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적 생활 분류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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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3월호>

성경은 교회 시대의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온다고 경고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말씀한다(딤후 3:5). 이유가 무엇인가? 배교로 점철된 마지막 교회 시대에는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딤전 6:5) 교회들과 목사들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익과 연관된 "숫자들"을 자랑하길 좋아하는데, 커다란 교회 건물과 자산 규모, 교인들의 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헌금 액수, 높은 인지도 및 지명도 등과 같은 것들이 "경건함"의 증거들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것들은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계 3:17) 자기들의 참모습을 감추기 위해 외형적으로만 그럴듯하게 치장해 놓은 "경건의 모양"에 불과하다. 결코 그들에게서는 어떤 "경건의 능력"도 찾아볼 수 없다. 즉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능력이 없다. 마귀의 유혹을 이길 힘과 반복되는 죄의 고리를 끊어낼 역량이 없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능력이 없으며, 죄를 죄라고, 악을 악이라고 부르짖을 힘도 없다. 기도의 힘이 없고 열매를 맺을 능력도 전무하다. 어떤 것이 올바른 성경이며, 무엇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사역인지 성경적으로 분별할 역량도 없다. 죄인들에게 지옥에 가지 말라고 경고할 능력도 없으며, 죄로부터 성별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설교할 동력도 없다. 복음을 담대하게 외치고 진리의 기치를 드높일 만한 힘도 없고 비성경적인 전통들을 거부할 능력도 결단코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순간 수많은 교인들은 떠나가고 그 결과 헌금 액수가 줄어드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손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배교자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이익이 경건"이 아니라 "경건이 모든 일에 유익하다"고 말씀한다.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여 현재와 미래에 생명의 약속을 소유하게 하느니라』(딤전 4:8). 즉 현재의 생명뿐만 아니라 다가올 생명에까지 유익한 것이다. 그래서 경건은 현 생애에서 직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 힘이 된다. 때로는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주고(벧후 2:9), 때로는 기도가 응답되는 조건을 형성시켜 주기도 한다(시 4:3). 더 나아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보다 더 풍요롭게 해준다. 그래서 경건은 좀이나 녹이 해치지 못하는 보물창고이며, 궁핍함이나 부족함을 모르는 풍성한 곳간과 같다. 말하자면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가장 『큰 이익』(딤전 6:6)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경건을 위한 투자는 손해가 전혀 나지 않는 가장 수익률 높은 투자이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성도들이 이처럼 "커다란 이익"을 놓치는 걸 원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경건을 추구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딤전 6:11). 심지어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라고까지 말씀한다. 『오히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딤전 4:7).
그렇다면 "경건"(godliness)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같음"이란 뜻이다. 베드로후서 1:4에서는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타락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디모데전서 3:16에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곧 성육신의 신비를 가리켜 "경건의 신비"(the mystery of godliness)라고 말씀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같거나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히 1:3, 고후 4:4),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 분이시다(골 2:9). 즉 하나님 그분 자신이시다(요 14:8,9).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0:30).
이것을 성도가 추구해야 할 "경건"의 개념에 적용해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하나 된" 삶이 곧 경건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비슷하게 닮아가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온전히 일치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몸 안으로 집어넣으셨는데, 곧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 안에서 이미 일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3에서는 그분의 신성의 능력을 통해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심지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휴거 때에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도록" 예정되어 있다(롬 8:29).
사실이 그러하다면 주님께서는 왜 굳이 성도들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라"고까지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는 영적으로는 그분의 몸 안으로 들어와 그분과 일치해 있지만, 육신의 몸은 여전히 구속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몸의 구속은 미래에 속한 일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롬 8:23). 따라서 그날이 이를 때까지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한 자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세상의 정욕을 향해 나아가 다시 세속에 물들 수 있고, 또 언제라도 주님과 일치된 삶에서 벗어나 육신적인 삶을 추구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고 인생의 항로를 올바로 유지하기 위해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자기가 타고 있는 말을 원하는 곳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는 채찍질을 해야 하고 수증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일정한 압력이 필요하듯이, 구속받지 못한 몸 안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본성으로 이끌고 주님과의 일치된 삶으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한 "훈련"이 필요하다. 결코 경건에 이르는 훈련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이 훈련을 포기하는 순간 육신적인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할 수 있는가?
1. 죽은 것으로 여기라.
우선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죽은 것으로 "여기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롬 6:11), 자아에 대해(갈 5:24), 세상에 대해(갈 6:14) 죽은 사람이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그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인 것이다. 이렇게 여기는 것이 경건에 이르는 훈련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경건의 의미가 "예수님과 일치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롬 6:3)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여전히 자신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결국 "경건"에 이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명령한다. 육신을 죽은 것으로 여겨야 육신이 요구하는 것을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고,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로 살게 되어 "경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한번은 워치만 니가 기차를 타고 여행하고 있었는데, 한쪽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마작"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그중 한 사람이 그를 바라보면서 "당신도 돈이 있으면 이리로 와서 함께합시다."라고 말했다. 이에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응수했다고 한다. "과거에 마작 놀이를 하던 워치만 니는 죽었소!"
2. 말씀들로 양육을 받으라.
두 번째 훈련 방법은 디모데전서 4:6,7에 나와 있다. 『너는 네가 따르던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exercise].』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며 묵상하고, 또 깨달은 대로 실행하는 것을 훈련하다 보면 어느새 경건에 다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성경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과 신선하고 생동감 있는 교제를 간단없이 유지하는 것은 "경건"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그러한 훈련(exercise)은 마음이 탐욕으로 단련되는(exercised) 것(벧후 2:14)을 막아 주고, 오히려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감각들을 단련되게(exercised) 해줄 것이다(히 5:14). 이렇게 단련된 감각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해 줄 것이니, 곧 경건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루를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은 경건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또한 "경건의 모양"으로 억지로 꾸미는 일을 중단시키고 "경건의 능력"이 매우 자연스럽게 발휘되게 함으로써 세상과 육신과 사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무장을 단단히 갖추도록 해준다.
3. 만족하는 법을 배우라.
마지막으로 만족하는 법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족할 줄 아는 경건은 큰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딤전 6:6).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성도는 경건에 다다른 사람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 매력을 느끼면 느낄수록 세상은 점점 더 싫어진다."라고 했다. 시편 17:15은 『나, 나는 의 가운데서 주의 얼굴을 보리니 내가 깨면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씀한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빌 4:12). 이는 그가 주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임을 알았고, 또한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음도 깨달았기 때문이다(빌 4:13). 어떤 상태에서든지 주님과의 교제를 기뻐할 줄 아는 성도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지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그야말로 큰 이익이 되는 것은 양식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여전히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경건치 못한 것들과 죄로 가득 찬 이 우주를 불로 소멸하실 것에 대해 경고하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에 있어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겠느냐?』라고 마지막 날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벧후 3:11).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경건의 모양"으로 얼버무려서는 안 되고, 오직 "경건의 능력"을 나타냄으로써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복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경건한 성도들의 합당한 자세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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