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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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일꾼을 부르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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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2월호>

초림 때, 목자 없는 양같이 지치고 흩어져 있던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셨다(눅 10:2). 당시 전 세계 인구는 약 1억 8천 명으로 추산되고, 예수님께서 임명하신 일꾼들이 전체 82명(12명과 70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일꾼 한 명당 감당해야 할 수는 약 220만 명이었다. 현실적으로 추수할 일꾼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전체 세계 인구는 약 72억 명이고, 또 "Operation World"(2001)의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숫자가 20만 명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꾼 한 명이 약 36,000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물론 이것은 그 선교사들이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사람들이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비하면 일꾼이 상당히 많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20만 명이란 숫자 안에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종교인들을 포함하여 구원받지 않은 자유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 알미니안주의자들 등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순수하게 성경적인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는 사람만 계산한다면, 일꾼 한 명이 감당해야 할 숫자는 훨씬 더 커지게 된다.

그렇다면 6만여 개의 교회, 교인 860만여 명, 해외 선교사 약 26,700명(한국세계선교협의회, 2014년 기준)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일꾼들이 많은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전체 인구가 5천만 명 정도이고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수를 600명으로 추정할 경우, 한 명이 감당해야 할 숫자는 약 83,000명이다. 너무나 일꾼이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추수할 일꾼들"을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이 민족의 최종권위로 정착시키고 복음과 진리를 확산시키며 이 나라를 주님께로 이겨오는 일에 헌신된 일꾼들이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을 통해서 계속 자라날 수 있도록 간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그런 일꾼들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피터 S. 럭크만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성도들은 추수할 일꾼들을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일꾼이 되라고 하실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일꾼이 되는 것은 좋은데, 자기 자신만은 안 된다는 심산이다. 다른 성도들은 추수의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고, 그 치열한 영적 전장에서 피흘리기까지 싸우는데, 정작 자신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동역자나 동료 군인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라 불릴 자격이 없다. 자, 배교로 가득한 이 마지막 교회 시대에 주님께서는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신실한 일꾼들을 찾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일꾼을 부르실 때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영원한 현실을 직시하라

누가복음 9:57에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한 사람이 나온다. 이 사람에게는 최소한 주님을 따르려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마음조차 갖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많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관심조차 없다.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구하지 않는다. 주님을 향한 최소한의 열정도 없다. 첫사랑을 저버린 지 오래 되었고, 마음은 냉랭하며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 버렸다. 영적인 일에 관한 한, 눈빛은 죽어 있고 심장은 전혀 뛰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디모데후서 3장은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온다고 말씀하면서 사랑의 문제를 지적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2,4). 그래서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말하자면 이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세상의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하나님의 일꾼이 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 웬만한 '스펙'으로는 취직하기 어렵다. 어학연수나 유학, 인턴 경력은 기본이다. 누구나 인정해 주는 직장을 다녀야 결혼도 잘 할 수 있다. 나만 승진하지 못한 채 도태될 수 없지 않은가! 먼저 안정된 수입과 안락한 집, 자가용, 자녀 교육, 출세, 세상의 인지도 등이 보장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심지어 먼저 세상에서 성공해야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독특한 성도들이 아니라, 세상이 바라는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눈앞에 놓인 현실에만 급급한 그들의 근시안적인 태도에 대해 경고한다. 왜냐하면 이제 곧 모든 성도들이 직면하게 될 다음과 같은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관해 직접 설명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므나로 얼마를 벌었는지 회계해야 할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행한 일에 대해 불로 시험받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어떤 성도는 자기가 일한 것이 모조리 불타 없어져 연기 속에 사라지는 현실을 목도할 것이다." 이제 곧 닥치게 될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라. 잠깐 보이다가 사라질 현실이 아니라 영원에서 직면하게 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신의 현 생애가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연결되지 못하고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고후 4:17)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방향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

누가복음 9:61,62에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한다. 엘리사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부름받은 일꾼의 좋은 예이다. 그는 열두 겨리의 수소들을 앞세워 밭을 갈고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때 자신의 수소들을 버려두고 엘리야를 따라가 그를 섬겼다(왕상 19:19-21).

때때로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며 살다가 주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지금 어디에서 무엇으로 자신을 부르셨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의 대열에 속하여 따라갔다가 언제 어디에서부터인가 주님을 놓쳐 버린 것이다. 문제가 무엇인가? 옛 생활들을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봤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뒤에 있는 이집트를 돌아봤다가 광야에서 계속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저버렸고, 데마도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따라서 주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구원받기 이전의 생활들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육신적인 것들, 옛 습관들, 옛 지식들, 주님을 따르는 데 불필요한 모든 것들을 깨뜨리고 부수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안을 진멸시키기 위해 세우신 예후는 바알의 형상을 부수었고, 바알의 집을 파괴시켜 변소로 만들었다. 유다의 개혁을 주도했던 왕 히스키야는 산당들과 형상들을 부수었고 아세라들을 베어 냈다. 요시야왕 역시 남색자들의 집들을 파괴시켰고, 산당들과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들을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여전히 옛 생활들에 미련을 두고 있거나 이전의 잘못된 행실들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결코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수 없다.

언제든지 응답할 준비를 갖추라

예수님께서는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다. 세금을 걷고 있던 마태도 부르셨다. 그들은 모두 그 부르심 앞에 과감히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섰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성도가 사역에 나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부르심에 기꺼이 응하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을 늘 품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들어쓰실 수가 없다.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히브리서 5:12에서는 『그 때로 보면 너희가 마땅히 선생들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 말씀의 기초 원리들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답답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땅에 진리의 말씀으로 개혁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단에서 외친다 한들, 이에 준비된 사람도 없고, 일어나 일할 성도들도 없고, 반응도 냉랭하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는가! 구령자, 설교자, 성경 교사, 지역 교회를 맡을 목사, 선교사, 진리의 서적을 번역할 번역자들과 진리의 글을 쓸 필자들, 무릎 꿇는 기도와 물질로 섬기고 교회 구석구석을 살펴야 할 사람들이 필요한데, 아무도 준비되어 있지 않고 또 그 일을 위해 선뜻 나서려 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은 없는 것이다.

누가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응답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서기만 하면 된다. 진리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꾸준히 기도하며 자신이 처한 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한 힘껏 주님을 섬기고 있다가, 때가 되어 주님께서 부르시면 응답하면 되는 것이다. 그 시기를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가장 적합한 때를 지정해 주실 것이다. 다만 "부르실 때에 응답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면 된다.

결론적으로 주님께서는 일꾼을 부르고 계신다. 부르시면 어디든지 따라 갈 수 있고, 주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옛 생활들에 대해 어떤 미련도 두지 않는 그런 일꾼을 찾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몸값으로 내어주셨는데,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을 주저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구속받은 성도로서 몸을 드리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성도의 의무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5). 우리는 이 말씀을 늘 유념하며 살아야 한다. 이 말씀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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