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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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그것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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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8월호>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 한 마리"를 사용하셨다. 『주께서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산 근처 벳파게와 베다니 가까이 이르렀을 때 제자들 가운데 둘을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매어 놓은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보리니, 풀어서 이리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그것을 푸느냐?'고 하면 너희는 그에게 '주께서 그것을 쓰신다.'고 말하라."고 하시니라』(눅 19:29-31). 『주께서 그것을 쓰신다.』라는 말씀은 매우 권위 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분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시어 쓰겠다고 하시는데, 거기에 대고 "왜 그렇게 하시나이까?"라고 감히 항변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것을 쓰겠다고 하시면 쓰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져가겠다고 하시면 가져가시는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보라, 그분이 취해 가시는데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누가 그분께 '무엇을 하시나이까?'라고 말하겠느냐?』(욥 9:12)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우리의 건강, 지혜, 재산, 직업, 사역, 가족, 국가 그리고 생명을 취해 간다고 하실 때,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제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 그것만은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감히 그렇게 따지려는 교황이나 왕, 대통령, 정치가, 대기업 총수, 교육자, 과학자, 철학자, 종교 지도자 등이 있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진흙은 자신을 지은 토기장이에게 "어찌하여 저를 이같이 만드셨나이까?"라고 따져 물을 수 없다. 묻는다 해도 이미 만들어진 진흙의 형태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1963년 미국의 장대높이뛰기 선수 브라이언 스턴버그가 약관의 나이에 5m 높이라는 세계 신기록으로 세계 정상에 올랐을 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그의 건강을 빼앗아 가셨다. 높이뛰기 선수들이 점프 동작을 훈련하는 트램펄린 위에서 연습을 하다가 바닥에 거꾸로 떨어져 목뼈가 부러졌는데, 그로 인해 하체가 마비되어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그는 구원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증거하는 일꾼으로 변모되었다. 한번은 어떤 인터뷰에서 그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게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고가 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 사고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지금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제 자신만 믿고 의존하며 살았지만, 지금은 저라는 존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그 사람을 쓰시기 위해 건강이든, 재산이든 그 무언가를 취해 가시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 그것을 쓰신다.』라고 말씀하실 때는 어느 누구도 그 말씀에 대해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 새끼 한 마리를 쓰시려 하신 것은 그 나귀가 "필요"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귀는 "구원받지 않은 죄인"을 상징한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들나귀 새끼같이" 태어난다(욥 11:12). 예수님께서 타셨던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눅 19:30) 나귀, 곧 길들여지지 않은 들나귀 새끼였다.

미국 앨라배마 주 윙이라는 마을의 한 늙은 농부는 길들여지지 않은 들나귀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① 들나귀는 세상에서 가장 고집 센 동물이다.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은 너무도 마음이 완고하여 "지옥에 가도 상관없다."라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서 좀처럼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② 들나귀는 밤늦게까지 숲을 헤치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 죄인들은 빛으로 나아오는 것을 싫어하고 밤과 어둠을 좋아한다. 환락과 쾌락을 따라 세상의 어둑한 뒷골목이나 전전긍긍하며 개나 돼지처럼 쓰레기통이나 뒤지고 진창 속에 뒹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죄가 가져다주는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죄 짓는 일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들이 저지른 악한 일에 대한 징벌이 속히 집행되지 않는 것을 보고서 악을 행하기로 마음을 확고하게 정해 놓고 살아간다(전 8:11).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무시하는 것이다(롬 2:4). ③ 어떤 나귀는 행동이 매우 거칠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아주 "거친 죄인"으로 태어나는데, 불의와 죄들에 묶여 있어서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드세다. 특히 예수님께서 쓰시려 했던 나귀는 『사거리 문 밖에』(막 11:4) 매여 있었는데, 이것은 주님의 양 우리의 문 바깥에 있는 죄인이 죄의 줄에 얽매여 구원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줄을 풀어서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욥 39:5)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 ④ 들나귀는 누군가가 자기 등에 올라타야만 비로소 길들여진다. 죄인 역시 예수님께로 나아와 구원을 받고 자기를 묶고 있는 죄의 줄들에서 풀려나야만 어떤 것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본성이 길들여진다. 주님께서 죄인의 등에 올라 타셔서 고삐를 잡고 이리저리 통제하셔야만 제대로 길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⑤ 들나귀는 길들여질 때에야 비로소 채찍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길들여지기 전에는 아무리 그 나귀를 채찍질해도 소용이 없다. 다시 말해 죄인들은 주님께서 그 등에 올라타시어 그들을 길들이시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징계나 책망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통제가 불가능하고 완고하고 무지하며 죄의 줄들에 매여 있는 들나귀 새끼를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셨던 것인데, 오늘날 주님께서는 들나귀 같이 죄악의 구렁에서 뒹굴며 거칠게 살았던 우리를 죄와 사망의 줄들에서 풀어 주신 뒤에 그분의 목적에 맞게 쓰려고 하신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아쉬운 게 있다고 들나귀 같은 우리를 쓰려 하시는 것인가? 우리가 오늘 죽는다 해도 극소수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 외에는 아무도 우리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약 75억 명의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관심조차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없다 해도 태양은 언제나 그렇듯이 뜨고 질 것이고, 우리가 뭐라고 떠들어 댄들 바다의 밀물과 썰물은 계속해서 들어왔다 나갔다 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에 관하여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 했고, 인간은 헛것이고, 지나가는 그림자며, 진토요, 벌레요, 티끌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존중할 가치가 없는 이 무지하고 완고한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이유가 무엇인가? 