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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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갈, 이집트의 치욕을 굴려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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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1월호>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이 최초로 주둔한 숙영지는 "길갈"이었다(수 4:19). 이 장소는 향후 카나안 정복 전쟁을 준비하고 수행할 때 군사 작전 및 훈련을 위한 전략적 기지가 된다(수 9,10장). 이 지명의 의미는 "굴려 보내다."인데, 이스라엘에게서 『이집트의 치욕을... 굴려 보냈다.』(수 5:9)라는 뜻이다.

"이집트의 치욕"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과 관계있는데, 군대 대장인 여호수아는 대대적인 전쟁을 치르기에 앞서, 이곳 길갈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그 치욕을 굴려 보내고 있는 것이다(수 5:2-8). 사실 이것은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매우 무모한 짓이었다. 적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자충수"를 두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34장에서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한 세켐과 그 성읍의 남자들이 야곱의 자손들과의 종족 간 혼인을 위해 할례를 받았다가, 3일째 되던 날 매우 아팠을 때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꼼짝없이 살해된 일을 알고 있는 백성이라면 여호수아의 그런 행동을 납득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전시 상황"이 아니던가! 전술적 행동의 사소한 실수 하나가 전세를 바꿔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이스라엘은 군사적인 특별 모의 훈련이나 은밀한 전략 회의를 한 것이 아니라, 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에서 공개적으로 할례를 행했고, 특히 다 나을 때까지 처소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수 5:8). 하나님께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시고 요단 건너편 아모리인의 막강한 두 왕, 시혼과 옥을 완전히 멸망시키신 것에 더하여 요단의 물줄기를 끊어 버리셨다는 소식에 여리코 사람들은 전의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전쟁에서 공격하는 시점은 매우 중요하므로, 당장 이 여세를 몰아서 여리코 성으로 밀고 들어간다면 대승을 거둘 수도 있었건만,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하듯 갑자기 "할례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령에 순종하지 못할 것도 없는 것은, 주님께서는 전사이시고(출 15:3),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며(삼상 17:47), 그분의 모든 역사가 완벽하기 때문이다(신 32:4). 우리의 사령관께서 보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 전쟁의 "공격 속도"를 조절하고 계시다면, 그 명령에 살고 죽어야 하는 군사들은 당연히 그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자주 범하는 실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응답받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기도를 하면서도 쉽게 조급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길과 모든 생각과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보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완전한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때"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뢰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렇게 믿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위대하고 완벽한 역사는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공격 속도를 늦추실 만큼 이집트의 치욕을 굴려 보내는 것, 곧 할례를 받는 일이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할례가 "아브라함의 언약"의 표적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확증시켜 주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것이다(창 17:9-14). "언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다른 이방인들과 구별됨을 의미하는데, 특히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에 따른 "모세의 언약" 아래에서는 그 언약을 지킨다는 조건하에 『모든 백성보다』 독특한 보물이요, 제사장들의 왕국이요, 거룩한 민족이라 불리고 있는 것이다(출 19:5,6). 그렇게 구별되어야 마땅한 그들이 언약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할례조차 받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치욕적인 일임이(창 34:14) 분명하다.

그런데 굳이 "이집트"의 치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집트인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렘 9:25,26),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런 할례받지 않은 자들의 노예로 있으면서 치욕적인 생활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으로 구속받은 이후의 상황이다. 그러나 요단을 건너온 백성들이 할례를 받고 있지 않은 모습은, 자기들이 과거 조상들을 노예로 삼았던 할례받지 않은 이집트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민족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언제라도 그런 "치욕적인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한시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언제든 과거의 치욕을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할례"는 치욕의 역사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고, 바로 그 명령을 약속의 땅에서의 새 출발을 준비하는 "길갈"에서 준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례를 행함으로써 치욕을 굴려 보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즉시로 "주의 군대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히 2:10) "같은 편"에 함께하시게 된다. 주께서 함께하시자 "경배"와 "말씀"과 "거룩함과 성별" 그리고 "순종"이 뒤따른다.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나는 주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여기에 왔노라." 하더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경배 하고 그에게 말씀드리기를 "나의 주여 종에게 무엇을 말씀 하시나이까?" 하니 주의 군대의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말씀 하시기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함 이라." 하시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하더라 』(수 5:14,15). 또한 여호수아 6장 이후로는 카나안 정복 전쟁의 위대한 "승리"와(수 6-12장) "유업"의 분배가(수 13-21장) 이어진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주인공이 갈보리에서 무릎 꿇었을 때, 멸망의 도성 이후로 그가 계속 짊어지고 왔던 모든 죄의 짐들이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져" 바닥에 있는 열린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모든 죄의 짐을 굴려 보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잊은 채 "이집트의 치욕"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집트"는 세상이며, "치욕"은 거듭난 성도가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될 일로 수치와 모욕과 비난과 책망을 받는 것이다. 이미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진 죄들을 다시 힘들게 굴려 올려서 즐기려 하는 것은 치욕스런 과거를 되풀이하는 일이다. 허망한 마음으로 세상 죄인들 틈바구니에 끼어 앉아 더러운 말과 방탕함으로 함께 시시덕거리고 있거나, TV 앞에 둘러앉아 야비하고 저속한 드라마와 코미디 및 연예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희희낙락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다. 개처럼 킁킁 세상 정욕(재물, 쾌락, 명예)의 냄새를 맡으며 쓰레기통이나 뒤지고 있고 뒤져서 먹다가 속에 탈이라도 나면 토했다가 또다시 먹어 치운다든지, 돼지같이 온갖 육신의 일들과 음행과 더러운 진창에 뒹굴고 있다든지, 그저 "짐승처럼"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면 그것은 치욕 중의 치욕이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가 세상 죄인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더 나아가 그들에게 억눌리고 위축당해서 그들을 향해 복음과 진리로 담대히 호령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비난받아 마땅한 치욕이다. 믿음도, 열정도 없으며, 주님을 위해 고난도 받지 않는 아무런 간증이 없는 그런 삶 역시 치욕스런 인생이다.

자, 언제까지 세상에 의해 질질 끌려 다니는 치욕적인 인생을 살 것인가? 그런 치욕적인 삶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까지 끌고 갈 생각인가? 지금 당장 "길갈"로 가서 치욕을 굴려 보내라! 감추어진 수치스러운 일들을 버리라. 그러한 "이집트의 치욕"을 굴려 보내든지(길갈의 여호수아처럼, 수 5:9), 나무 아래 묻어 버리든지(벧엘로 올라가는 야곱처럼, 창 35:4), 불에 태워 버리든지(에베소의 구원받은 마술사들처럼, 행 19:19), 산산이 부수고 완전히 파괴하든지(유다의 마지막 개혁을 주도했던 요시야왕처럼, 왕하 23:4-20), 찍어 쪼개든지(아각을 죽인 사무엘처럼, 삼상 15:33)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사무엘이 죽인 아각은 "육신"을 예표하는 아말렉인이었고, 그를 죽인 장소는 다름 아닌 "길갈"이었다. 무엇을 망설이고 주저하는가? "이집트의 치욕"을 굴려 보내는 일은 결코 뒤로 미뤄서는 안 되고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주님과의 동행, 경배, 말씀, 성별, 영적 전쟁의 승리, 천년왕국의 유업 등이 보장되는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주님께서 오실 영광스러운 승리의 아침을 "떳떳하게" 맞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내어 굴려 보내야 할 치욕적인 죄가 없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런 치욕스런 일들을 먼저 떨어 버리면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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