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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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차한 변명들, 하나님 앞에선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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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3월호>

국정을 농단하고 파행으로 치닫게 한 파렴치한들의 "모르쇠"와 "변명"으로 일관한 추태는 그들이 실제로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였다. 조선 시대 한 지식인은 "죄의 무게를 따진다면 구차한 변명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죄악이 배나 더 크다."고 말했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인간사도 그러할진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변명으로 일관하려는 죄인들의 뻔뻔함은 그 죄질이 얼마나 더 크겠는가? 감히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서 변명하려 하겠는가마는 "성대한 저녁의 비유"(눅 14:16-24)를 드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런 무모한 짓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적시하셨다.

이 비유에는 세 가지 변명이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케케묵은 것들이다. ① 첫 번째 변명은 이렇다.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니 나를 용서해 주게』(18절). 말하자면 좋은지 나쁜지 직접 확인하지도 않고 땅을 매입했다는 뜻인데, 제정신이라면 땅이든 집이든 보기도 전에 계약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② 두 번째 변명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어지고 있다. 『내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해 보려고 가니 나를 용서해 주게』(19절). 제대로 밭을 갈 수 있는 역량도 확인하지 않은 채 소들을 구입했단 말인가? 어느 누가 중고차를 구매하면서 시운전도 해 보지 않고 사겠는가! ③ 세 번째 변명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장가를 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네』(20절). 신명기 24:5에 따르면, 새 아내를 얻은 사람에게 전쟁도 나가지 말고 어떤 업무도 맡지 말며, 일 년간 집에서 편히 지내며 아내를 즐겁게 해 주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그러나 지금 "성대한 저녁"으로의 초대는 출정하는 문제도 아니고 저녁 식탁을 차린다든지 설거지를 한다든지 무슨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 초청이 아내를 즐겁게 해 주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이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아내와 외식 한 번 하는 것은 아내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음식값도 지불할 필요가 없으니 생계에 지장을 줄 염려도 없지 않겠는가!

정말이지 시답잖은 변명들인 것이다. 이런 변명들은 구령 현장에서 자주 직면하는 것들이다. 왜 세상 죄인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들로 일관하려는 것인가? 이유는 단 한 가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거절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성대한 저녁 식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차 버리고 있다. 마태복음 22:2에 의하면 이렇게 초청한 주인이 "왕"으로 소개된다. 즉 그들은 "왕의 초대"를 거부한 것이다. 왕의 초대는 단순한 초청이 아니며 "순종"을 요구하는 초청이다. 응당 초대에 응해야 하는 것이다.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왕을 모독하는 것이며 결국 화를 자초하게 된다. 한번은 미국의 에티켓 강사인 에밀리 포스트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백악관에서의 저녁 정찬에 초대되었는데, "예의바르게" 그 초청을 거절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국가의 수장이 초대한 것은 다른 모든 선약들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왕의 초대를 받았는데 변변찮은 변명들을 댄다면 아무리 그 변명이 정당하다고 한들 그것은 왕을 모독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 그것은 결국 마귀처럼 살다가 지옥에나 들어가겠다고 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자기변명이자 허세일 뿐이다.

변명은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감추고 정당화하기 위한 속임수로서 거짓말의 한 형태이며 거짓말의 아비인 마귀가 좋아하는 일이다. 변명하는 것만 봐도 그가 어떤 영의 인도를 받고 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변명 이면에는 어떤 문제에 대해 책임지기 싫어하는 비겁함이 숨어 있다. 책임을 지는 것보다 변명하는 일이 더 쉽기에 사람들은 변명이나 핑곗거리를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그런 구차한 변명보다는 차라리 그런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고 통제하는 편이 더 낫다. 이는 바꿀 의지가 전혀 없는 일에 대해 빠져나갈 구멍부터 찾는 일, 곧 변명은 헛된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변명하기를 좋아한다. "아내만 잘 처신했어도 이혼하지 않았을 텐데." "남편이 이해만 잘해 주었다면 그렇게까지 바가지를 긁진 않았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셨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변명은 첫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죄는 항상 변명을 대며 가면을 쓰고 향수를 뿌리고 변장한다."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당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찾으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것은 죄를 지은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던지신 첫 번째 질문이었다. 물론 그가 어디에 숨었는지 정말 모르셔서 하신 질문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정직하게 나아와서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이 죄를 숨기거나 제멋대로 처리한 뒤에 나아오기를 원치 않으시며, 오직 인류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제시하신 방법만을 따르길 원하신다. 하지만 그들은 숨고 말았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 곧 자신을 고상하게 보이게 해 줄 인간적인 또는 종교적인 의로 자신을 감추려 했고(창 3:7), 동산 나무들, 즉 사람들(막 8:24) 사이로 숨어 군중심리 속에서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려 했다(창 3:8). 그때 이어지는 하나님의 질문이 그의 정곡을 찔렀다. 『그 나무의 과실을 네가 먹었느냐?』(창 3:11) 아담은 이때라도 "네, 먹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정직하게 대답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너절한 변명만 늘어놓았으니, 여자에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제 탓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 여자 때문이에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주님 때문이지요. 저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셔서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것 아닙니까!"(창 3:12) 여자 역시 도망갈 "출구"가 필요했다. "뱀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도무지 하나님의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줄 모른다. 『네가 행한 이 일이 어찌된 것이냐?』(창 3:13) 이에 합당한 답변은 "제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였다. 『주, 주만을 거역하여 내가 죄를 지었으며 주의 목전에서 이 악한 행실을 행하였으니』(시 51:4)라고 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변명하고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심판을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죄가 가려지거나 죄에 대한 심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장차 백보좌 심판에서도 수백억 명의 죄인들이 불려 나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변명하고 나설 것이지만 그들의 궁색한 변명이 의로우신 주님 앞에서 통할 리 만무하다.

