A.D. 184-254)을 따라 이 단어들을 삭제했다. 왜 이 단어들이 삭제되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잠언 18:1,2에 생생하게 묘사된 마음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이런 형태의 마음은 요한복음 21:25과 같은 본문에 매력을 느낀다. 이런 동일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사해 두루마리”가 대단한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구약에 외경을 더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유다가 언급했기 때문에 어딘가에 “에녹의 책”이 있을 것이라고 속이는(유다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과 동일하다.


    이 독특한 형태의 마음은 항상 “야셀의 책”이나 “주의 전쟁의 책” 등을 찾기 위해 분주하다. 이 마음은 한 가지 독특한 성격으로 쉽게 식별된다.


    이 마음은 현재의 계시된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거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더 권위있는 것을 계속 찾고자 한다.


    이같은 마음을 지닌 대표적인 학자들은 바로 로버트슨, 케네스 웨스트, 디엠, 알포드, 타일러, 밀리건, 사우터, 디스만, 교황들, 어거스틴, 립시우스, 트렌치, 스펠만, 람세이, 가스탕, 델리치, 케일, 제미에슨, 포셋, 브라운, 알브라잇, 웨스트코트, 홀트, 필립스, 모펫, 웨이마우스, 굿스피드, 칼빈, 더멜로우, 브루스, 클라크, 레인지, 커스터, 벌콥, 메이첸, 닐, 워필드, 그리스바흐, 그레고리, 라흐만, 티센돌프, 네슬등이 있다.


    “에베소에 있는”을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 파피루스 46에서 삭제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지혜를 찾아 혼잡케 된 부패된 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잠 18:1,2).


    “에베소에 있는”이 성경에서 삭제된 이유는 골로새서 4:16에 “라오디케아에서 온 편지”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리겐은 만일 성경에서 언급돤 책이라면 그 책은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리겐같은 사람이 “라오디케아에서 온 편지”와 같이 중요한 문서를 모르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카이사랴에 있는 그의 제자들이 “라오디케아에서 온 편지”에 대해 그에게 물어보았을 때 그가 어떻게 대답했겠는가? 진정한 학자(?)가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서둘러라! 빨리 “라오디케아에서 온 편지”를 찾으라! “에녹의 책”도 찾으라! 만일 찾지 못하겠거든 만들어내라! [창세기 주석서 1장에서 “인류학”에 대한 주석울 참조하라.]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놀랄만큼 유사하기 때문에 “에베소서”를 “라오디케아에서 온 편지”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영감받은 원본”에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아주 쉽다. “에베소에 있는”이란 말을 지워버리고 라오디케아로 보낸 편지라고 하던가 아니면 적어도 어느 곳에나 읽을 수 있다는 “회람용 편지”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간과하심으로 성경에서 빼놓으신 “편지”를 오리겐이 고쳐서 집어넣은 것이다.


    이러한 바보짓은 살몬드의 서문(<헬라어 주석 신약>), <강단주석>의 자세한 주석(20권, 서문, p.4-5)에 잘 나타나 있다. 살몬드 목사는 뻔뻔스럽게도 이단 말시온(A.D.160)의 증언과 두 개의 변개된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에베소에 있는”이 삭제되어 있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크리소스톰(이단이 아닌)의 증거는 무시하며, 알렉산드리아 계열, 시리아 계열, 카이사랴 계열, 서방 계열 필사본들은 강조하지 않는가?


