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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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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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7월호>

하나님께서는『빛이 있으라.』(창 1:3)는 장엄한 명령으로 어두운 우주에 빛이 있게 하셨다. 빛이 있게 되었을 때 빛과 대조되는 어두움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창 1:2). 그러나 이 어두움은 『나는 빛도 조성하고 어두움도 창조하며』(사 45:7)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창조된 것이다. 어두움은 그 창조 시기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아마도 이사야 14장의 루시퍼의 반역과 관련된 창세기 1:2 이전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빛과 대조되는 어두움이 이미 존재함으로써, 『빛이 있으라.』는 장엄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빛은 비로드처럼 까만 어두움 속을 눈부시게 내달렸으리라.
창세기 1:3에 등장하는 빛은 햇빛이 아니다. 성경은 『주께서는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시 74:16)라고 빛과 해를 따로 구분하고 있다. 성경을 성경대로 믿지 않는 소위 성경학자들은 태양이 넷째 날에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음에도, 지구보다 태양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온갖 구차한 말들을 동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태양은 지구의 대기권의 수증기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태양은 이미 존재했었으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태양은 단지 제3일이 되기까지 어둠을 꿰뚫고 빛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은 이런 그럴싸한 말들을 지껄여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휘저어 놓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는 명령에 따라 있게 된 빛은 “하나님 자신의 빛”이다. 천문학자들이 빛나지 않는 베이(Bay) 성운 뒤쪽을 조사해 보니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을 통해 너무도 밝은 빛이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빛이 어찌나 크고 밝던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장 큰 빛으로 치는 태양계의 태양 정도의 별은 굳이 비유하자면 커튼에 붙은 파리똥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하기야 우주보다도 크신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빛이 설마하니 조금만 거리를 두어도 보이지 않는 반딧불 같겠는가. 더구나 그분은 민족들을 통 속의 한 방울 물로 여기는 창조주가 아니신가(사 40:15).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충직한 일꾼이 되기 전에 그 이름이 사울이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출신의 이스라엘인으로(빌 3:5) 킬리키아 타소 출신의 로마 시민권자였을 뿐만 아니라(행 16:37), 유대교 율법박사 가말리엘(행 22:3) 문하에서 자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집사 스테판이 유대교의 극렬분자들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하기 직전 소위 증인들이 벗어 놓은 겉옷들을 지켰고(행 7:58), 그 부당한 살인에 찬동했으며(행 8:1), 교회를 파괴하는 일에 앞장서 믿음의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넘겨주기까지 한 유대교 광신자였다. 그후에도 여전히 위협과 살기를 내뿜으며 대제사장의 위임 하에 이른바 이단인 교회의 성도들을 붙잡아 압송하는 소임을 자원하여 맡는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이때를 기다리고 계셨다. 사울은 다마스커스 가까운 길에서 하늘로부터 내리비추는 한 줄기 빛을 만났다. 이어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라는 음성을 듣기에 이르렀다. 물론 음성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사울은 그때까지 호리도 거리낌이 없이 천하에 몹쓸 이단 패거리들을 투옥하고 형벌을 가했을 뿐인데, 뜻밖에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꾸짖음을 들었다. 교회가 곧 그분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해보다 더 밝은 빛(행 26:13)을 만나고 난 뒤 즉시 눈이 멀었다. 이는 곧 육신의 눈을 사흘 동안 못 보게 하는 대신 그의 마음의 눈을 띄워 주시려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배려였다.
사울은 그때까지 유대교만이 참된 길이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사악한 이단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하늘의 빛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그는 누가 참 하나님이신가를 순간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러자 그는 즉시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행 9:6)라고 물으며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획기적 계기를 맞는다. 이와 아울러 우리는 여기에서 하늘로부터 사울을 비춘 빛이 물리적인 빛이면서 아울러 영적인 빛임을 알게 된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결코 어두움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흔한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시다. 따라서 구원이란 곧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어두움으로 가득한 사람 속으로 들어오시는 일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구령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구세주로 영접한 순간, 우리 안에 들어오신 주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비추신 빛이신 것이다.
이 나라 기독교인 숫자가 87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구원받은 숫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소하여 그것을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마 7:14)라는 말씀이 그 사실을 가늠케 해준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숫자가 왜 그토록 적은가? 870만 명이 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에도 썩 어울릴 것 같은데 대체 왜 그럴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마귀의 방해이다. 마귀는 거짓말의 아비이고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그가 골몰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게 하여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일이다. 환언하면 이 세상 신인 마귀의 주업(主業)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고후 4:4). 둘째는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시듯 모든 것을 분리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전능하신 분이므로 마귀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지 못하도록 하실 수도 있는 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강력한 미혹을 보내시어 거짓말을 믿게 하시는 것은 진리를 믿지 않는 어중이떠중이를 걸러내는 하나님의 독특한 선별법인 것이다(살후 2:11,12).
이 나라 교회들에는 언제부터인가 숫자를 선호하는 교인들로 북적대고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시기 위하여』(고후 4:6) 당신의 마음을 비추신 적이 있었는가?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촌각을 다투어 점검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


『이는 어두움 속에서 빛이 비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이라』(고후 4:6).

1
어둠과 깊음 속에 온 세상 잠겼을 때
장엄한 말씀으로 있으라 명하신 빛
햇빛 달빛이 아닌 별빛은 더욱 아닌
하나님 바로 그분이 비추신 빛이었네

2
믿음의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마스커스 가다 만났던 한줄기 빛
두 눈을 잠시 가려 마음눈 띄워 주는
하나님 바로 그분이 비추신 빛이었네

3
흙덩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
사방을 헤매어도 찾을 길 없던 참 빛
홀연히 내게 오신 영광의 그리스도
하나님 바로 그분이 비추신 빛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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