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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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성경만이 바른 지도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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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4월호>

필자가 킹제임스성경신학교에 입학한 후에 받았던 가장 놀라운 충격은 우주와 그 바깥까지를 아우르는 정확한 성경 지식을 접한 일이었다. 그때의 나이가 무려 예순이었는데, 수명이 짧았다면 진리를 접해 보지도 못한 채 영영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친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 신앙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신앙이란 그저 이치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는 것이라는 인식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게 맹탕인 상태에서 피터 럭크만 목사의 주석서 <창세기>를 통해 성경의 완벽한 우주관을 배우게 되자, 비로소 바른 신앙이란 바른 우주관을 동반하지 않고는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깊음"(the deep)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지하다시피 우주의 중요한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로 두 번에 걸친 대심판의 절대적 도구였다. 첫 번째 심판은 창세기 1:2에서 있었고, 두 번째 심판은 창세기 6-8장에 걸쳐 있었는데, 깊음이 두 심판의 도구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곳에 공히 깊음이 등장하고 있다.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창 1:2)에서 보듯, 깊음은 첫 번째 심판에서 땅이 형체가 없고 공허하게 된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 깊음의 정체는 다름 아닌 "물들"이었다. 두 번째 심판인 노아의 홍수의 경우에도, "홍수의 시작"을 보여 주는 구절, 『노아의 생이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그 달 십칠일, 그 날에 모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렸으니』(창 7:11)나 "홍수의 끝"을 예고하는 구절,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창들도 닫히고, 하늘에서 내리던 비도 그치니』(창 8:2)에서 "깊음"이란 단어가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창세기 1:1의 최초의 창조와 1:2의 첫 번째 심판이 워낙 간단히 기술됨으로 해서, 최초 심판의 도구가 된 깊음의 본래 상태나 위치에 대해서는 절대 진리인 성경이 침묵하는 한, 한정된 인간의 지혜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두 번째 심판인 노아의 홍수에서는 깊음의 원래 위치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웬만큼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최초 심판의 도구였던 깊음이 창세기 1:6,7에서 우주를 담는 용기(容器)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즉 우주의 경계가 물들로 둘러져 있는 것이다(욥 26:10). 노아의 홍수 때 바로 이 물들의 일부가 지구로 날아와 높은 산들이 남김없이 묻힐 만큼의 홍수를 일으켰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럭크만 목사 이외의 대다수 성경주석가들은 이 깊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두 번의 홍수 가운데 노아의 홍수만 인정하고 바닷물과 지하수와 대기권의 수증기가 그 홍수를 일으켰다고 강변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주장은 대개 변개된 성경을 사용하는 무리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예로 2000년 무렵 기독교 출판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랜드종합주석> 제1권을 보면, 『창공 위에 있는 물들』(창 1:7), 곧 깊음을 두고 "대기권 속에 떠 있는 수분, 즉 구름이나 수증기 등을 가리킨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대기권 중의 수분을 굳이 '궁창 위의 물'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원시의 대기가 수분이 많았거나 오존층과 같은 일종의 수분층이 있어서 태양을 효율적으로 차단하여 지구 전체를 매우 살기 좋은 아열대 기후로 만들어 주었음을 암시하고 있다."라고 그럴듯하게 사족까지 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석은 엄청난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창세기 1:14에서는 『낮을 밤에서 나누기 위하여 하늘의 창공에 광명들이 있으라.』고 말씀하는데, 그들의 주석은 "궁창 위의 물"이 "구름이나 수증기 등"이라고 했으니, 그 주장대로라면 지구와 대기권의 구름 사이에 해, 달, 별이 떠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석이란 말인가!
바르게 보존된 성경에서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 준다. 손목시계 내부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딤후 3:16)의 모든 구절들은 그 어떤 시계보다도 훨씬 더 정교하게 상호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깊음"과 "유리 바다"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 "안"과 "밖"의 구분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 두 표현이다. 우주(둘째 하늘)가 깊음(물들)이라는 커다란 용기 속에 담겨 있음을 창세기 1:6,7을 통해 이미 확인했거니와,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이 깊음을 경계로 나뉘고 있음은 『그가 그 물들을 경계로 두르시니 낮과 밤이 끝나는 곳까지라.』(욥 26:10)는 말씀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이 깊음은 셋째 하늘의 관점에서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계 4:6)로 묘사된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이 욥기에 기록되어 있다. 『물이 돌로 된 것처럼 감추어졌고 깊음의 표면은 얼어 있도다.』(욥 38:30)에서 보다시피, 그 어떤 금속보다도 더 단단히 그리고 투명하게 표면(깊음의 바깥쪽)이 절대온도로 얼어 있기에 유리 바다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로 이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위에 하나님의 보좌와 네 짐승(그룹)이 있다(계 4:6). 그렇다면 깊음의 내부는 어떤 상태인가? 그곳은 물이 그냥 얼지 않은 상태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깊음을 솥같이 끓이며 그는 바다를 향기름 솥같이 만드는도다.』(욥 41:31)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그 얼지 않은 물속을 꼬부라진 뱀 리비야단(마귀)이 격렬하게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상 깊음에 관해 조명해 주는 일련의 구절들에서 단 한 구절이라도 변개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끔찍하게도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 주는 일이 불가능해지고 만다. 예를 들어 보자. 욥기 38:30의 경우, 개역성경에서는 『물이 돌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라고 변개되어 있고,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바다의 수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와 같이 많은 수량을 가진 호수나 강의 수면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엉터리 주석을 달아 놓고 있다. 이 구절은 <한글킹제임스성경>의 경우 깊음의 바깥, 곧 셋째 하늘에서 "유리 바다"라고 불리는 까닭을 밝혀 주는 대목인데, 변개된 성경에서는 그 명쾌한 맥락이 완전히 끊겨 먹통이 되어버렸다. 한 곳만 변개되어도 의미의 단절이 이렇게 심각한데, 개역성경은 신약에서만 2,200여 단어가 삭제되고 성경 전체에서는 36,000여 군데나 틀려 있으니, 그 폐해는 상상을 불허한다 할 것이다.
가짜 성경으로는 설사 그것을 통째로 외운다 해도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다(딤후 3:7). 하늘의 낙원으로 인도하는 "바른 지도책"은 오직 바른 성경뿐이다. 이미 가짜로 판명되었는데도 오랫동안 정이 들었다는 핑계로 그것과의 결별을 주저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생명 길이 되신 주님
이는 그리스도께서 실물의 모형인 손으로 만든 성소들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 자체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지금 나타나 계시기 때문이라.
- 히브리서 9:24 -
1
먼 북녘 우주 끝에 놓여 있는 물 무더기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 하나 못 보아도
진리의 말씀들이 곳곳에서 증거하네
아득한 성운 그 너머 자리 잡은 큰 바다
2
표면이 얼어 있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
위대한 왕의 도성 시온 산이 거기라네
드높은 보좌 주위 네 짐승이 둘러서고
성삼위 일체 하나님 영광 중에 계시네
3
모세의 성막보다 더 온전한 하늘 성소
마귀와 죄인들은 얼씬할 수 없는 그곳
갈보리 보배 피로 그 큰 휘장 다 물들여
주 예수 우리를 위해 생명 길이 되셨네
4
이제 곧 멀지 않아 공중 재림 하시는 날
죽은 자 산 자들의 이름들을 부르시면
홀연히 변화된 몸 셋째 하늘 이르겠네
주 친히 문이 되신 곳 열고 들어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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