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적 생활 분류

그리스도인은 "염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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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8월호>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여류 찬송작가였던 “엘리자 히윗”(Eliza E. Hewitt, 1851-1920)은 다수의 찬송 가를 작사했고, 평생을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육에 헌신했다. 한 번은 성격이 비뚤어진 “불량소년”을 사랑으로 지도하던 중, 그가 반항하며 던진 슬레이트 조각에 맞아 척추를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결혼하지도 않은 처녀의 몸인데 누군가가 대소변을 받아내 줘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겠는가! 그런 가운데 소년을 향한 증오심이 일어났고, 오랜 병상 생활로 인해 믿음도 연약해졌으며, 매 순간 엄습해 오는 앞날에 대한 염려와 원망과 불평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그녀는 병실을 청소하던 한 흑인 여인의 흥얼거리는 찬송 소리를 듣게 되었다. 히윗은 신경질적인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흥얼거리는 거에요?” 이에 그 흑인 청소부가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닥친 형편과 처지를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주시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겠어요!” 이 진실한 믿음의 고백에 충격과 감동을 받은 그녀는 주님께 회개했고, 이때 「주 안에 있는 나에게」(<영광을 주께> 333장)라는 제목의 찬송을 작사하게 된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1절).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2절).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 주시네(3절).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는 날까지 늘 보호하시네(4절).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난하여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후렴).”
“염려”란 무엇인가? “worry”(걱정하다)의 어원적 의미는 “목을 졸라 질식시키다”이다. 그래서 염려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사람들의 목을 조른다. 빌립보서 4:6에 나오는 염려와 연관된 “careful”은 헬라어로 “메림나오”이다. 이것은 “나누다”라는 뜻의 “메리조”와 “마음”을 의미하는 “누스”가 합쳐져서 생긴 단어이다. 즉 염려는 “마음이 나뉘는 것”으로서,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성경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그의 모든 길에 안정이 없느니라.』(약 1:8)고 말씀한다. 이렇듯 마음속에 있는 어떤 두 가지 이상의 생각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겨 마음을 찢어 놓을 때 염려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참되시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모든 짐을 십자가 밑에 풀어 놓은 사람들이 아닌가! 또 “내게로 오면 쉼을 주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들이 아닌가!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든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바다를 항해하는 커다란 여객선의 맨 밑바닥에는 배가 동요하거나 양쪽 옆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완해 주는 “자이로스코프 센서”가 설치되어 있다. 이것은 산더미 같은 거대한 파도 속에서도 배가 안정되고 평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노아의 때에 전 지구를 잠그고 격심한 파도를 일으키며 전 지구를 휩쓸고 다녔던 대홍수 속에서도, 방주가 거센 파도에 부딪혀 두 동강 나지 않고 심하게 흔들려 전복되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 안에” 주님께서 계셨기 때문이다. 『방주로 들어오라』(창 7:1). 이렇듯 배에는 평형을 유지해 주는 자이로스코프 센서가 있다면, 그리스도인 안에는 완전한 평화를 유지하도록 해주시는 주님께서 계신다. 그러나 사탄은 지속적으로 두려워하는 영을 집어넣고(딤후 1:7) 그리스도인을 염려로 억누름으로써(눅 8:14) 그의 마음을 질식되게 만든다. 목을 조르고, 불안하게 만들며, 마음을 쪼개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 우리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삶과 천상에 있는 복들을 이 땅에서 향유할 수 있는 특권에 대한 기쁨이 사라지고, 또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교제, 기도 응답, 위대한 진리의 말씀들에 대한 사랑, 구원의 감격, 주님을 향한 열정, 재림에 대한 열망 등과 같은 건전한 생각들이 사라지고 염려만 남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단되었고, 더 나아가 그분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잊었거나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 노부부에게 한 종군기자가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이 무서운 밤에도 어떻게 이곳에서 잠을 잘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성경에 그분의 백성을 지키시는 분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써 있는데 무슨 염려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시 121:4) 신명기 33:27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피난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아래에 있도다.』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은 능력의 팔이다. 구속의 팔이고, 구원의 팔이며, 영원토록 우리를 보호하는 팔이다. 또한 영원히 통치하는 팔이고, 영원한 심판과 승리의 팔이다. 바로 이 팔 안에서 염려를 걷어내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염려든지 그리스도인에게는 부질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금지”되어 있는 일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 심지어 염려는 “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않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해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염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얻고 또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통계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총에 맞아 죽은 젊은이들은 약 35만 명인 데 반해 전쟁의 공포로 염려와 불안 속에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은 약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다. 조지 뮬러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고,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라고 말했다. 성도가 염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55:22에서는 “너의 짐을 주께 맡기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잠언 16:3에서는 “너의 일들을 주님께 맡기면 생각들이 바로 선다.”고 말씀한다. 은행에 돈을 맡겨 놓고 “은행에 강도가 들면 어떻게 하지?” 하면서 염려와 불안 속에 사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를 맡긴다”는 것은 마치 “누군가를 해고해 버리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맡겨 놓은 것을 억지로 다시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다. 맡겼으면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때부터는 하나님께서 맡으신다. 즉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이루시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전능하신 분께서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시는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 한 번 맡긴 것을 도로 찾아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되찾아오는 순간 염려는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사야 26:3에서는 “마음을 주께 의탁하는 사람을 완전한 화평 속에 지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밀려오는 염려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라. 그러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빌 4:7). 구름, 비, 눈 등의 기상현상이 일어나고 대기가 불안정한 대류권과 달리, 그 위에 있는 성층권은 항상 쾌청하다. 이곳에는 태양이 항상 빛나고 시야를 방해하는 지상의 먼지 입자 같은 것도 없다. 두렵게 하는 폭풍우도 없다. 영적인 생활에도 이러한 영역이 존재하는데, 세상의 먼지, 즉 어떤 “염려”도 침입할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이곳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결코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높은 생각과 절대적인 평안이 지배하는 곳이다. 이 영역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염려를 맡기고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면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 그 높은 생각에 맞추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둘로 나뉘게 되어 염려는 다시 시작되고 만다.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는 아주 하찮은 일인 “키를 늘리는 일”조차 할 수 없으면서 어찌하여 나머지 것들을 염려하는가!(눅 12:25,26) 그럴 시간이 있다면 기도하라. 진지한 기도가 염려를 몰아낸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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