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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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주님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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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12월호>

기도는 주님의 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보혈로 구원하셨고 그 죄인을 그분의 자녀 삼으셔서 경배받기를 원하시고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 안에 여러 경로를 통해서 기도의 중요성을 기술해 놓으셨다.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교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리며 감사드리는 것이다. 그런 후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필요를 진지하게 주님께 알려지게 한다(빌 4:6). 이것이 경배요 기도이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절대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의 피난처 되시고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엡 6:18)고 하셨다.
기도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하게 되어 있다. 다만 구하는 내용이나 시간과 방법이 다를 뿐 주님께 필요를 위해서 구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흔히들 말하기를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적인 호흡이라고 한다. 이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호흡 곤란에 빠진 환자와 같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대화한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나의 개인의 구주로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 만일 기도가 없다면 어떻게 주님과 교제할 수 있으며 무슨 간증이 있겠는가?

누군가가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기도를 하지 않게 되면 그는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 사람은 기도응답의 경험이 없으니 살아 계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눈동자처럼 보호하신다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해서 실감할 수 없으며 생활 속에서 아무런 간증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평안함이 없고 막연한 두려움이 있으며 알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자유함이 없다. 생활에 활력이 없으며 공허하고 메마른 삶을 살게 된다.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왜, 이처럼 황폐하게 되는가? 그것은 주님과의 교제인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시는 것이다(롬 8:26).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은 간과한다. (이것은 구원과는 관계없다.) 성도들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황폐하게 되어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가 된다. 쭉정이가 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하물며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그 사람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성도가 부지중에라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새롭게 해야 하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자백하지 않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셨기 때문인가?(개역성경 요 1:29)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지만 때론 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죄와 싸워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에는 언제나 자비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고 잘못 번역한 개역성경의 오류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해 놓으셨으니 죄를 지어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이 그들로 하여금 죄를 자백하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구원받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8-10을 기록할 때 자신을 포함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라는 표현을 무려 열한 번을 썼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나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요,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주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의 필요를 자동적으로 채워 주시지는 않는다. 대신에 우리에게 구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시고 그 특권을 사용하라고 하셨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니 너희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 16:24). 성경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을 하면 죄가 되는 경우가 있고, 하라고 명령한 것을 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균형잡힌 생활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구원은 받았다고 하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모르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알지 못함으로 주님의 공급을 경험하지 못하고 나아가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채 저 멀리 계시는 피상적인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주님과 진정한 교제 가운데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깊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며 막연한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단체 안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함으로써 자기의 행위에 따라 위안을 삼고 있을 뿐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나 사랑은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 기쁨이 없고 자유함이 없으며 풍성함이 없는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마 7:7).

이처럼 주님께서는 기도를 촉구하신다. 우리가 주님께 필요를 따라서 구할 때 그 기도가 주님께 합당한 기도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때에 응답하신다. 혹자는 은사주의자들이 복을 달라는 일방적인 기도와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동원하여 "기도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자동판매기와 같은 기도에 거부감을 느끼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아예 기도하기를 꺼리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복과 유익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렇게 정욕적이고 육신적인 복만을 추구하는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지만 그렇게 구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일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의 잘못을 보고 기도하기를 주저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 진지하게 자신의 필요를 아뢸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분명하게 응답하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꼭 우리의 복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성경 속에서 또는 교회사를 통해서 발견되는 영적 거성들은 모두 다 기도의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사역을 했고 승리의 삶을 살았으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회자하고 있다. 아브라함, 모세, 한나, 사무엘, 다윗의 기도와 엘리야와 엘리사, 히스키야의 기도 그리고 다니엘의 기도를 생각해 보고 예수님의 기도와 사도들의 기도 응답들을 묵상해 보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와 그들의 간증을 들을 때 그 얼마나 통쾌하고 후련한 응답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기도의 능력은 놀랍다. 우리가 이처럼 믿음의 용사들을 부러워하고 놀라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역량에 따라 놀라운 일들을 수행할 수 있음을 믿고 기도해야 한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수요기도모임을 기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자신의 문제를 겸손하게 내어놓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 시간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무언가를 주시려고 또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기다리시다가 스스로 입을 열어 진지한 기도가 드려질 때 주님께서는 준비하고 계시던 선물 보따리를 열어 주실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보면 많은 기도제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게을리하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기도제목을 교회에 내놓고서도 자신은 정작 기도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지체들도 있는 것을 종종 보는데 부끄러운 일이다.
물론 사정에 의해서 못 오는 사람들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올 수 있는데도 게으름과 자신의 나태함 때문에 기도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하고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그리하여 기도모임에 참석해 힘을 합해서 기도하면 자신의 믿음도 새롭게 되고 기도 응답도 받게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해야 할 그 시간에 특별히 바쁘지 않다면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사무엘은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그침으로 주께 대하여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삼상 12:23).

이처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성령님을 신음하게 하는 것이요,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기도에 대해서 간섭을 받아야 하는가? 부끄러운 일이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비록 목이 곧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패역함으로 죄를 지었지만 어려운 일이 닥치면 광장에 모여 금식하며 옷을 찢고 티끌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재에 앉아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셨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 어려운 때일수록 주님께 더욱더 밀착해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 어려운 현실로 인해 누구에게 불평하겠는가? 사람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뒤로 미루는 것은 한이 없다. 기도회 참석을 한 달, 두 달 미루다가 일 년, 이 년을 훌쩍 넘기면 부끄러운 간증을 남길 수밖에 없다. 물론 혼자서도 골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기도 모습은 많은 부분에서 서로 합심해서(통성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도모임에 와서 하는 기도는 많은 장점이 있다. 서로의 기도제목을 알고 있음으로 지체들을 위해서 서로 중보기도를 할 수 있고, 교회 전체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으며, 기도하는 중에 각 지체들을 통해서 진지한 기도에 도전을 받고 믿음을 키울 수 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기도모임은 아름다운 모임이고 사랑스러운 공동체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다.

어린아이가 자랄 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부모는 아이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일이지만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그 모습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은사주의자들처럼 물질적인 복을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지만 지체를 위해서 기도하는 성숙한 기도와 위험에서 또는 병마로부터 구원해 주시라고 부르짖는 기도, 그리고 평안을 위해서 하는 기도 및 현실의 필요를 간절히 구하는 간구가 있다.

기도는 우리의 특권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특권을 사용한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믿음으로 극복하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마음 고생을 덜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몰랐거나 무시하고 지냈다면 지금부터라도 기도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염려와 짐을 맡겨드리자.
『너희 가운데 고난받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시로 노래할지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3,16).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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