    웨이스, 아봇, 엘리콧, 라잇풋, 벵겔, 홀트, 할레스, 올샤우젠 등은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나타난 변개된 본문을 받아들이는 것이 확실하다. 이 논쟁에 대해서 딘 버간(1813-1888)은 그의 철저한 연구(<마가복음의 마지막 12구절>, 1959, pp.169,187)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연구는 심지어 삽몬드가 단지 터툴리안, 오리겐, 바실의 작품만 인용하여 이론화시킨(<헬라어 주석 신약>, pp.229,230) 어리석음도 폭로한다. 성령께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들(?)”(잠 17:24)을 반대하여 드러내 치명적인 증거들 중에는 에베소서의 표제가 있다. 그들이 증거로 드는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의 표제에는 “에베소에게”라고 쓰여 있다. 오리겐은 표제를 지우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가리워 놓은 것은 그분이 계시하신 것 만큼이나 영감으로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동기와 청년기는 성령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큼이나 관심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동일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들을 계시하지 않으신 것이 적절하지 않게 생각되더라도 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략”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성경을 증오하며, 권위를 부인하는 이기주의자들에게는 가장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그들은 그것들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아니, 그들은 그것들이 계시된 모든 진리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며, 만일 그가 그것들을 찾아낸다면(잠 17:24) 그는 “감추어진 지혜”를 발견하지 못한 다른 동료 바보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영지주의자들은 발렌티누스(A.D. 160)와 필로(B.C.20-A.D.50)와 함께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라오디케아에서 온 편지”는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야셀의 책”도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있다고 해도 아무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며, 그것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학자들에 의하면 현명한 접근방식이 아니며, 오히려 “닫힌 마음”이라 불리운다. 반면에 학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열린 마음”은 - 모든 사람들이 <킹제임스성경>을 거부하고 “회람 이론”에 대해 동의한다는 사실로도 분명한데 - 심지어 계시된 진리를 거부하면서까지 진리를 찾고자 한다.


    예를 들어 “최초의 원본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들은 <킹제임스성경>의 능력에 대해 매우 분개하는 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최초의 원본의 진리를 찾기위한” 자들은 이미 계시된 진리들과 보존된 본문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여러분의 시간과 내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기에,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에베소서의 핵심단어는 “영적인 복들”과 “천상”이다. “풍성함”이나 “충만”, “넘치며”, “영광의 풍성함”, “지극히 풍요함”같은 단어들은 바울이 편지를 쓸 때 아주 좋은 상태였음을 말해준다. 바울은 사자가 삼키는 지하 감옥에 있지만 “사자가 있는 동산의 즐거운 과수원에서”라고 편지를 쓰는 순교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에베소서가 영적인 실재들과 “천상”을 다루기 때문에 “하늘에만 마음을 두어 이 땅에는 어떤 좋은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빠져들기에 가장 쉬운 함정이 되기도 한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는 에베소서 3장을 붙잡고 이미 19세기 전에 계시된 진리를 강조하는라 남은 일생을 보내며, 극단적 칼빈주의자는 에베소서 1장을 붙잡고 창세기 1장 이전에 하나님께서 생각했던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역할을 해보려고 남은 일생을 보낸다.


    그러나 적들과 싸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엡 6:10-18), 극단적 세대주의자나 극단적 칼빈주의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에베소서 5, 6장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안다. 에베소서 5, 6장은 실제적인 부분이다.


    학자들은 에베소서가 A.D.55-58(맥기퍼트), 60년이나 61년(메이어), 62년(잔), 61-63년(라잇풋), 75-80년(에월드), 80년(숄튼), 100년(홀츠만), 130-140년(바우어, 데이비슨)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베소서의 기록 연대가 언제인지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킹제임스성경>의 본문이 스스로 비평가들의 추측보다 훨씬 무게있는 내적인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를 기록할 때 바울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 20장 이후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며, 로마서 16:25과 연결해 볼 때 누구도 카이사랴에서 썼다고 상상할 수 없고, 따라서 그는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서를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벌링거는 에베소서에서 물 만난 고기와도 같다.


    그러나 에베소서가 그가 주장하는 세대적 가르침대로 가르치지 않자, 그는 “선지자”(엡 4:11, prophets)를 “예언적인 글”(prophetic Writings)로 바꿔버린다(<컴패니언 성경>, pp.1759, 1764). 벌링거와 스템이 “이스라엘은 예언의 대상이고, 교회는 계시의 대상”이라고 공언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이같은 변개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또한 “하늘이나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엡 3:15)이 “몸의 신비”에 대한 이론들을 망쳐버리기 때문에, 벌링거는 <킹제임스성경>을 변개시키기 위해 반 페이지나 할애하여 자신의 사사로운 해석을 보강하였다.


