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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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기도한 후, 그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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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8월호>

완공작업이 한창 중인 인천 국제공항, 그곳으로 가는 길목 가운데 하나인 방화대교 공사현장.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흐르는 물살로부터 교각을 보호하기 위해 어초역할을 하는 커다란 콘크리트 블록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언뜻 듣기에는 무언가 하겠지만 쉽게 얘기해서 막노동이다. 한 달 남짓된 일이지만 제법 호주머니가 두둑해질 것같다. 이번 학기 동안 나는 주님께 100만원 이상 수입을 얻을 수 있고 신학원 공부도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주시기를 간구해 왔었다. 자신의 능력과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어리석고 욕심 섞인 기도였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어렵사리 구한 일자리를 연거푸 두 번씩이나 허탕을 치게 하신 뒤 현명한 응답을 해 주셨다(학기 중에는 충분히 공부를, 방학 동안은 간구한 수입을...).
주님께서는 어떤 때는 이렇게 짓궂게 대해주시지만 여전히 충분한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신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을 먹고 사는 법이 아니던가(솔 8:6,7). 막노동이라 몸은 피곤하지만 베푸신 사랑을 느낄 때 속으로 낄낄대는 내 마음은 신이 나 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알 턱이 없는 이 사람들... 뺀질이 아저씨, 나이롱 집사 양반, 삼척대학교에 다니는 다섯 명의 학생들, 이기동 아저씨, 기타 등등... 이들에게도 즐거움과 웃음은 있지만 여전히 그 허망함은 어쩔 수가 없다.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맨 먼저 알게 된 분이 어느 장로교회 집사직을 갖고 있는 아저씨였다.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될 때 흔히 갖게 되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음, 그냥 믿어요.” “부처나 공자를 믿듯이 말인가요?” “그렇죠. 종교를 하나 가질까 했는데 그렇게 됐어요.” 역시 어이없는 대답을 듣게 되었지만 오히려 솔직한 편이었다. 구원받지도 못한 채 교회를 다니거나, 어떤 직분을 지닌 자들의 비뚤어진 자존심보다는 봐 줄 만했다. 2년 전쯤인가, 교회 주변을 심방다닌 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과 바로 붙어 있는 어느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넓은 잔디마당에 물을 뿌리고 있던 그 주인은 사납게 생긴 개 때문인지 닫힌 문 사이로 “무슨 일이슈?”라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예,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아! 예, 나 이 교회 장로요.” 그는 턱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을 가리키며 자랑스런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구원에 대한 확신은 갖고 있으세요?” “아, 내가 이 교회 장로라니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는 아저씨가 장로인 것을 물은 게 아니고요, 지금 당장 죽더라도 지옥에 안 갈 확신이 있으시냐는 겁니다.” “아, 이 자식이, 내가 이 교회 장로라니깐, 내가 이 교회를 지어줬단 말야. 이 집도, 이 교회도 다 내 땅이야.” 그는 나를 잡아먹을 듯 고함치며 길길이 뛰었다. 지옥불에서 그렇게 뛰지는 말아야 할텐데 말이다.
이에 비해 나이롱 집사 양반은 꽤나 특이하다. 그는 자기 차 속에서 개역성경이지만 열심히 본다. 심지어 노트에다 그것을 옮겨쓴다. 내가 봤을 때 그는 로마서를 베껴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 앞에서 스스럼없이 담배를 피우고 육두문자를 쓴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열성이다(롬 10:2). “아저씨, 교회만 다닌다고, 집사라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거든요.” 나는 정확히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반응이 없는 그에게 며칠 뒤 요한복음-로마서 보급판 한글킹제임스성경에 전도지를 끼워주고 꼭 읽어보시고 구원받으시라고 간략한 설명을 덧붙이며 건넸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신통치 않은 반응이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에라, 댁이 구원받든지 말든지,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들이 스친다. 이럴 때에는 정작 혼에 대한 연민이나 구령의 열정 따위는 온데간데 없고 무더위에 지친 개 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마음만 주님 앞에 부끄럽게 드러낼 뿐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내게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는 내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정녕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전 9:16) 내가 이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면 적어도 그런 생각을 쉽게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끼어드는 방해꾼들을 대할 때면 혼에 대한 연민과 구령의 열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것같다.