변명 뒤에 숨으려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은 최초의 살인자 카인에게서도 나타난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 이것은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카인의 종교"를 고수하기 위해 동생 아벨을 죽여야 했던 카인에게 주님께서 물으신 첫 번째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카인은 "모른다."라고 거짓말했다. 이것은 죄인들의 전형적인 거짓말이다. "당신이 한 일 맞죠? 그 사람 알죠?" "모릅니다.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 이는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 불려 나온 죄인들이 입버릇처럼 했던 대답이기도 하다. 아는 것이나 모르는 것이나, 다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이다. 카인은 모른다고 잡아뗄 뿐 아니라 적반하장으로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형이 동생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인데, 카인은 자신의 의무는 뒤로한 채 대들고 따지고 있다. "잘못이 없다고, 자신은 의롭다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아우에 대해 왜 물으십니까? 도대체 뭘 잘못했다는 겁니까?"라는 식이다.

죄를 지은 인간의 첫 반응은 아담처럼 숨는 것이다. 몸을 숨기거나 죄의 증거를 인멸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씩 꼬리가 잡히는 것 같으면 변명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정당화하고 책임을 모면하려고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한다. 사건 정황이 더 분명해지고 더욱 궁지에 몰리면 카인처럼 모른다고 잡아떼거나 거짓말한다. 상황이 더 악화되면 "보다 더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해 봐요!"라고 따지면서 큰소리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사건의 모든 전말이 드러나면 꼬리를 내리면서 "죄송합니다. 당시에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벌을 달게 받을 테니 정상 참작 좀 해 주세요!"라고 하소연한다. 카인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내 벌이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크니이다』(창 4:13).

이스라엘 최초의 왕, 그러나 불법적인 왕이었던 사울은 자기 죄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변명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말았다.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하나님 앞에서 곧바로 죄를 인정한(삼하 12:13) 다윗과 사뭇 대조적이다. 사무엘상 13장에서, 불리한 전황과 이에 불안해하는 백성들을 마주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사무엘을 기다려야 했던 사울은 결국 하지 말았어야 할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말았다. 그랬으면서도 그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사무엘에게 돌리면서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변명했다(11,12절). 사무엘상 15장에서도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으면서 변명으로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려 했다. "내가 주의 명령을 어긴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에 하나님을 위해 가장 좋은 짐승들을 남겨 둔 것뿐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핑계 삼아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옹호하고 변명한 것이다(15,20,21절). 이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는 탈취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울은 계속 변명으로 버텼다(13,15절). 『어찌하여 왕은 주의 음성에 복종하지 아니하고 탈취물에만 달려들어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나이까?』(19절). 사무엘의 이 강력한 책망에도 사울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20,21절). 결국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긴 했지만 비참한 결말이 선언된 이후의 때늦은 후회였다(24,25절). 『왕이 주의 말씀을 거역하였기에, 주께서도 왕을 거절하여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3절).

비참한 말로는 정직하지 못한 변명에서 시작된다. 변명은 변명을 낳는다. 백보좌 심판에서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든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반드시 서게 된다는 현실만큼 두려운 현실도 없다.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암 4:12) 과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세상의 정욕을 추구하기 위한 보다 더 "현실적인 변명" 때문에 종종 뒷전으로 밀려난다. 언제까지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하나님의 초청을 피하려는가?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념하라. 『이제는 그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할 것이 없도다』(요 15:22).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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