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적 생활 분류

인간이 죄를 짓는 데 “담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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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12월호>

『보라, 주를 두려워함이 곧 지혜요,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니라』(욥 28:28).

『악인의 죄과가 내 마음속에서 말하기를 그의 눈 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 36:1).

사람들이 죄를 짓는 데 담대한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 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다(롬 3:18). 늙음과 죽음, 전쟁, 기아, 질병, 자연 재해, 파문, 사회적인 따돌림이나 조롱 등은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분명 그들은 사람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죽음이 무섭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지옥의 무서움도 알고 있고, "죽은 후에 지옥에 가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도 느낀다. 가족이나 친척, 친한 친구들이 예기치 못한 사고나 재앙으로 죽는 것을 보면 불안해하며 떨기까지 한다. 사스나 메르스에 감염되어 죽을까봐 염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마 10:28)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님 앞에서 부복하거나 떨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완고한 마음과 굳은 목으로 주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지옥으로 던져지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히 2:15) 하는 데 있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하는가? 쉽게 말해서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심판이 두렵기 때문이다.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피터 럭크만 목사에게 빈정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은 것은 무슨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지옥에 가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럭크만 목사는 이 말에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아멘, 나는 영원히 불타고 싶지 않아서 구원을 받았소!" 죽음과 심판과 지옥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면,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신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완고한 죄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바울이 로마 총독 펠릭스에게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관하여 설명』했을 때 그는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두려움을 느꼈다면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었어야 했지만, 오히려 그는 『이제 그만 가라. 적절한 때가 오면 내가 너를 부르리라.』라고만 말했다(행 24:25). 아그립파 왕 역시 『네가 나를 설득시켜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라는 말만 했다. 구원에 관한 한 "거의"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늘나라 바로 "문 앞"에 있는 죄인이나 문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이나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다. 이처럼 『선이든 악이든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전 12:14)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과 완고함이 모든 죄인들로 하여금 "믿지 않는 죄"(요 16:9)를 범하게 함으로써 지옥으로 가게 하고 있다!



거듭난 성도가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독특한 백성』(벧전 2:9)으로서의 성별된 위치를 쉽게 저버리고, 세상의 정욕에 대해 더 빠르게 반응하여 죄에 굴복해 버리는 이유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 앞에 두려워 떨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롬 8:13),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리라.』(롬 14:10),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암 4:12),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져 감이라.』(고전 7:31), 『주의 오심이 가까움이라.』(약 5:8), 영원, 곧 『자신들을 위하여 오는 때를 대비한 좋은 기초를 쌓도록 하라.』(딤전 6:19)라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또 외쳐도 거대한 바위처럼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비된 양심이 그들로 하여금 세상으로 거침없이 돌진하여 순간의 제단에 영원한 것들을 불태우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로 간직된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도 알려지고 공개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 8:17)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들리지 않는가? 『마음속에 생기는 일들을 일일이』(겔 11:5) 아시는 주 하나님께서 모든 은밀한 것들까지 심판하실 그날에 그 일들에 관해 설명해 보라고(롬 14:10-12) 요구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의 인생을 실타래 풀 듯 보여 주시면서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해명해 보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진땀만 흘리고 서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반드시 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았던 일들과, 마땅히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했던 일들이 있었음을 깨닫고 그저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휩싸인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을 텐가!

언젠가 민수기 7장을 읽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에서 섬기는 일"(5절)을 위해 바쳤던 예물과 제물들의 "수"를 하나님께서 성경에 아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해 두신 것을 보고 "커다란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전히 주님만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드렸는가를 정확히 계산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진지하게 기도하는 데 드렸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였으며 또한 실제로 "몇 명"이나 구령했는지 등을 장부에 기록해 두고 계신다. "열 므나의 비유"(눅 19:11-27)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나누어주신 한 므나로 우리가 "얼마나" 벌었는지 정확하게 결산하실 것이다. 이것은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대학입시준비생들에게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 나오는 날이, 취업준비생들에게는 합격자 발표하는 날이 제일 두렵고 떨리는 날이다. 이처럼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그야말로 "공포"의 자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주의 두려우심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권유』(고후 5:11)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똑바로 살라는 경고를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모든 일에 대해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는 점을 항상 유념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형 교회들을 위시한 현대 교회들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올바르게 보존된 성경을 배격하고 건전한 교리에 역행하는 일은 차치하더라도, 횡령과 음행 등 "도덕적인 영역"까지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그들이 몰래 숨어서 행하는 일들뿐 아니라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생각의 모든 상상을』(대상 28:9)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결과이다. 우리가 손을 대는 모든 위치, 발이 가는 모든 장소, 혀가 이야기하는 모든 말, 마음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각을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이 경고의 말씀을 듣고서도 전혀 긴장이 안 되는가? 그 엄중한 주의를 받고서도 가증스럽고 은밀한 죄들의 기세를 지금 당장 꺾어 버리지 못할 만큼 두렵지가 않은 것인가?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알고 계신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주님께서 모르시는 경우는 없다. 『주의 눈은 어느 곳에서나 악한 자와 선한 자를 살피시느니라』(잠 15:3). 머지않아 모든 것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수치스러운 일들"까지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다가서야 한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서 천둥, 번개, 연기, 나팔 소리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떨었다. 모세도 그 광경이 너무도 무서웠기에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히 12:21)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실제 음성"에 두려워 떨었다면, 그와 동일한 권위와 위엄으로 "기록된 성경"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다가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진실한 회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언제든지 온전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가서는 성도는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실로 참회하고 돌이킬 수 있다.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온몸을 관통하여 양심까지 깊숙이 찌를 때, 우리가 과연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에 대해 하나님께 토로하고 쏟아 놓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보다 더 세상과 죄로부터 성별할 수 있고, 육신적이고 더러운 것들을 더 멀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를 지속적으로 괴롭혔고 넘어지게 했던 고질적인 죄들을 우리 발밑에 짓밟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부흥과 개혁 역시 죄에 대한 깊은 각성이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 1700년대 요한 웨슬리,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일어났던 제1차 대각성 운동 때도 그랬고, 1800년대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능력>의 저자 찰스 피니가 중심이 되었던 제2차 대각성 운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1859년에 있었던 영국 아일랜드의 대부흥이나 이반 로버츠의 사역에서 시작된 부흥, 1890년 D.L. 무디가 중심이 되었던 제5차 대각성 운동, 1920년 빌리 선데이를 중심으로 일어난 제6차 대각성 운동 등 모두 다 죄에 대한 깊은 찔림과 그에 대한 진실한 자백과 기도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설정되지 않고서는 부흥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을 잃었고, 지옥으로 향해 가는 혼들에 대한 연민이나 구령의 열정이 싸늘한 시체처럼 식은 성도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늘의 본향에 대한 소망으로 심장이 뛰지 않는 성도가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모든 일을 멈추고 조용한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은밀한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알려진 죄에 대해 철저히 자백하고 돌이키는 자기 개인만의 영적 대각성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기도는 죽은 성도의 영적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교회의 존립 여부는 성도 개개인이 소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두려워함으로써 추악한 죄들로부터 철저하게 돌이켜 악에서 떠날 때 부흥과 개혁은 시작된다. 이러한 성도들이 있을 때 그 교회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성도들이 많을 때 그 나라와 민족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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