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적 생활 분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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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6월호>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영적 삶이 그분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찰스 스펄전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선행으로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는 것보다 종이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려 하는 편이 더 낫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감된다. 인생 여정을 모두 끝마치고 저 하늘 천성 문에 다다를 때, 우리가 주님께 하게 될 진솔한 고백은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내가 되었고 또 내게 주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들 모두보다 내가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것은 내가 아니요,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다니엘 W. 휘틀은 1883년에 작사한 『나는 확실히 아네(I Know Whom I Have Believed)』라는 찬송시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은혜로 구속하셨고 그분을 다시 만날 때까지 돌보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딤후 1:12)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확신하는 가운데 은혜를 끊임없이 공급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이런 특권은 주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자. 이는 우리가 자비를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함이라』(히 4:16).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 보좌는 영광과 존귀, 권세와 위엄, 공의와 심판, 거룩함과 두려움이 가득한 보좌다. 이 "왕의 보좌"는 함부로 나아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페르시아에는 아무도 변경할 수 없는 법이 하나 있었는데, 왕의 부름을 받지 않은 누군가가 왕에게로 나아가면 그를 사형에 처하는 법이었다(에 4:11). 당시 에스더는 진멸될 위기에 놓인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목숨을 걸고 왕의 보좌 앞에 나아갔다. 주님의 은혜와 섭리적인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그녀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따라 왕으로부터 호의를 얻었고 자신의 민족을 구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처럼 위엄 있는 왕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그러한 보좌가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은혜의 보좌"로 인식된다. 이는 보좌로 나아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의 피로 인하여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나니, 그가 우리를 위해 바치신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휘장, 곧 그의 육체를 통하여 들어가느니라』(히 10:19,20). 예수님의 피는 주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대로를 활짝 열어 놓았다. "전에는" 수많은 죄들이 길을 막고 서서 고소하고 정죄하며 진노의 심판과 멸망을 통해 두렵게 하고 저지했지만, "이제는" 주님의 위대한 구속 사역에 따른 보혈이 모든 죄와 두려움을 일순간에 걷어 버렸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잠시 "왕의 보좌"에서 내려오시어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이것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 친히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고후 8:9). 그리스도께서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인간들에게 모욕을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데에는 은혜가 필요했다. 또한 그것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기에 은혜가 더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마련된 길을 통해 우리는 언제든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다. 신실한 삶을 살았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죄를 지었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항상 그리스도의 피를 신뢰함으로써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보좌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왜 왔느냐고 핀잔을 주시거나 면박치 않으신다. 시간이 없다고 만나 주시지 않거나 다음에 오라고 만날 시간을 연기하지도 않으신다. 또한 앞으로 나아갈 때 누군가의 검문검색을 받을 필요도 없고 여러 단계를 거치며 어렵게 나아갈 필요도 없다. 그 길에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나아가서 주님의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어떤 이유든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보좌로 나아가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 때, 그때야말로 그 보좌로 나아가야 할 "적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히 4:15). 어떤 소년이 시장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사려고 했다. 그때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어미 개를 따르는 강아지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왜 저렇게 다리를 절뚝거리는 거죠?" 소년이 물었다. 주인은 "태어날 때부터 골반 뼈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해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한단다."라고 대답했다. 소년은 절뚝거리는 강아지를 자기에게 팔 수 있는지 물었다. 주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강아지를 팔 수 없다고 했다. 그때 소년은 한 쪽 바지를 걷어 올려 "의족"을 보여 주면서 "저도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해요. 하지만 저 강아지를 데려다 '사랑'으로 키울게요."라고 말했다. 이 말에 감동받은 주인은 소년에게 "값을 받지 않고" 강아지를 주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동정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과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없으시기에 그 동일한 시험을 이기셨다. 그렇지 않으셨다면 그분 역시 실패자로서, 우리를 동정하실 수는 있어도 도와주실 능력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패배자가 아니시다. 그저 동정의 눈길만 주실 수 있는 무능하신 분이 아니다. 시험을 이기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음은 물론, 죽음과 고난과 시험을 능히 이기심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이다(히 2:18). 그래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히브리서 4:16에서는 이것을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라고 말씀한다. 나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위기의 때에 부르짖으면 응답하실 수 있는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시편 146:5에서는 "하나님을 자신의 도움으로 삼고 그 소망을 주님께 두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미국 장애인협회 회관의 한 쪽 벽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걸려 있다고 한다. 『나는 하나님께 강하게 만들어 주시라고 기도했다.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드셨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주님께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내게 허약함을 주셨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부자가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내가 기도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다... 모든 사람 중에서 나는 가장 복 받은 사람이다.』
이처럼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이다. 그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주님의 은혜는 고갈되지도 않는다. 아무리 물을 퍼내도 고갈되지 않고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샘물과도 같다. 말 그대로 "풍요한 은혜"인 것이다. "마치 해 뜰 무렵부터 해 질 무렵까지 태양으로부터 하루 종일 빛이 오듯이, 은혜는 처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처럼 계속해서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시간과 횟수가 줄어들었거나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은 물이 고갈되고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되어 은혜가 더 이상 은혜로 여겨지지 않는 영적 무감각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유념해야 할 한 가지를 적시하고자 한다. 비록 우리는 나약하고 죄로 점철된 삶으로 인해 항상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만 살면서 인생을 낭비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즉 언제까지 죄로 점철된 패배자로서만 살겠는가 말이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갖고 있는 문제는 죄들이 너무나 많아 주님께 '자비'와 '은혜'를 간구하는 데만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찬양을 주님께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유념하면서 끊임없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자!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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