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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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7월호>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다는 계획은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에 여러 번에 걸쳐 예언으로 공표되어진 사항이었다. 『그녀의 씨』(창 3:15)나 『실로』(창 49:10)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가운데로부터 네 형제들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네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에게 경청할지니라.』(신 18:15)는 말씀이나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는 말씀 그리고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미 5:2) 등의 구절들이 모두 그에 해당하는 말씀들이다. 이 중에서 신명기의 말씀이 B.C. 1451년경에, 이사야서의 말씀은 B.C. 742년경에, 미카서의 말씀은 B.C. 710년경에 각각 기록되었으니, 성경이 단순히 인간의 저작이라면 각기 다른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이 먼 훗날에 오실 한 분에 대해 이렇듯 통일성 있게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보다시피 어떤 이는 오실 분의 인품과 사역에 대해, 어떤 이는 오실 분의 독특한 출생의 방법에 대해, 또 다른 이는 오실 분의 구체적인 출생 장소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이 마치 서로 만나서 의논이라도 한 것처럼 이 모든 예언들은 입체적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예컨대 장소 하나만 해도 그렇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장소가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베들레헴 에프라타"일 것이라고 정확히 지목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초림 당시 요셉의 가족은 베들레헴에 살지 않고 갈릴리 나사렛 성읍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을 정확히 성취하시기 위해 로마 황제 카이사 아우구스토로 하여금 조세등록을 하라는 칙령을 내리게 하셨고, 친히 예정하신 시간과 장소에 아들 하나님이 인간의 아기가 되어 도착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섭리인가!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수한 은하들을 넘어 멀고 먼 세상에 파견되는 자신의 독생자에 대해 행여나 사람들이 의혹의 눈길을 보낼세라, 자신의 아들에 대해 그가 어떤 분인가를 미리 밝혀 놓으셨던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음이니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경이로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사 9:6). 보는 것처럼 여기에 나타난 아이의 미래는 "영광" 일색이다. 이는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라는 내용에서부터 화평의 통치자라고 하는 부분까지, 특히 이 구절의 후반부의 진술 대부분이 주로 재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금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보면 이 아이의 앞날은 고난과 치욕으로도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받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 사람이라.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그로부터 숨긴 것같이 그는 멸시받았고 우리는 그를 존중하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이 세상 어떤 사람의 미래도 이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다. 『그가 감옥과 재판에서 끌려갔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선포하리요? 이는 그가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음이요, 그가 내 백성의 허물로 인하여 형벌을 받았음이라』(사 53:8). 이 구절에 이르게 되면 비참하다 못해 참혹함의 극치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참혹함은 결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가 내 형제들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들에게는 외국인이 되었나이다』(시 69:8). 『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악인의 무리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그들이 내 손과 내 발을 찔렀나이다』(시 22:16). 『그들이 또 쓸개즙을 나의 음식물로 내게 주었으며 내 갈증에 나로 식초를 마시도록 주었나이다』(시 69:21). 『그들이 그들 가운데서 내 겉옷을 나누고 내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8). 이 일련의 구체적인 진술들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이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천 년 전에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시구"(詩句)들이다. 실로 세상의 어떤 책이 이처럼 천 년 후에 이루어질 일들을 자신이 직접 형벌을 당하듯 생생히 기록할 수 있겠는가! 예언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성경이야말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감을 받아서 기록한 책임을 새삼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고한 가장 위대한 말씀 가운데 하나다. 처녀가 임신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은, 말 그대로 처녀가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음에도 임신하여 한 아들이 탄생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동정녀 탄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엄연한 사실을 초림 당시의 유대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엄하게도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우리는 음행을 통하여 나지 아니하였으며』(요 8:41)라고 하면서 인신공격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마리아가 요셉과 정식으로 혼인식을 올리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사실에 대해 정면으로 비난하며 꼬집는 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그들의 머리로는 알 턱도, 또 이해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에서부터 약속되었던 『그녀의 씨』(창 3:15)로 오신 분임을 그들이 깨닫기에는 애초부터 무망한 일이었다. 이는 그들이 이른바 육신적인 눈만 멀쩡히 뜨고 있었을 뿐이지, 영적인 눈은 꼭꼭 감긴 소경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임마누엘"이다. B.C. 4년경 마침내 때가 차서 한 처녀가 임신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되었을 때, 마태는 이 감격스런 대목을 이렇게 쓰고 있다. 『"보라, 한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마 1:23). 아담이 범죄한 이래로 모든 인류는 죄성을 지니고 태어나 죄인들로 살다가 죽어야 했다. 특히 하나님의 선민도 아니었던 이방인들로서는 이 세상 삶 이외에 다른 희망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다. 임마누엘!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진정한 주기도문이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사람들이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옵니다』(요 17:3).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영생은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대는 아직도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하루속히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의 떳떳한 수혜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임마누엘

"보라, 한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 - 마태복음 1:23 -

1

드높은 하늘 보좌 그 영광 버리시고

먼 우주 가로질러 독생자가 오셨네

처녀가 잉태하여 때가 차 낳은 아들

그렇게 참 사람 되어 이 세상에 오셨네

<후렴>

높고 깊고 넓어라 큰 사랑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

2

말씀이 육신 되어 왕으로 오셨으나

세상은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했네

기적과 이적들을 수없이 행했어도

끝끝내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네

3

세상에 오신 그분 사람들 다 몰라도

세리와 어부들과 여인들은 알았네

힘센 자 지혜자들 흑암 속을 헤매도

눈을 뜬 어린 아기들 참 빛 속에 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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