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구령이야기 분류

나의 사역 거리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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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10월호>

거리에서 설교하는 형제들을 옆에서 호위하며 다음 차례의 설교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또는 주변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 주면서 가만히 형제들의 설교를 귀 기울여 듣고 있노라면,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는 결코 들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힘을 형제들의 담대한 설교를 통해 느끼게 된다. 때로는 소름 끼치는 무서움마저 느낀다. 바로 이 전율 가운데 감동을 주는 말씀의 능력이 사람들의 혼을 찌르고, 화인 맞은 양심을 자극하며, 자신의 죄에 지극히 무관심한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반응을 보이게 하고,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려 수많은 혼들을 회심시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저 형제로 하여금 저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저렇게 작은 체구에서 어쩌면 저렇게도 우렁찬 목소리와 힘 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것일까? 무슨 힘이 그토록 안타까운 마음으로 청중에게 호소하는 열정적인 설교를 가능케 하는 것일까? 무엇이 저 젊은 피를 끓게 하고 있으며, 무엇이 그토록 그의 말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인가? 그들의 설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의문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들은 그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외모의 사람들이고, 또 어찌 보면 빈 구석이 많이 느껴지는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거칠고 극단적이고, 비판적이고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공격적이고 저돌적으로 보이는 그들. 어찌 보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들이 대중 앞에서도 전혀 창피함을 모르는 철면피거나,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행태를 일삼는 광신도 내지는 무한 경쟁 시대의 낙오자쯤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비로소 이러한 의문을 풀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의 설교 메시지는 처음에는 아주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내용이었고, 주로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폭로하는, 주관적인 감정을 한껏 실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거리 설교 초기에는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고 격해져서 오기로라도 더 절규하듯 외치기도 했으나, 어찌 보면 세상에 대한 나의 불만이나 적개심이, 또 인생에 대한 젊은이 특유의 곱지 않은 시선과 삐딱한 마음이 이러한 설교를 유도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용한 곳보다는 그리 시끄럽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왕래가 많고 번잡한 곳을 좋아한다. 군중 속에 푹 파묻혀 나도 그 군중의 일부가 될 수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분위기를 즐기는 싸움닭 같은 나의 기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순수한 동기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나의 마음이 더 풍성해지고 성숙해져서, 가식이나 시기가 아닌 진실로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연민으로, 또 주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사람들의 차갑고 모멸 찬 반응이나 태도까지도 품어 안고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함께 내 개인의 애처로운 심정까지도 실어서 전하는 설교자로서 말이다.

나는 거리 설교를 할 때 발성을 이용해 가급적이면 큰 소리로 목청껏 외친다. 일단 설교가 시작되면 얌전한 양에서 마치 포효하는 성난 사자로 돌변한다. 복부 근육에 긴장을 유지하고 설교를 한참 하고 나면 아랫배가 좀 뻐근하고 뱃속이 쓰릴 때도 있다. 이렇게까지 혼신의 힘을 설교에 다 쏟아 붓는 이유는 첫째, 적과의 영적인 대응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함이요, 둘째, 설교를 듣는 군중들의 시선을 유도해 분위기를 압도하기 위해서다. 악한 무리들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는 날에는 그 작은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와 활개를 치기 마련이다. 내가 설교하기를 주저한다거나,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거나,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꺼려한다면, 사탄은 자기 종들을 통해 설교를 방해하며 설교 분위기를 금방 흐려 놓는다. 괜히 비꼬는 투로 “할렐루야, 아멘.” 하고 한 마디 던지면서 지나간다든가, 설교자의 서툰 몸동작을 그대로 흉내내 관심을 분산시킨다든가, “시끄러, 조용히 해! 젊은 놈들이 뭘 안다고 예수 타령이야!” 하고 고함을 지르거나, 술꾼이나 미친 사람 등 엉뚱한 사람들의 느닷없는 출연으로 인해 설교가 중단되거나 설교자가 위협을 느껴 설교의 리듬이 일단 깨지게 되면, 이미 지루해진 청중들은 이 틈을 타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고, 애써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켜 청중과 형성되었던 설교자와의 교감은 순간 깨끗이 사라지고 말기에, 다시 시선을 집중시켜 설교를 마무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물론 옆에 있는 형제들이 방해자들을 막고 설교자를 호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소한 일에 일일이 맞서 대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더 당당히 설교에 임하는 편이 낫다. 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복음을 외치며 이글거리는 강한 눈으로 그들을 응시할 때, 그들은 눈빛을 흐리고 꼬리를 감추고 만다.
청중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알아차리고, 이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군중 속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청중은 설교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얼굴이 확 달아오르거나 화가 치밀어서 설교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뜨게 된다. 사람들은 설교를 듣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설교의 분위기에 먼저 흥취하게 되고, 그 뒤에야 설교의 메시지에 귀를 귀울이게 된다. 사실 설교란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시 시선 처리와 청중들과 일정한 거리 유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설교자가 습관적으로 너무 한 곳을 쳐다보게 되면, 그 시선을 받는 사람은 무의식중에 회피하게 된다. 또 청중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시끄러워서 듣기 싫은 지경이 되거나, 너무 멀면 설교자의 소리가 바로 앞에 있는 청중에게도 들리지 않아 반응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된다.

