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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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한 날들에 대한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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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1월호>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가 그 표제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고난을 받는 인생과 이스라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주여, 주께서는 모든 세대에서 우리에게 거처가 되셨나이다』(1절). 시편의 화자인 모세는 하나님을 “거처”로 묘사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피난처”이시고 “성도의 요새”이시다(시 91:2). 그분의 날개 깃털 아래에 성도들을 모으시고 새 사냥꾼의 덫과 지독한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분이신 것이다(시 91:3,4).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상 만민의 거처가 될 수 있는 분이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자손이며, 그런 점에서 세상 모든 사람은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다(행 17:28,29).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점을 깨닫고 그분의 그늘에 들어와 쉬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청하셨듯이 그 위대하신 분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거처”로서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마 11:28).


『산들이 생기기 전, 주께서 땅과 세상을 조성하시기도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2절). “산”은 하나님께서 땅을 지으실 때(창 1:1) 만드신 “높은 흙덩이”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단순한 평면으로 만들지 않고 높고 낮음과 굴곡이 있게 하셨다. 산의 역사는 땅, 곧 흙의 역사이며, 현 우주의 역사에 비견된다. 산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상징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어떤 산보다도 높고 오래된 분이시다. 잠언에서 “지혜”로 표현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산들이 세워지기 전, 곧 영원 전부터 존재한 창조주이시다(잠 8:25,26). 하나님께서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셋째 하늘의 시온 산 위에 앉아 계시면서 만물을 다스리시는데, 그분께 나아가려면 산에 오르기 위해 상체를 구부리듯이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저 멀리 홀로 우뚝 솟아 있는 산처럼, 인간이 알아주든 말든 하나님께서는 저 높은 셋째 하늘의 시온 산에 홀로 우뚝 솟아 계신다(사 57:15). 바로 그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면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파괴하실 것인데, 성경은 재림하실 그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산에서 떨어져 나간 돌』(단 2:45)이라고 말씀한다. 그분께서 나오시는 산은 셋째 하늘의 시온 산이며, 그 “살아 계신 돌”(벧전 2:4)께서는 그 산을 떠나 재림하실 때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돌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단 2:35). 인간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2절)이신,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해야 한다.

『주께서 사람을 멸망으로 돌려놓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 사람의 자손들아, 돌이키라.” 하시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단지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경점 같나이다』(3,4절). 하나님께서 사람을 멸망으로 돌려놓으신 이유는, 그 생존 본능에 따라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살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들을 저주 아래 죽게 하셨는데, 바로 이 점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죽는 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그러므로 너희 자신은 돌이켜서 살라』(겔 18:32).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니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너희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고 하느냐?』(겔 33:11)


죄의 길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천 년이 단지 지나간 어제와 같고(벧후 3:8) 밤의 한 경점 같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생은 한 번의 눈 깜짝임과 같다. 주님께서 사람을 홍수로 쓸어 가시면(5절), 그는 인생의 기반을 채 닦기도 전에 죽어야 한다. 사람의 인생은 잠자는 것과 같은데(5절), 그가 눈을 뜨면 어느새 아침이듯 인생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또한 사람은 풀과 같으며, 풀이 아침에 피어나서 자라다가 저녁에 꺾여 마르듯이 인생은 주의 성내심 속에서 소멸하고 주의 진노로 인해 고난을 겪는다(5-7절). 심지어 풀이 꺾여 불타는 아궁이 속에 던져지듯이(마 6:30) 사람은 죽음 뒤에 『불타는 용광로』(마 13:42) 속으로 던져지는데, 짧고 허무한 생애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성내심과 진노 속에 보내다가 지옥으로 가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세월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한 문제 아니겠는가? 한 인간으로서 해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본 솔로몬이 인생에 대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모든 의무니, 이는 하나님께서 선이든 악이든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것임이라』(전 12:13,14). 이 짧디짧은 생애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후의 심판을 잘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들을 주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으니』(8절). 『우리의 죄악들』, 심지어 『우리의 은밀한 죄』까지도 주님 앞에서는 벌거벗겨진 채 드러날 것이다. 솔로몬이 결론 내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선이든 악이든 인간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심판에서 제외되는 그리스도인은 어떠한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함께 지옥의 정죄를 받을 수 없기에 “지상에서는” 죄에 대한 징계를 받고(고전 11:32),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구원 이후에 자기 몸으로 섬긴 것들을 심판받게 될 것이다(고후 5:10).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어두움에 감추어진 것들에 빛을 비추시고 마음의 의도들을 나타내시는 자리가 될 것이므로 지상에 사는 동안 사람에게서 받는 칭찬이나 판단은 쓸모가 없다. 이는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는 남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마음의 의도들까지도 모두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고 계시는 유일한 한 가지는 “누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서 순수하게 섬기고 있는가”이다. 『나는 내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그것을 구하시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요 8:50). 성도들이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라. 당신을 향한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판단은 허영심만 심어 줄 뿐이다.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을 의식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그것은 당신의 섬김을 결국 끝장낼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덫에 걸려 섬김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절대로 사람에게 주시지 않는다! 『나는 주니 그것이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양을 새긴 형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라. 그러한 자세로만 섬기라. 바로 그와 같은 성도를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진노 가운데 지나가며, 우리의 연수가 한갓 이야기처럼 지나가나이다』(9절).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인생에 대한 정의는 그것이 한갓 “이야기” 같다는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가 살았더라...”라고 혹자는 우리에 대해 짧은 이야기처럼 말할 것이다. 그 이야기는 단조로울 수도 있고 아니면 흥미롭거나 분주하고 스릴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저 어느 도서관 구석에서 누렇게 변색되고 냄새나고 삭아 가는 이야기책 같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연수를 절대 퇴색하지 않는 “영원한 이야기”를 위해 써야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 곧 『영원히 송축받으실 하나님』(롬 9:5)에 관한 신선한 이야기이며, 대할수록 새로운 그 이야기를 위해 생을 다 쓴다 해도 시간은 턱없이 모자라기만 하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자기처럼 혼인하지 않고 살면서 주님의 일만을 염려하는 것이 유익하다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고전 7:8,32-34)