고집불통에 죄인으로 태어나 죄만 짓고 살다가, 죽은 후에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번 시간을 내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런 우리를 왜 구원해 주셔서 주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쓰려고 하시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그러한 숙고 끝에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모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벧전 1:3)와 "지극히 풍요한 은혜"(엡 2:7)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면 그 누구라도, 그 무엇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들나귀 같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실제 "짐승"인 말 못하는 나귀를 사용하셔서 사람의 음성으로 말하게 하시어 거짓 선지자 발라암의 미친 짓을 막게 하신 경우도 있다(벧후 2:16). 심지어 "무생물"을 쓰시는 경우도 있는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는 제자들에 대해 꾸짖어 달라고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침묵을 지킨다면 돌들이 즉시 소리를 지르리라.』(눅 19:40)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전할 명령과 말씀이 있으실 때면 언제든지 그 어떤 도구라도 쓰실 수 있다. 이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사탄의 강력한 방해가 있다 해도 주님께서 쓰시는 데에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두 제자가 나귀 새끼를 풀려고 했을 때 이를 방해하는 주인이 있었다(눅 19:33). 어떤 죄인이 복음의 능력으로 죄들에서 풀려날 즈음에는 항상 마귀의 방해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구령"(soul winning)은 일종의 영적 전쟁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위해 어떤 누군가를 쓰시려고 할 때도 마귀의 강력한 방해가 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쓰신다고 할 때는, 그런 모든 사탄의 방해가 주님의 확고하신 뜻과 능력 앞에 무력화되고 만다.

심지어 인간의 어떤 연약한 모습에도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이것은 "토기장이의 인내"와 관련이 있다. 한 사람의 일꾼을 길러 내시고, 한 사람의 믿음의 용사를 준비시키시며,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도구를 만드시기 위해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토기장이의 인내인 것이다. 한 명의 믿음의 용사가 세워질 때까지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고, 믿음이 연약하고 순종하기를 주저하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도가 온전히 설 때까지 주님께서는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보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열심이 없었다면, 믿음의 용사들은 결코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다윗, 사무엘, 엘리야, 베드로, 바울, 로마제국과 로마카톨릭의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죽어 간 수많은 순교자들, 아도니람 저드슨, 찰스 스펄전, 조지 뮬러, 헨리 마틴, 윌리엄 캐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존 번연, D.L. 무디, 샘 존스, 빌리 선데이, 프랭크 노리스, 스코필드, 피터 럭크만 등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시려고 그분의 성도들을 열심히 빚어 오셨고, 지금도 빚고 계신다. 물론 온전하게 빚어지기까지의 기간은 성도들마다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겠다고 하실 때, 결코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쓰겠다고 하시면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기꺼이 주님께 내어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의 등에 오르셔서 고삐를 잡고 우리를 쓰고자 하신다면, 이런저런 핑계들과 의심들은 모두 치워 버리고 "사랑하는 주님, 주께서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으며, 원하시는 곳은 어디로든 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순종해야 한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쓰겠다고 하시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만의 계략으로 전멸될 위기에 놓였을 당시, 하나님께서는 그때를 대비하여 에스더를 이방 왕국의 왕후의 자리에 올려놓으셨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스더가 하나님께서 그녀를 왕후의 자리에 앉게 하신 목적을 완수하려 하지 않았다면,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구할 또 다른 사람을 찾으셨을 것이다. 『만일 이 때에 너까지도 잠잠하면 유예와 구원이 다른 곳으로부터 유대인에게 있겠으나 너와 네 조상의 집은 멸망을 당하리라. 네가 이 때를 위하여 왕국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 물론 그 일을 결행하는 것이 에스더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소서. 그리고 여러분은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삼 일 밤낮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와 나의 여종들도 마찬가지로 금식하리이다. 그리고 나서 내가 법을 어기고 왕에게 들어가리니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사실 이것은 지난날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킨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신실한 성도들은 그 뜻에 온전히 순종했다. 오늘날 성경적인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의 헌신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이 배교한 시대에는 그렇게 헌신할 수 있는 성도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도 잘 아신다. 이 시대에 순교자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어찌 보면 비참한 일이지만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더 많이 내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부당한 일이겠는가? 지옥으로 향해 가는 죄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건져 내기 위해 시간을 더 쓰라고 하시는 것이 부당한 요구겠는가?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하여 주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준비하라고 하시는 것이 과연 부당한 요구겠는가? 설령 목숨을 걸 만큼의 순종을 요구하셨다 해도 그것은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값없이 내어 주실 만큼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무런 값 지불도 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겠다는 말씀이 부담으로 다가와서는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라! 맡기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모두 책임지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쓰겠다고만 하시고 나머지 모든 일을 우리더러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다. 『주께서 그것을 쓰신다.』라는 말씀 앞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드리겠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헌신을 결행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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