설교하는 형제들 가운데는 발동이 좀 늦게 걸리는 설교자가 있는가 하면, 설교의 뒷심이 좀 부족한 형제들도 있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목소리도 작아질뿐더러 중간 중간에 자꾸 설교의 가닥을 못 잡고 생각의 고리가 단절돼, 가끔 같은 말을 되풀이하거나 설교의 뒷마무리가 어설프게 되곤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끝낸 뒤, 대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는 자기 성취감이나 만족감에 젖어 자만하거나 자위해서는 절대 안 된다. 거리 설교자에게는 기성 설교자 못지 않은 꾸준한 자기 발전의 노력과 연구가 필요하다. 이 숭고한 설교의 자리가 자기 표현 욕구를 채우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자리로 전락하거나, 준비나 성의 없는 임기웅변식의 설교나, 자기 중심의 제한된 어휘로 반복된 식상한 설교로 채워져서는 안된다. 어떤 설교자는 그날 꼭 자기가 정해 놓은 회수만큼 설교를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목 상태나 준비 상태는 생각지 않고 무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 중에서 절제의 은사를 발휘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사역은 “거리 설교”이다. 우리의 예배당은 거리에 있으며, 우리의 설교단은 성경을 펴서 외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지 세워지며, 우리들의 교구는 전 세계이며, 우리들에게는 목회자 생활비나 자녀 교육비나 의료보험이나 기사 딸린 비싼 자가용이나 자동차 보험도 필요치 않다. 우리에게는 정년퇴직이나 경기 악화로 인한 명예퇴직이나 임금동결도 없으며, 인기를 위한 자기 관리나 스캔들 걱정도 없다. 우리는 회중 수를 염려할 필요도 없으며, 회중 기도시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긴 미사여구를 늘어놓을 필요도 없고, 회중들이 내는 연보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집사 안 시켜 준다고 교회를 떠나는 거짓 형제들로 인해 골머리 썩을 필요도 없다. 매주 “오늘은 무슨 제목으로, 또 오늘은 어떤 본문으로 설교를 하나?” 하고 고심할 필요도 없으며, 주일마다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베껴 강단에서 떠들지 않아도 되고, 헌금이 줄어들까봐 사람 눈치를 보는 일도 없다. 꼭 정해진 설교 시간이 아니더라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 년 365일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고 군중이 운집하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설교할 수 있다.
다만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연민의 마음만 준비됐다면,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자신을 의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 설교자의 특권은 대접받기 좋아하고 심방해서 성도들의 얇은 호주머니에서 “촌지”나 뜯으려고 하는 엉터리 목사들의 권리와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나는 이 고귀한 하나님의 사역을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지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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