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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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공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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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1월호>

필자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 있는 한 장로교회에 다녔다. 주일날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높은 종각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달리 시간을 보낼 곳이 없던 아이들은 삼삼오오 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주일 학교 전체 예배에 이어, 베드로 반, 야고보 반, 마태 반 등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을 딴 반들로 나누어져 반별로 각각의 교사들을 통해 공과 공부를 한 다음, 전체 문답 시간을 가진 후 주기도문을 외는 것으로 폐회를 하곤 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추억은, 해마다 먼 곳의 유명 강사를 초빙하여 열리던 여름성경학교에서 재미있는 성경 이야기를 듣던 일과 오르간도 피아노도 없이 여러 곡의 새 노래들을 배우던 일이다.

중학생이 된 이후부터는 고모들의 권유로 어른들이 참여하는 대예배에 참석을 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구원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은 없었고, 주일이 되면 그냥 습관적으로 예배당에 나갈 따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설교 시간이 지루할 때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렵의 신앙생활은 종교 생활이었지 믿음에 입각한 신앙생활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무하는 담임목사가 단 한 번이라도 구원이 무엇인가에 관한 설교를 한 적도 없었고, 또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 말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이는 담임목사 자신도 구원을 받지 못한, 종교 생활에 철저하게 길든 생계형 목사였기 때문이라는 것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와 연관해서 성경에는 『내버려 두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시더라.』(마 15:14)라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온다. 이 말씀에서 "앞의 소경"은 "눈먼 안내자들"(마 23:16)과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일 이 말씀을 오늘날의 상황에 맞춰 적용해 본다면 "앞의 소경"은 가짜 목사들을, "뒤의 소경"은 무지한 교인들을, 그리고 "구덩이"는 지옥의 구덩이로 어렵지 않게 적용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빤한 사실 앞에서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도무지 자기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고, 또한 주님께로 돌이키지도 않았다. 영적 눈이 아주 감겨 있었던 탓이다(요 9:39-41).

사도행전을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구원받는 장면이 나온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다가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보고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느뇨?』(행 8:30) 하고 질문을 던지니, 내시가 『나를 지도하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요?』(행 8:31)라고 대답한다. 그때까지 에디오피아 내시는 진리를 향한 열성은 있었으나 정작 구원은 받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마침내 내시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행 8:37)라는 고백을 하고 구원을 받게 된다. 만약 빌립이 가짜 교사였다면 내시는 결코 구원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빌립은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롬 10:15)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좋은 교사였고, 내시는 길을 가면서도 말씀을 읽을 정도로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에디오피아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나라 교단 교회들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 말씀보다 목사의 인간적인 면을 숭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말솜씨가 현란하다든지(롬 16:18), 우스갯소리를 요소요소에 적절하게 곁들여서 설교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든지(딤후 4:3), 교단 총회에서 높은 감투를 여러 개 쓰고 있다든지(딤후 3:2) 등을 이유로 무작정 자신들의 목사를 우러르는 경향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성도들이라면, 자기들의 목사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경건에 따른 교리에 일치하는지(딤전 6:3), 목사가 성도를 지배하려 하지 않고 양무리의 본이 되는 사람인지(벧전 5:3),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는지(딤전 4:12), 또한 더러운 이익에 대해서는 얼마나 초연한 사람인지(딛 1:7) 등을 곰곰이 따져 본 후, 자신들의 목자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든가, 아니면 바른 목자를 찾아 떠나든가 해야 할 것이다. 종종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자에게 인간적으로 실망한 나머지 더 이상 진리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무신론자처럼 살다가 죽어서는 지옥으로 가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 그에게 올바른 교사가 되지 못한 사람의 책임이 없을 순 없으나, 궁극적으로는 그 당사자도 자신의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그가 낭패를 당한 근본적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만을 향해 살지 않고, 인간에게서 무언가를 찾거나 얻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59세에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함으로써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 전에는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다 그렇듯이 나 역시도 매사에 오만하고 무례한 사람이었다. 가끔 좀 더 일찍 진리를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가정해 보기도 하지만, 이모저모 생각해 본 결과 느지막이 눈을 뜨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최선이었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육신의 뻣뻣한 기질을 꺾어 놓기 위해 먼저 병마를 보내시고, 그 위에 견디기 힘든 시련까지 보내시어, 마치 김장 배추를 소금에 절이듯이 하신 다음에야 내 감긴 눈을 띄워 주신 것이다. 특히 피터 럭크만 목사의 성경 주석을 통해 접한 향상된 계시들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코앞의 일도 제대로 모르던 내 청맹과니 눈을 여시어 돌연 3조 광년의 우주 저편까지 바라보게 하셨던 것이다.

절대 진리인 바른 성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를 향해 명령하신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것은 진리의 말씀들을 올바르게 나눌 수 있도록 공부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성경이 스스로 나누고 있는 것을 올바로 나누어야 하는데, 예컨대 육체의 할례와 영적인 할례, 믿음과 행위, 물침례와 성령 침례, 휴거와 지상 재림 등을 올바르게 나누려면 공부는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명령을 수행하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으스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평생 동안 성경을 읽을 채비부터 해야 한다(신 17:19). 악인들의 간계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각오를 다져야 한다(시 1:2). 향상된 계시들을 깨닫기 원하는가? 우선 알게 된 계시들을 믿고, 그 너머에 있는 경이로운 것들을 깨닫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를 마지않아야 한다(시 119:18).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어도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 히브리서 1:3 -

1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어도

아버지 품에 계신 독생자 그리스도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거룩한 주 하나님 영광 나타내셨네

2

이 세상 신을 따른 한 사람의 범죄로

죽음의 노예가 된 인간을 사랑하사

나무에 친히 달려 하나님의 피 흘려

진홍같이 붉은 죄 정결하게 하셨네

3

태초에 그 손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신 주님

이 세상 끝 날까지 성도들을 지키사

부활의 새 아침에 본향 집에 이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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