그러나 독신의 길을 택한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은 당신의 그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온전히 드리고 있는가? 진정으로 주의 일을 염려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시간을 쓰고 있는가? 이 문제는 독신뿐만 아니라 혼인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해당한다. 우리의 연수는 혼인했든 안 했든 기껏해야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며, 그 연수의 힘은 수고와 슬픔이니 그것이 곧 끊어지면 우리가 멀리 날아간다(10절).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해서도 성내시며 두렵도록 진노하신다(11절).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서 갖춰야 할 지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매우 짧다는 것을 의식하고, 죄를 멀리하며 오직 주님의 일을 위해 여생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리의 날들을 세도록 가르치시어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12절). 이제 손가락으로 세어 보라. 칠십이란 연수에서 당신의 생은 몇 손가락이나 남아 있는가? 팔십을 넘어 덤으로 더 살고 있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지 손가락으로 한번 세어 보라.


『오 주여, 돌이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께서는 주의 종들에 관하여 돌이키소서. 오, 아침에 주의 자비로 우리를 만족케 하시며 평생 동안 우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를 곤고하게 하신 날수대로 또 우리가 악을 보았던 연수대로 우리로 기뻐하게 하소서』(13-15절). 모세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실로 “곤고한 날들”이었다. 그들은 죄로 인한 악을 보았고 불평과 불신과 징계 속에서 쓰러져 갔다. 하지만 그것은 광야 40년의 방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이 침공하여 포로로 사로잡아 가기 시작한 B.C. 606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 전무후무한 대재앙이 닥칠 대환란이 끝날 때까지 이스라엘은 그 “이방인들의 때”를 곤고함 속에서 보내야 한다. 『또 그들은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모든 민족들에게 사로잡혀갈 것이요, 또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눅 21:24). 비록 그들의 역사 행로가 그렇다 해도 우리는 다음의 마지막 기도에 주목해야 한다.
『주의 일을 주의 종들에게,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들에게 나타내시며 주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있게 하소서. 주께서는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히 세우소서. 정녕, 주께서는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히 세우소서』(16,17절).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이다. 즉 곤고한 “이방인들의 때”를 끝내시고 이스라엘을 민족적으로 견고히 세우실 것에 대해 기도하고 있다. 초림 때 거부당하신 메시아께서 재림하시면,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천년왕국을 넘어 영원까지 민족들의 머리로 섬김을 받을 것이다(사 60장).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 입은 영원히 뛰어난 민족이 되어 많은 세대의 기쁨이 될 것이며(사 60:15), 주님께서 그들의 영원한 빛과 영광이 되시어(사 60:19) 그들의 슬픔의 날들을 끝내실 것이다(사 60:20). 말하자면 지난 2천 년간의 곤고함에 대한 민족적 보상이 향후 영원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인생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고 바람처럼 지나가며 전령보다도 빨리 달아나 버린다(욥 7:6,7; 9:25). 그 바람과 같은 생이 죄로 인해 곤고했다면 이제부터는 의를 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말씀을 강력히 주장하라. 『주께서 우리를 곤고하게 하신 날수대로 또 우리가 악을 보았던 연수대로 우리로 기뻐하게 하소서』(15절). 곤고함과 악을 보았던 그 연수대로 이제는 우리의 인생을 기쁨으로 채워 주시라고 간구해야 한다. 성도가 이방인들의 뜻을 행한 것은 지난날의 생활로 충분하다(벧전 4:3). 이제는 의를 행함으로써 복과 기쁨을 누리는 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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