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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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분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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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4월호>

시편 91편은 표제가 없으며, 전체 16개의 구절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거하는 자의 안전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예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살리로다』(1절). 본 시편의 화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은밀한 곳을 가리켜서 “전능하신 분의 그늘”이라고 말한다. 만물보다 높이 계신 하나님, 곧 시간이 정지된 영원에 거하시면서 홀로 우뚝 솟아 계신(사 57:15) 하나님의 은밀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깃털”과 “날개”를 지닌(4절) 새들, 즉 “독수리”(출 19:4)와 “어미 닭”(마 23:37)의 날개 아래로 제시된다. 물론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그늘이 어떠한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어미 독수리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새끼 독수리가 누리는 안전함과 어미 닭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병아리가 느끼는 평안함으로 “전능하신 분의 그늘”을 묘사하게 하신 것이다. 제아무리 힘없고 공격성 없는 닭이라 해도 병아리에게는 제 어미의 날개 그늘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안전한 장소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들어간 성도가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도 믿음으로 평안히 거할 수 있음을 계시하셨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살리로다.』(1절)라는 말씀은 『주께서는 너를 지키시는 분이시니 주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는도다.』(시 121:5)라는 말씀과 쌍벽을 이룬다. 이 두 말씀의 관심은 모두 “그늘”에 있는데, 고단하고 앞날이 불투명한 인생들에게 전능하신 분의 날개 그늘 아래(시 17:8; 36:7; 57:1; 63:7)를 제시하시면서 어서 그곳으로 들어와 안식하라고 말씀하신다(마 11:28). 이 힘겨운 인생길에서 찾아야 할 참된 그늘은 세상의 그늘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이다. 세상에 기대면 배반과 고통의 연속일 뿐, 하나님께로 숨어야만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껴안을 수 있다.

『내가 주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시며 나의 요새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신뢰하리라.” 하리로다. 참으로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덫과 지독한 전염병에서 건져내시리라』(2,3절). 주님께서는 성도의 피난처이시며 요새이시다. 우리 각인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신뢰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내던지듯이 주님께 맡긴다는 뜻이다. 장난삼아 탁자 위로 올라간 아이가 자기 앞의 부모가 능히 받아 줄 것으로 믿고 웃으면서 자기 몸을 던져 부모의 품에 안기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해야 한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놓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신뢰”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분께 육신의 생각을 접고 의탁하는 자녀들을 절대로 실수하시지 않고 위험에서 건져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신뢰는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의 기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그분의 신실하심을 맛볼 수 없다. 그분으로부터 어떤 기도 응답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육신을 신뢰하는 자의 어리석음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개들을 주의하고 악한 일꾼들을 주의하며 살을 베어 내는 자들을 주의하라. 이는 영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고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할례파임이니라. 나도 육신을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군가가 육신을 신뢰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라』(빌 3:2-4). 바울은 육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가리켜 “개들” 또는 “악한 일꾼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육신을 신뢰하는 것을 경멸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떠했는가? 주님께서는 그의 입술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과 육신을 그의 무기로 삼는 사람과 그의 마음이 주로부터 떠나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렘 17:5). 한편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자신의 소망으로 삼는 사람을 복이 있다고 하셨다(렘 17:7). 누구보다도 육신을 신뢰할 만했던 사도 바울이 향했던 곳은 예수 그리스도였다(빌 3:8,9).

그리스도인의 그늘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시며, 오직 그분만이 신부인 교회의 그늘이심을 성경은 강조한다. 『숲의 나무들 가운데 사과나무처럼 나의 사랑하는 이도 아들들 가운데 그러하도다. 내가 큰 기쁨으로 그의 그늘 아래 앉았으니, 그의 과일은 내 입에 달콤하였도다』(솔 2:3). 이 사과즙으로 적셔진 듯한 달콤한 노래는 신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가 안식할 큰 기쁨의 그늘이심을 노래한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현 교회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그늘이 되어 주심은 물론, 미래의 천년왕국 때도 왕국 백성들의 그늘이 되어 주실 것이다.

『보라,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통치자들이 공의로 다스릴 것이라. 한 사람이 바람을 피하는 곳과 폭풍을 가리는 곳같이 될 것이요, 마른 땅에 흐르는 강 같고 피곤한 땅에 있는 큰 바위의 그림자 같을 것이니라』(사 32:1,2). 여기서 “한 왕,” 곧 “한 사람”은 재림하셔서 『자기 영광의 보좌』(마 19:28)에 앉아 통치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과 함께 공의로 다스릴 “통치자들”은 『첫 번째 부활』(계 20:5,6)에 참여할 “구약 성도들”(마 27:52)과 “신약 성도들”(살전 4:16-18)과 “환란 성도들”(계 7:9,14; 11:12; 14:1)인데, 이 세 부류의 성도들이 만왕의 왕이신 주님과 통치하게 될 천년왕국에서, 주님께서는 그 왕국의 백성들에게 바람을 피하는 곳과 폭풍을 가리는 곳같이 되실 것이고, 마른 땅에 흐르는 강 같고 피곤한 땅에 있는 큰 바위의 그림자 같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느 시대, 어떤 곳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는 성도들의 그늘이 되신다. 당신의 그늘은 누구인가? 이 거친 광야 같은 인생길을 당신은 누구를 신뢰하면서 걷고 있는가?

