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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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자애와 신실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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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7월호>

시편 92편은 표제가 「안식일을 위한 시 또는 노래」로 되어 있으며, 경건에 관한 내용과 악인의 일시적인 번영을 묘사하고 있다.
『오 지극히 높으신 분이여, 주께 감사를 드리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 좋사오며』(1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찬송은 『지극히 높으신 분』을 높여 드리는 노래들이다. 주님께 찬양을 올리는 것은 찬양이 주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 좋아서 올려 드린다. 노래의 동기는 관심이다. 사람은 관심 없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는 노래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관심의 중심에 계신다. 한편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구약 시대의 『지극히 높으신 분』은 바로 『예수』(빌 2:10)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지극히 높이셨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한 이름인 『예수』를 그분께 주시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으며, 또한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기 때문이다(빌 2:6-11).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시고, 우리가 지상에서 누리는 복뿐만 아니라 『천상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엡 1:3)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이다!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 드리세, 다 찬양 드리세 / 금 면류관을 드리고, 금 면류관을 드리어서 / 만유, 만유, 만유의, 만유의 주 찬양!”(<영광을 주께>, 20장, 「주 예수 이름 높이어」).


『아침에는 주의 자애를, 밤마다 주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되』(2절). 본 시편의 화자가 “아침에 주의 자애를 나타내는 것”은 성도가 그날 하루를 보내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로 인도함을 받는 자애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밤마다 주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것”은 그날 하루가 끝날 때마다 그의 생명을 보호하는 신실하심을 보여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나가야 하는 인생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은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문구가 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택시나 버스의 운전석 앞에는 하얀 잠옷을 입은 어린 사무엘이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그림이 걸려 있곤 했는데, 그 그림의 제목은 어린 사무엘 옆에 쓰인 글귀처럼 “오늘도 무사히”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원작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본래 이 작품은 18세기 영국 화단의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조슈아 레이놀즈(1723-1792)가 그린 것으로서 훗날 “오늘도 무사히”라는 제목으로 모작되어 퍼져 나갔을 뿐이다.


한편 그 그림에서 어린 사무엘에게 입혀진 하얀 잠옷은 그의 순수한 마음을 나타내고, 그 아이의 기도하는 손과 맑고 간절한 눈망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갈망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모습에서 고작 “오늘도 무사히”만 읽어 냈다. 그들은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의 순수한 믿음을 보지 못했으며, 오직 그날의 안전을 희구하는 세속적인 갈망만 읽은 것이다. 육신으로 눈이 가려지면 멀리 보지 못한다. 믿음 없는 그들은 “오늘”이라는 유한한 시간을 넘어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지 못한다. 시편 기자가 아침에는 주의 자애를 나타내고 밤마다 주의 신실하심을 나타낸 것은 결코 “오늘도 무사히”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그 너머에 계신 주님과의 신실한 동행, 곧 “영원한 안전”을 보았던 것이다.


『열 줄 악기와 솔터리와 장중한 소리를 내는 하프로 하는 것이 좋으니이다』(3절). 화자는 주의 자애와 신실하심을 악기로 나타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악기는 사람의 “성대”지만, 성대도 그것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주변에 화음을 수놓아 펼쳐 놓는 악기들이 필요하다. 악기들도 저마다의 음색과 음량을 갖고 있기에 인간의 성대에서 울려 나는 소리와 조화를 이루면 숨소리마저 정지될 듯한 예술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애와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도구로는 악기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도 각자의 역량에 맞게 조화롭게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아름답게 높여 드릴 수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한 몸에 지체는 많아도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시니라...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는 그 지체들이라』(고전 12:12,27). 우리가 하루를 사는 데 있어서 눈, 코, 귀, 입, 그리고 손, 발의 조화가 필요하듯이, 그리스도의 몸 또한 그 지체들인 성도들의 조화로운 섬김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높여 드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같은 생각을 품고, 높은 것들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낮은 데 처한 사람들과 같이하고,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아야 한다(롬 12:16). 우리 모든 성도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에 따라 가진 은사들이 서로 다르므로, 예언이면 믿음의 분량대로 예언하고, 섬김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지도하는 자는 근면함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여(롬 12:6-8), 그리스도의 몸 안에 다툼과 분열이 없게 하고 오직 화평의 띠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됨을 지키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엡 4:3).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기뻐하고, 그 기쁨을 능동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주여, 주께서는 주의 역사를 통하여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내가 주의 손의 역사들로 인하여 기뻐 외치리이다. 오 주여, 주의 역사들이 어찌 그리 위대하신지요! 주의 생각들도 심히 깊으시나이다. 우둔한 자는 알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4-6절). 하나님의 역사들은 너무나 위대하고 그분의 생각들은 심히 깊기에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주가 말하노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이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이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사 55:8,9). 하나님의 생각들은 너무나 깊기에 육신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고,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그분의 생각들에 대해 계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 수 있는 길은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고, 그 방법은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는 것”이다(고전 2:12,13).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진리를 계시하시는 방법은 구절과 구절을 비교하는 “상호 참조”인데, 이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는 그분의 진리를 확정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공부한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되어 모든 것들을 성경으로 판단하기에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게 된다(고전 2:15). 그가 내리는 판단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하고 있어서 그 누군가로부터 “오류를 범했다.”라는 말을 듣지 않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악인이 풀같이 돋아나고 모든 행악자들이 번성할 때 그들이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그러나 주여, 주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지극히 높으시나이다. 오 주여, 주의 원수들을 보소서. 보소서, 주의 원수들이 멸망할 것이며 모든 행악자들이 다 흩어지리이다』(7-9절). 악인들은 풀 같이 돋아나 잠시 번성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예비된 것은 영원한 멸망뿐이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그러한 풀이 마르고 꽃은 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기에, 그 말씀으로 구원받은 성도만이 “썩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히 살게 된다(벧전 1:23-25).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꽃보다 아름다운 줄기와 잎사귀는 보이지 않는다. 꽃은 풀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빚어내는 “현란함”이다. 하지만 꽃은 비록 아름답다 해도 어느 순간 젖은 행주처럼 시들어 버리는 허무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기에 악인과 선인 위에 햇살과 빗줄기를 뿌려 주신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고 사는 악인들은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과 같아서 갑작스럽게 지옥 불에 던져지고 만다. 『확실히 주께서는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으며 주께서 그들을 파멸에 던지셨나이다. 어찌 그들이 순식간에 황폐하게 되었나이까! 그들이 공포로 완전히 멸절되었나이다』(시 73:18,19).