맞선을 60번 이상 보고도 장가를 못간 채 마흔을 훨씬 넘겨버린 이기동 아저씨(코미디언 이기동씨를 닮아서 붙여진 별명), 뜻하지 않게 생긴 많은 휴식시간 덕분에 나는 이분께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내게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를 먼저 물어왔는데 나는 지옥의 실체를 말해주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에 대해서 부가적으로 설명했다. “아저씨가 죄인임을 시인하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통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기만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으실 수 있습니다.” 나는 그를 초청에 응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였다. “아저씨, 이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직한 마음으로 믿으시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때 갑자기 뺀질이 아저씨가 말참견을 하고 만다. “나도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대학교 때까지 예수를 믿어봤지만 복음 전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대단히 잘못된 거야, 먼저 이해가 되게끔 설명을 해주고 그 다음에 믿게 해야 되는데 말야.” 그는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소 화난 음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 구원받으셨어요?” 그는 대답 대신 되묻는다. “그러는 댁은 구원받았쑤?” “그럼요.” “어떻게 그걸 알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는 겁니다. 아저씨,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세요?” “아, 믿지요.” “왜 믿으시죠?” “...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이쯤되면 그는 주님 앞에서 대단히 뺀질거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 또한 말싸움에 휘말려 마귀에게 속고 있었다. 커진 목소리 덕분에 여러 사람의 시선이 나를 곁눈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격앙된 모습이 복음을 가린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나는 순간이었다.
지하철에서 성당을 다닌다던 중학생 소년에게 복음을 전했던 때에도 훼방꾼이 있었다. 그는 순진한 아이를 데리고 지금 뭐하는 거냐고 다그쳤다. 나는 정중하게 당신에게 한 말이 아니니 간섭 말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성경을 펴서 복음을 전하던 나의 양팔을 꽉 붙들었다. 그리고 그는 종교에 자유가 있는 것인데 예수를 믿으라고 학생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 졸지에 잡상인이 될 처지였다. 나는 격렬하게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당신이 이 학생을 지옥에 안 보낼 수 있어요? 당신이 하나님이요?”라고 쏘아붙이고 막 내리려는 그 아이를 따라 붙잡았다. 그 학생은 나의 육신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다시 성경을 펴서 제시한 복음을 정말 다행스럽게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카톨릭이 이단이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는 나와 함께 서서 손을 꼭 잡은 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는 굉장히 기쁜 얼굴로 돌아갔다. 방해를 물리친 승리의 기쁨을 주님께서 맛보게 해주신 것이었다. 비록 흠은 있었지만 말이다.
훼방꾼이었던 뺀질이 아저씨가 데리고 온 삼척대학교 학생들은 하나같이 모두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다. 그 중 창호라는 학생은 여자도 아닌 것이 귀걸이까지 했다. 일하러 오는 그날 저녁부터 밤새도록 술퍼마시는 것부터 배웠던 녀석들이다. 휴식시간 틈틈이 한 명 한 명 복음을 전해보지만 창열이라는 학생의 대답처럼 모두들 “난 종교에 관심없어요.”라는 말뿐이다. 조금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더니 창호의 입에서 가슴 답답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실은 저, 예수님 믿고 있어요.” 하루 일을 끝내고 씻으러 간 사우나실에서 복음을 전하던 내게 실토한 것이다.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구원을 점검해 보았지만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렇게 믿은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마귀의 고등수법에 속은 것이 아니라면 창호는 단지 세상 경험을 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주님을 떠나버린 경우였다. 나 또한 탕자의 경험이 있던 터라 주님을 떠났을 때 얼마나 비참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가를 알게 하고자 권면했지만 먹혀들지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이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나 자신도 흉물스러운 세상의 방탕한 경험이 있질 않던가. 주님이 베푸신 자비와 사랑이 아니었던들 내가 이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입술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나는 창호가 속히 주님께로 돌이키길 원했다. “네가 죽으면 누가 슬퍼해 줄 것 같으냐?” 나의 질문에 창호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과연 한 사람의 죄인이 죽어서 지옥에 가면 누가 가장 슬퍼할까? 혼에 대한 연민이 있다면 그가 지옥에 가는 것을 내버려둘 리는 없다. 이제 8월 초순 쯤이면 이 일도 끝나게 된다. 나는 여기서 아직 아무도 구령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진지하게 제대로 기도해 주지도 못하고 진심어린 사랑으로 복음을 전한 것같지도 않다. 시간은 자꾸 흐른다. 이 일이 끝나는 것처럼 그들의 생명도 정해져 있다(시 90:10).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과연 누가 가장 기뻐하시겠는가? 주님께서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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