『그가 너를 자기 깃털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서 신뢰하리로다. 그의 진리가 너의 큰 방패와 작은 방패가 되리니 네가 밤에 공포나 낮에 날아가는 화살이나 어둠 속에서 만연하는 전염병이나 백주에 황폐케 하는 멸망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옆에서, 만 명이 네 오른편에서 쓰러질 것이나 그것이 네게는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오직 네가 네 눈으로 보게 되리니 악인의 보응을 보리로다. 네가 나의 피난처이신 주,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네 처소로 삼았으므로 어떠한 재앙도 네게 닥치지 못하며 어떠한 전염병도 네 장막에 가까이 가지 못하리라』(4-10절). 이 약속들은 교회 시대에 “교리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낮에 날아가는 화살”로부터 보호받거나, “백주에 황폐케 하는 멸망”에서 면제되거나, “지독한 전염병”이나 “어둠 속에서 만연하는 전염병”이 덮치지 않으리라는 “보증”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가슴에 총알이 박히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그리스도인이 어디 한두 명인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독감과 천연두와 암 등으로 죽지 않았던가? 현실을 직시하라.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손을 씻지 않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이 높아진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절대로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망상을 버리라!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교회 안의 환자들을 보라. 우리가 현 교회 시대에 모든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무조건” 보호받는다면, 바울은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굳이 의사 누가를 대동하지 않았을 것이고, 만성 질환으로 고통받던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처방하지(딤전 5:23) 않았을 것이며, 또한 몸이 아픈 트로피모가 선교 여행을 중단하게 하지도(딤후 4:20) 않았을 것이다. 질병과 재앙은 그리스도인들의 육신에 가까이 다가와 그들을 죽였기에 『그것이 네게는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7절)라는 말씀은 교회 시대에 “교리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을 영적으로 적용하면서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할 수는 있어도,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모든 질병과 재앙에서 완벽하게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완벽한 보호하심은 과연 “누구”에게 적용해야 한단 말인가?

『이는 그가 너에 대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시어 너의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임이라』(11절). 여기서 “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은 재림하시는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에 관한 예언인 것이다! “마귀”는 초림 당시 광야의 시험의 때에 주님을 시험하려고 본문 11절을 인용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 보라. 기록되었으되 ‘그분께서 너에 대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서 어느 때라도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고 하였느니라.』(마 4:6)라고 했지만, 그는 재림에 관한 예언을 왜곡시켜 초림에 잘못 적용했다. 성경을 왜곡하고 잘못 적용하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마귀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자신만의 교리를(딤전 4:1) 만들어 내길 좋아하지만, 그 모든 것이 비성경적이다. 말하자면 본문은 흰말을 타시고(계 19:11)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살후 1:7)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땅에 추락하지 않으실 것을 보여 주며, 또한 그분께서 “사자”와 “독사”와 “용”으로 표현되는(13절) 마귀들을 재림 때 심판하실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구해 낼 것이며 그가 나의 이름을 알았으므로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나를 부르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고난 중에 내가 그와 함께할 것이며 내가 그를 구해 내고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로 그를 만족케 하여 내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14-16절). 그리스도인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말씀은 “높임”과 “응답,” “구해 냄,” “영화롭게 함,” “장수”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신 그분의 아들을 높여 주셨다. 그 아들께 “예수”라는 놀라운 이름을 주셔서 그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있게 하셨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혀가 그분을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이다(빌 2:8-11).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응답하셨고(요 11:41), 그분을 죽음과 지옥과 음부로부터 “구해 내셨으며”(행 2:26,27,31,32),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요 17:1). 하나님의 아들을 사망의 속박에서 구해 내심으로써(히 5:7)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약속하셨던 영원한 생명을 그 아들에게 주셨고(딛 1:1,2) 진정한 “장수”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 것이다.

비록 시편 91편이 교리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해도, 그 말씀들은 얼마든지 우리 자신에게 영적으로 적용해서 기도할 수 있다. 건강과 장수, 전염병으로부터의 보호, 각종 재앙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며 그 말씀을 들고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히 4:16) 하나님께 효과적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리적으로만 적용하는 성도의 신앙에는 온기와 활력이 없다. 성경의 영적 적용은 마음의 경직된 곳을 은혜와 사랑으로 보드랍게 하여 따듯한 생기가 돌게 한다. 그러므로 성도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당신을 구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살면 당신을 높여 주실 것이다(14절). 하나님을 부르라. 그러면 고난의 때에 함께하시며 응답해 주실 것이다(15절). 주님을 섬기기 위해 장수를 구하라. 그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 장수로 당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16절)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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