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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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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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4년 10월호>

순례(巡禮)라는 말은 <한글킹제임스성경>을 기준으로 꼭 세 번 사용되었고, 이외에 ‘순례길’이 한 번, ‘순례자’가 두 번 사용되었다. ‘순례’가 처음 언급된 창세기 47:9을 보면, 『내 생애의 세월이 짧고 험악하였으나 내 조상들의 순례의 날들, 곧 그들의 생애의 세월에는 미치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순례’는 ‘삶’이라는 의미에 가깝게 쓰인 듯하다.

십수 년 전 여러 문학가들과 함께 몽골 고비사막을 여행한 일이 있다. 먼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로 날아가 그 일대를 돌아보고, 다시 프로펠러가 달린 작은 비행기를 타고 고비사막으로 날아가 3박 4일간을 거기 머문 적이 있다. 나무가 없는 까만 바위산, 거칠고 황량한 대평원, 바위산을 따라 한없이 뻗어 있던 하얀 모래밭이 지금도 뇌리 속에 선명하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하루 종일 달려가는 러시아제 지프차, 난생처음 보는 신기루가 아득히 아른거리고 이따금 몇 마리의 가젤이 차 앞을 가로지르곤 했다. 언뜻 보아서는 물도 없고 풀도 없는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띄엄띄엄 돋아난 풀들이 있어, 그런 황원(荒原)에도 양과 염소를 치는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양이나 염소 떼를 몰고 기다랗게 줄을 지어 이동하는 광경이 이채로웠다. 염소들이 길을 이탈하지 않도록 왔다갔다 몰이를 하는 검은 털의 목양견(牧羊犬) 역시 신기했다. 3일 동안 숙박을 한 곳은 각각 다른 장소였지만 숙소는 게르(Ger)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몽골 특유의 천막이었다. 예상 외로 둥근 천막 안은 넓어서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눌 만한 공간이었고, 식당에서 식사와 함께 제공되는 양고기도 별미였다.

성경에는 목자로서 목축을 하며 산 사람이 여럿 있다. 카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을 위시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외에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의 두 지도자인 모세와 다윗도 역시 목자였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이 가증하게 여기는(창 46:34) 목자들을 택하셨을까? 여기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목자들은 정착하여 살지 않으므로 집이 없다. 대신 이곳저곳을 떠돌며 쉽게 치고 걷을 수 있는 천막이 바로 그들의 집이었다. 하나님께서 떠도는 목자를 택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 삶이 순례자와 다름없으며, 덧없는 이 세상 삶 저 너머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칼데아우르에서 하나님의 불러냄을 받은 아브라함이 한평생 목자의 삶을 살다가 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먼 거리를 이동하며 여러 해 동안 생계를 잇기에는 목축이야말로 농경생활보다는 한결 용이하고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천막생활을 하면서 카나안 땅에 도착했고, 이집트에서 귀환 후 롯과 분리했으며, 소돔에 살다 사로잡혀간 롯을 당시 세계 최강의 시날 연합군을 무찌르고 구출해 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마므레 평지에서 주님과 두 천사를 대접했고, 소돔에 사는 조카 롯의 구원을 직접 주께 간청했으며, 주의 예언대로 그에게 정하신 때에 사라를 통해 독자 이삭을 얻었다.

목자의 삶은 타국인과 순례자의 삶이다. 이 삶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차례로 이어졌다. 이 대대에 걸친 나그네 삶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그는 타국 땅에 있는 것같이 약속의 땅에 기거하여 그와 함께 그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들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느니라.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성을 기다렸음이니 그것을 세우시고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이들은 모두 믿음 안에서 죽었으나 모두가 그 약속들을 받은 것은 아니로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았고 확신하여 소중히 간직하였으며, 또 이 땅 위에서 타국인이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느니라.』(히 11:9,10,13)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기다린 『기초들이 있는 한 도성』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희는 타국인이요 나와 함께 체류하는 자들임이라.』(레 25:23)고 말씀하셨고, 다윗 역시 『나의 모든 조상들이 그러하였듯이 나도 주와 함께하는 타국인이요, 체류자』(시 39:12)라고 고백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 손자 야곱과 더불어 대대로 기다린 이 도성은 결국 기록된 말씀대로 일곱째 천 년인 천년왕국 시대에야 비로소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건설되어 유대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 한 부류의 타국인이요 순례자들이 있다.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들이 아닌,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은혜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 곧 그리스도인들이다. 창조주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땅 위에는 그분이 머무실 집이 없었듯이 그분의 성도들도 그분처럼 타국인이요 순례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 역시 또 하나의 도성을 향해 가고 있다. 『이는 이런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낸 것임이라. 만일 그들이 실로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되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이제 그들이 사모하는 곳은 더 좋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그들을 위하여 한 도성을 예비하셨음이라.』(히 11:14-16)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는 더 좋은 본향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이다. 이 도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요 14:2)고 직접 약속하셨던 그 하늘의 도성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도성을 향해 멀고 먼 순례의 길을 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세상의 일들에만 골몰한다. 그들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죽은 다음에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현 세상에서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이 누릴 것인가에 오로지 자신들의 눈과 온 마음을 집중한 채 살아간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씀한다(시 49:12).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는 딴판의 삶을 살아간다. 뉴스미디어들이 앞 다투어 백세건강 시대니 웰빙이니 하며 세상이 점점 좋게 되어 간다고 떠들어도 그런 이슈에 호리만큼도 미혹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루가 다르게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져 감』(고전 7:31)을 훤히 꿰뚫어 보며 자신의 삶을 가다듬는다. 세상 사람들이 너나없이 무너질 세상 집을 짓기에 여념이 없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타국인이요 순례자임을 고백하며 날마다 오실 주님을 고대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먼 순례길 갑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안에서 죽었으나 모두가 그 약속들을 받은 것은 아니로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았고 확신하여 소중히 간직하였으며, 또 이 땅 위에서 타국인이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느니라』(히 11:13).

1

고향 땅 부모형제 결연히 뒤에 두고

충직한 늙은 종을 리브카가 따라가듯

지난 날 귀하던 것 미련 없이 다 버리고

신실한 위로자 따라 먼 순례길 갑니다

2

변개된 지도들이 세상에 넘쳐나도

쓰시고 간수하여 전해 주신 지도 한 권

날마다 펼쳐 놓고 하늘 도성 사모하며

진리의 가르침 따라 먼 순례길 갑니다

3

무너질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내 어찌 욕심내어 호리인들 사랑하리

큰 상급 면류관이 기다리는 하늘 낙원

더 좋은 그 본향 바라 먼 순례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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