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적 생활 분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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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12월호>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실행"하는 믿음을 몸소 보여 준 하나님의 용사들이었다. 군대로 보면 특수부대 요원에 해당하는 자들로서 타협하지 않는 용맹성, 죽음도 불사하는 각오, 어떤 거친 것도 이겨 나가야겠다는 신념을 지닌 최고의 전사들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무슨 일이든 실행에 옮겼는데, 호세아는 창녀와 혼인했고 이사야는 3년 간 벌거벗고 다녔으며 예레미야는 결혼하지 말아야 했다. 에스겔은 아내가 죽었고 그럼에도 슬퍼하지 말아야 했으며, 때로는 담을 파고 때로는 쇠똥으로 구운 빵을 먹어야 했다.

선지자로서의 자세와 임무를 견지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선지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믿음의 용사 벤스 헤이브너도 지적했듯이, "이 시대는 선지자들의 시대가 아니라 외교관들의 시대이고, 루터의 시대가 아니라 에라스무스의 시대이며, 바울이 아니라 가말리엘의 시대"인 것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0)이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은(엡 2:8)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을 실행에 옮겨야 할 의무가 있다. 단순히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되어 자신을 속이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약 1:22). 어두운 무덤 속에 꼼짝 않는 죽은 시체처럼 살지 말고,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살아 있다는 증거를 지속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많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적게 알아도 실천에 옮기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오늘날 성도들 대부분의 삶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 있다. 아는 만큼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우선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실행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인데, 실천에 옮겨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고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는다. 스스로 "영적 기근"과(암 8:11) "지식의 부족으로 인한 멸망"을(호 4:6)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는 변명이 될 수 없다." 무지해서 실행하지 않은 자도 매를 맞기는 매한가지다(눅 12:48). 알았든 몰랐든 주님의 말씀을 실행해야 할 책임이 여전히 성도에게 있다. 이는 말씀을 공부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발견하는 것 역시 성도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어떤 말씀을 알았다 하더라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말씀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다. 일례로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주 설교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는 성도는 드물다. 야고보서 1:23,24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성도에 대해 거울로 『자기를 보고는 가서 즉시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잊어』버리는 사람에 비유한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반복"이 필요하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듯이 지속적으로 말씀에 자신을 투영하고 노출시켜야 자신의 참모습을 보며 고쳐 나갈 수 있다. "반복"은 배움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다. 이사야는 "명령을 명령 위에 반복하라"고 했고(사 28:10), 바울은 "같은 말을 쓰는 것이 안전하다"고 했다(빌 3:1). 베드로 역시 순수한 생각을 일깨워 주고 미리 전해진 말씀과 계명을 생각나게 하려고 성도들의 "기억"을 다시 환기시켰다(벧후 3:1,2). 어떤 지식이든지 여러 번 반복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습득할 수 없다. 성경적인 지식 역시 한 번 공부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다. 머리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완전히 배우고 자신의 몸으로 완벽하게 체득할 때까지는 여러 번의 반복과 지속된 경건의 훈련이 필요하다. 흔히 어떤 습관이 자신의 몸에 완전히 배도록 정착될 때까지 걸리는 기간은 보통 21일이라고 한다. 그만큼 일정 수준에 오를 때까지는 많은 반복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각자의 믿음과 지식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지식이라도 성도들마다 몸으로 완전히 체득할 때까지 걸리는 기간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반복적으로" 말씀의 빛에 노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행동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광고 매체"는 이 반복의 중요성과 효과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광고의 반복 효과를 이용하여 고객들로 하여금 지갑을 열게 만든다. 잭 하일스의 모친은 밤마다 아들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네 번씩 그에게 주지시키곤 했다. "나를 따라 반복하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책이다."

셋째로 "실행할 의지"가 없어서이다. 말씀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한 이유는, 지식은 얻기 쉬워도 행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행하기 어려운 것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나쁜 습성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단 12:4). 성경적 지식도 마찬가지인데, 올바른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지식을 쉽게 살 수 있고(잠 23:23) 배울 수도 있다(딤후 3:7). 하지만 그렇게 배운 만큼 실행에 옮기는 그리스도인은 드물다. "부흥"의 시대인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와 "배교"의 시대인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지켰는가의 여부"에 있다. 『내가 너의 행위들을 아노라.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노라. 이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나의 말을 지켰고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계 3:8).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는 바른 성경을 보존하고 지켰을 뿐만 아니라(시 12:7), 깨달아 알게 된 말씀을 실제로 행했다(요 14:15). 그러나 배교한 이 시대는 "두 가지" 모두를 실패하고 있다. 바른 성경을 버리고 변개된 성서들을 채택할 뿐 아니라 제대로 알고 있는 말씀마저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전 시대를 살았던 성도들이 오늘날보다 성경적 지식이 더 많아서 부흥이 일어난 게 아니다. 순교자들 역시 지식이 많아서 순교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은 하나님과 성경을 사랑한 나머지 말씀을 "아는 만큼" 실행했을 뿐이다. 실행하는 것과 실행하지 않는 것은, "열린 문"과 "닫힌 문"의 차이를 낳고 "부흥"과 "배교"의 차이를 낳는다. 물론 실행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서 인내로 열매를 맺는 자들이라』(눅 8:15). 이 말씀에 따르면 인내에는 정직하고 선한 마음이 선행된다. 바울은 연보와 관련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마음에 준비했던 대로 실천하라."고 권면한다(고후 8:11). 즉 말씀을 실행할 의지가 없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할 마음이 없으면 말씀을 실행에 옮길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행동을 통해 입증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이다(롬 12:2). 효과적인 역사로 인한 마음의 변화는 참된 지식과 참된 믿음이 결합되었을 때 일어난다(살전 2:13). 그렇게만 되면 마음속에 뜨거운 불길이 타올라서 더 이상 참고 견딜 수조차 없을 만큼의 엄청난 "실행력"이 터져 나오게 된다(렘 20:9). 밀봉된 유리병 안에 적은 양의 물이 들어 있을지라도, 그것에 열을 가하여 증기로 바꾸면 그 물을 병 전체에까지 팽창시킬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지역 교회 안에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가득 차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것은 세상의 영적 판도를 뒤엎을 만큼의 행동을 낳는 엄청난 힘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실천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두려운 것이다. 말씀을 실천했을 때 수반되는 어려움이 예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눅 12:5).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듯이(잠 1:7; 9:10), 그것은 또한 말씀을 실행에 옮기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경청하는 것이 하나님께 경청하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인지 판단하라』(행 4:19).

루터는 행동하는 양심을 소유했고, 에라스무스는 생각하는 양심에 그쳤다. 결국 루터는 로마카톨릭을 뛰쳐나옴으로써 성경적 성별을 실행에 옮겼지만 에라스무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루터는 교리적으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자기가 알고 있는 올바른 믿음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 움직이고 행동할 줄 아는 믿음이 있었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는 만큼" 얼마나 행동으로 옮기는가이다.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은 지식은 죽은 지식이며 비겁한 지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종은 그만큼 더 많이 매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눅 12:47).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끊어진 다리를 잇는 것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절실히 요청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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