“악인들”은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대환란 때 그 절정에 이를 것인데, 이에 대해 성경은 『그들 왕국의 나중 때에 범죄자들이 가득 차게 되면 무서운 용모를 하고 난해한 문장들을 깨닫는 한 왕이 일어나리라.』(단 8:23)라고 예언하고 있다. 세상은 대환란에 가까워질수록 범죄자들이 더욱 증가할 것이고, 마침내 무서운 용모를 한 적그리스도가 세상의 왕으로 등장하면 그때의 세상은 이미 범죄자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 완고한 악인들의 “몸들”은 대환란 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의의 태양”이신 그분의 열기에 불태워져 성도들의 발바닥에 재가 되어 밟힐 것이고(말 4:1-3), 그 “혼들”은 즉시 지옥 불에 던져져 스스로 확장하는(사 5:14) 지옥의 허기를 달래 줄 것이다. 실로 악인들은 불의 연료가 될 것이고(사 9:19),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요 15:5).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불의 연료가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부끄럽게 여기는바 구원받기 이전에 행했던 그 일들에서는 거룩한 열매를 얻지 못했다. 그런 일들의 끝은 오직 “사망”이었지 않은가? 복음을 믿어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면 계속해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끝은 영생이고(롬 6:21,22), 영원한 생명을 다른 이들보다 풍성히 누리는 영원무궁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육신이 아닌 성령에 심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굳게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갈 6:8, 딤전 6:12).

본 화자는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의인(환란 성도)에 관해 노래한다. 『그러나 주께서 나의 뿔을 유니콘의 뿔같이 높이셨으니 내가 신선한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리이다. 내 눈이 내 원수들 위에 임하는 나의 열망을 볼 것이며 내 귀가 나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악인들에 대한 나의 열망을 들으리이다』(10,11절). “뿔”은 권세를 상징한다. 지금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업신여기고 있지만, 재림 때 그 왕의 권세는 높여질 것이고 그분의 눈은 원수들의 멸망을 보고 그분의 귀는 악인들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을 것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짐승의 표와 짐승 숭배를 거부하고, 가난을 택하여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견디며, 날마다 주의 자애와 신실하심 속에 “오늘도 무사히” 보냈을 환란 성도는 천년왕국에서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자랄 것이다(12절). 즉 바로 그 『주의 집에 심겨진 자들은 우리 하나님의 뜰들에서』 번성할 것이며,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낼 것이요, 그들이 기름지고 번성하여 주의 정직하심을』 나타낼 것이다(13-15절).


의인이 늙어서도 열매를 내는 목적은 주님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는 것에 있다. 주님께서는 그 열매를 그분 안에 거하는 의인 안에서 친히 맺으신다.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역시 그렇게 되리라』(요 15:4). 말하자면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로서,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맺으신 열매를 달고 있는 것이다. 그 『성령의 열매』(갈 5:22)는 육신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며,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고(갈 5:25) 성령의 일들을 생각할 때(롬 8:5) 성령님께서 친히 맺어 주신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다. 그 인격의 열매는 불의가 없으신 주님을 성도 자신의 굳건한 반석으로 삼을 때 흔들림 없이 맺히게 된다! 『그는 나의 반석이시니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15절).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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