    로마서 16:25,26은 바울이 사도행전 기간동안에 이미 “몸의 신비”를 알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에, 벌링거는 서둘러 로마서 16:25,26은 바울이 에베소서를 쓴 다음에 로마서에 덧붙인 것이라고 말한다.
      증거가 있는가? 벌링거는 “최초의 원본은 이것을 증명하는데...”라고 말할 뿐이다(<컴패니언 바이블>, p.1694). [알다시피 그들은 매번 이런 식이다. 자세한 내용은 <필사본 증거>를 참조하라.]


    “최초의 원본”을 언급하는 모든 저자들은 그가 그 말을 할 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고,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유럽의 모든 근본주의 신학교는 그들이 누군가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일들을 자행하는 것이다.


    벌링거는 에베소서 3:3이 로마서 16:25,26에 덧붙여진 추신에 대한 언급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말은 전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에베소서가 기록되기 3년 전에 이미 유럽에서 로마서를 회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명한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 벌링거는 다시 말을 바꾸어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기 전에 - 사도행전 28장 이전에 - “몸의 신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기록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컴패니언 바이블>, p.1694). 그러나 그의 말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뿐인데, 이는 “한 몸”과 “한 침례”가 사도행전 19장 경에 기록된 고린도전서(고전 12:1-13)에 나오기 때문이다. 더욱이 벌링거는 후에 “몸의 신비”인 “한 몸”은 사도행전 28장까지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스탬은 사도행전 9장에서 몸이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사도행전 18장에도 등장하고 있는 물침례를 거부한다. 베이커도 몸이 사도행전 13장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사도행전 18장까지 계속된 물침례를 거부한다. 오헤어는 몸이 사도행전 18장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면서 물침례를 제거시켰다. 벌링거는 몸이 20장에서 계시되었지만 27장까지 기록되지 않다가 28장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몸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28장 이전에 이미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서 기록되었다.


    그들은 프랭크 노리스, 트루엣, 빌리 그래함, 스펄젼, 릴레이(W.B. Riley), 할데만, 비크, 롤링스, 헤니거, 아트 윌슨, 롤로프, 마틴, 크리스웰, 디한, 찰리 풀러, 캐롤, 잭 하일스, 리 로버슨, 크림(B.B. Crimm), 라킨, 짐 머서, 프레드 브라운, 존 알 라이스, 제시 헨들레이, 다니엘, 에플만, 모르드캐 함 등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다. 왜 그들은 회심한 다음에 물침례를 받는 것에 대해 당황해 하는가?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에베소서는 6장, 155절, 3039단어들(영어 <킹제임스성경>의 경우)로 이루어져 있다.


    <킹제임스성경>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그 어떤 종류의 변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881년 이후 죽은 정통주의 배교자들은 700개가 넘는 변개를 시도했고 매 구절마다 평균 다섯가지 정도를 뜯어 고쳤다. 이 모든 것들은 신중히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학자들의 경쟁심의 산물일 따름이다. 우리는 <킹제임스성경>을 비평하는 자들의 오류들을 지적할 수 있으며, 그 양상들을 유형별로 제시할 것이다.


    “유명하고 공신력있는” 학자들이 <킹제임스성경>을 바로잡을 만큼 충분히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오히려 그 학자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유능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입증하게 된다. 




    책 속으로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
      11  너희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12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
           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13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이는 너희가 악한 날에 저항할 수 있으며,
           또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서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14  그러므로 서서 진리로 너희의 허리띠를 두르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화평의 복음을 준비한 것으로 너희 발에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짐으로써, 능히 너희가 악한 자의 모든 불붙은 화살을 끌
           수 있을 것이라.
      17  또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
      19  그리고 나를 위하여서는, 내게 말씀을 주시어 내 입을 열어 담대하게 복음의 신비를 알리
           게 하도록 기도하라.
      20  이를 위하여 내가 사슬에 묶인 대사가 된 것은, 나로 하여금 마땅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계속해서 본문은 성도들의 영적인 전쟁에 관련된 매우 투쟁적인 구절들로 이어진다. 성도들의 인도자는 “대장”(히 2:10)이시며, 이 대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딤후 2:3)로서 반드시 고난을 견뎌내야 하는(딤후 2:3) 군대를 가지고 계신 “전사”(출 15:3)이시다. 그들은 전쟁이라 불리는 “선한 싸움”울 싸운다(딤후 4:7). 이 군대를 향해 얼마나 많은 반대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참된 성경대로 믿는 사람은 대적들과 맞서서 끝까지 싸우는 훈련되고 무장한 군사이다.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10절). 우리의 충족은 명백히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며(고후 3:5), 우리는 육신을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빌 3:3). 이 전장에서 행군하는 자들은 자신의 교육, 지혜, 재능, 돈, 머리, 교양, 배경, 혈통, 명성, 성품, 타고난 능력 등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이 대적은 “울부짖는 사자”이며(벧전 5:8, 딤후 4:17), 그는 6000년의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분(골 2:15)을 제외하고는 성공적으로 모든 사람을 물리친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


