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적 생활 분류

본능과 주께서 택하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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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7월호>

"본능"(本能)은 사람이나 짐승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갖춘 선천적 능력이며, 억제할 수 없는 충동과 감정이다. 본능은 창조주께서 주신 것이기에, 피조물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들』(유 1:10)로 살아간다. 말하자면 본능은 삶 그 자체를 형성하고 있다. 기본적인 식욕 ㆍ 배설 ㆍ 번식 ㆍ 방어 본능은 물론, 위험 앞에서의 도주 본능(출 14:27), 비둘기가 먼 곳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귀소 본능(창 8:11), 철새의 이동 본능 등이 그것들을 피조물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본능을 사용함에 있어서 짐승은 갈등하지 않지만,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가 갈등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본능의 요구를 최우선으로 삼고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보는 태도나 경향을 "본능주의"라고 하는데, 본능에 충실할 것인지 환경에 순응할 것인지 결정을 내릴 때, 이 본능주의를 따르게 되면 자칫 죽음의 길들을 걸어갈 수 있다(잠 14:12). 그리스도인 또한 "본능"과 "주께서 택하신 길"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때 필요한 영적 해법이 성경에 흥미롭게 제시되어 있다.
『그 암소들이 벧세메스의 길로 가는 곧은 길을 택하여 대로를 따라가며, 갈 때에 울면서도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지 아니하니, 필리스티아인들의 군주들이 벧세메스 경계까지 그들을 따라가니라』(삼상 6:12). 본문의 필리스티아인들은 사무엘상 4장에서 전개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로부터 주의 언약궤를 빼앗았다. 빼앗은 언약궤는 가는 곳마다 그들에게 질병과 죽음으로 극심한 멸망을 가져왔고, 견디다 못한 그곳 군주들은 제사장들과 점치는 자들을 불러와 주의 궤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때 나온 묘안이 이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멘 적이 없는 젖나는 암소 둘을 끌어다가, 소들을 수레에 매고 그 송아지들은 그들에게서 떼내어 집으로 데려올지니라. 그리고 주의 궤를 들어 수레 위에 놓고, 너희가 속건제로 그분께 드릴 금 보석들을 그 옆에 있는 상자에 넣고, 그 궤를 보내어 가게 하라. 보라, 만일 그 궤가 자기 지경 길을 따라 벧세메스로 올라가면 그분이 이 큰 재앙을 우리에게 행하신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은 그분의 손이 아니며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 우연한 일임을 우리가 알게 되리라』(삼상 6:7-9). 즉 필리스티아인들은 "멍에를 멘 적이 없는 젖나는 암소 둘"로 시험하여 그 재앙이 누구로부터 나왔는가를 알고자 했다. 암소들이 "멍에를 멘 적이 없다"는 점과 "젖이 난다"는 점에 묘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멍에를 멘 적이 없다"는 것은 그 짐승들이 멍에를 메었을 때 처음 메 보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여 수레를 끌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이었고, "젖이 난다는 것"은 이제 갓 새끼를 낳은 암소들이라는 얘기이므로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새끼들을 어미로부터 떼어 내면 어미 소들이 모성 본능으로 인해 방향을 바꿔 새끼들에게로 돌아오려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암소들이 "본능"을 거슬러서 곧은 길을 따라 벧세메스로 올라가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내려진 그 큰 재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고, 만일 소들이 멍에를 거부하고 새끼 있는 곳으로 오려고 한다면 그들을 친 것은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다만 우연한 일로 재앙이 일어난 것임을 알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들은 한 번도 메어 보지 않은 멍에를 순순히 메었다. 또 "울면서도"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지 않고 벧세메스로 곧은 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큰 재앙을 내리셨음을 경고하실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인데, 비록 그것이 이방인들에게서 나온 방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생각대로 현상의 진실을 알 수 있게 암소들을 이끄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암소들이 "본능"을 이기고 벧세메스로 가도록 이끄셨다. 강제로 떼어 놓은 새끼들이 보고 싶어 "울면서도" 소들은 벧세메스를 향해 수레를 끌었던 것이다.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슬픈 이별"을 뜻하는 "단장"(斷腸)이라는 말은, 붙잡혀 가는 새끼 원숭이를 백여 리를 뒤따라가며 슬피 울다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짐승에게도 자신이 낳은 새끼에 대한 사랑이 인간 못지않은 것인데, 암소들은 새끼가 보고 싶어 울면서도 "본능을 거스르며"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주께서 택하신 그 "곧은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주께서 택하신 길로 인해 큰 시험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창 22장).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주님께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이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한 인간이었기에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서 나오는 아버지로서의 본능이 있지 않았겠는가? 성경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처음 사용된 예가 바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향해 가지고 있던 사랑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서, 산들 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 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시더라』(창 22:2). 성경은 사랑에 있어서는 "모성애"보다도 아들을 향한 "부성애"가 더 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주님께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은 아들을 향한 부성애의 본능을 이겼고, 그를 주님께 바침으로써 믿음을 보였다. 이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주께서 택하신 길이었고, 그가 할 일은 그 "곧은 길"을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지 않고 곧게 걸어가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육신의 본능을 압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데』(창 22:10).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나, 정녕,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은 채 내게로 오면 그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눅 14:26). 이 말씀은 "인간의 본능"과 "주께서 택하신 길"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보여 준다. 성도가 주님을 섬길 때 가장 큰 방해 요소가 되는 것은 그의 가족과 자기 자신이다. 주께서 택하신 길로 가려고 하면 가장 먼저 발목을 잡는 것이 가족이나 자신에 대한 사랑일 때가 많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도 합리적이기에 쉽사리 거부할 수 없는 일들이 성도의 인생 가운데 심심치 않게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성이 아닌 "믿음"을 요구하신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는 모두 "나"와 관련된 것들이며, 『자기 목숨』 역시 "나"와 관련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본능"을 자극하여 우리를 쉽게 옭아맨다. 혈육과 자기 목숨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첨예한 본능에 속한다. 이것이 주께서 택하신 길을 걷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이 요구하는 것을 과감히 거부해야 한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알렉산더 맥클라렌(Alexander Maclare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비겁하고 나약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으로부터는 어떤 고난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길만을 가겠다는 결심을 받아낼 수 없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육신의 요구들을 거부하고 미움을 받아도 견뎌낼 만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박해받을 용기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믿음은, 가장 기본적인 본능에 속하는 자신의 혈육 및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즉 이 본능의 영역에서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세상이라는 거대한 유혹과 시험의 도가니에서 순수한 믿음을 지키며 주께서 택하신 길을 올곧게 걸어갈 수 없는 것이다.
갓 낳은 새끼들이 그리워 울면서도, 암소들은 처음 메어 본 멍에를 메고서 주께서 택하신 길로 가야 했다. 이끄신 분은 주님이셨다. 성도의 인생은 성령을 거스르는 육신과, 육신을 거스르는 성령께서 반목하는 순간들로 점철된다.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며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들은 서로 반목하여서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갈 5:17,18), 육신의 본능을 이기고서 주님의 제자로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당신의 혈육과 당신의 목숨이 요구하는 것들을 거부하며 주님을 따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주님께서 택하신 길의 끝은 그렇게 해야 도달할 수가 있다. 주님은 당신이 가지 못할 길로 당신을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갈 수가 없는 것은, 다만 그 육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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