    기드온의 300용사는 M-18과 75mm무반동 기관총, 바추칸포, 수류탄, 네이팜탄, 모제르 소총, 총검, 참호용 단검, 톰슨 기관단총, 도끼, 삽, 브라우닝 자동소총, 박격포, 탱크, 대포, 전투기를 가지고 싸우지 않았으며,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고후 10:4).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11절). 본문에 묘사된 갑옷은 명백히 1세기 로마 보병의 갑옷이다. 이것은 시대와 상관없는 보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어떤 전쟁이든 보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전쟁에서는 왕이든, 장군이든, 귀족이든 모두 보병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장기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장기에서도 졸(또는 병)이 차나 포, 마, 상을 잡을 수 있으며, 심지어 왕을 위협하여 장군을 부를 수도 있다. 모든 전쟁은 실제로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전쟁은 결국 이 졸(卒)에게 달려있다. 당신이 어떤 나라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가? 당신이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나라를 소유해야 한다. 당신이 그 나라를 소유하려면 당신이 그 나라를 점유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이 직접 싸워야만 한다.


    누군가가 전쟁은 지옥과 같다고 말했다. 이것은 적절한 말인데, 왜냐하면 지옥의 모든 요소들이 전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혼란과 저주, 울부짖음과 절규가 있으며, 절망과 불길, 모든 불행과 슬픔, 광기,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이 피비린내나는 전쟁에 임하는 군사로서의 각오가 없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찬송가를 부를 때도 그 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제로 자각하지 못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그리스도의 군사”를 훈련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행정관이나 양산할 뿐이다. 그들은 에베소서 6장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당신은 참으로 화약 냄새가 나는 그리스도의 보병을 만난 적이 있는가? 아마 바울이 그런 종류의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


    군사는 반드시 용기가 있어야 한다(13절). 그는 견고하게 서서 적을 대적하여 호통쳐야만 한다(벧전 5:9). 그는 죽기까지 싸워야만 한다(삼하 10:12). 그는 자기가 밟고 있는 땅 한 발자국마다 평당 1억이 넘는 것처럼 굳세게 투쟁해야 한다.


    개개인의 보병들은 전투에서 다른 모든 조건들이 동등할 때 결정적인 요소들이 된다. 아니 다른 조건들이 조금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차이를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보병들이다(게티스버그 전쟁, 모스코바 전쟁 등). 직접 전쟁에 임하는 군사들의 사기와 결의와 전쟁 수행능력은 전혀 예상을 뒤엎을 수도 있다. 개개인의 군사들이 자기 “나라”(빌 3:20)를 위해 역사상 그 어떤 전투에서보다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전쟁이다. 인류 역사에서 바울, 웨슬리, 존 휴스, 딘 버간, 밥 존스 시니어, J 프랭크 노리스, 피터 왈도, 빌리 선데이, 마틴 루터, 조나단 고포스같은 사람들의 영향력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들은 악과 어두움이 세력에 대항하여 수 백만의 거듭나지 못한 채 지옥으로 가고 있던 무수한 사람들을 구해낸 것이다. 심지어 롬멜이나 샤를마뉴, 나폴레옹, 패튼, 모택동, 베드포드, 포레스트, 네이, 잽 스튜어트, 잭슨, 리, 캐슬링 등의 사람들도 휴스, 사보나롤라, 허브마이어, 폭스, 휫필드, 태넌트, 모리슨, 얼, 움브랜드, 페이슬리, 피터 왈도, 위클리프, 패트릭, 알반, 콜룸바, 레이몬드 등과 비교할 수 없다(pp.15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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