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과 고고학 분류

성경의 역사성을 보여 주는 앗시리아 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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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9월호>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더 분명히 깨닫게 되는 사실 중 하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점이다. 이를 고의적으로 부인하려는 진화론, 이신론, 무신론, 계몽주의, 합리주의, 인본주의, 공산주의 등의 시답잖은 주장에 단 한순간도 귀를 내어 줄 필요가 없다. 어리석은 이신론자이자 철학자였던 에머슨은 플라토가 쓴 <공화국>을 들먹거리면서 "도서관을 태워 버리라. 그 속에 담긴 모든 가치는 이 '한 권의 책'에 있다."라고 말했는데, 현재 그의 혼은 지옥에서 "불타고" 있다. 이는 그가 책 한 권을 잘못 선택함으로써, 반드시 남겨 두었어야 할 "책 중의 책"까지도 도서관과 함께 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그분께서 친히 기록하신 참된 역사책인 성경을 거부한 자들의 최후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역사(History)는 "그분, 곧 하나님의 이야기"(His Story)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주인을 배제한 채 기록한 모든 세속 역사는 편견과 오류로 가득 찰 수밖에 없고,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만들 뿐이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을 의심하지 말라. 무슨 고고학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인간이 발견한 여타의 과학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없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고 무오한 증거"로 제시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역사책이라는 믿음을 견지해야 한다. 한 고고학연구소 소장이었던 클리포드 윌슨은 "성경은 이 세상이 소유한 어떤 역사책보다도 가장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사실은 성경과 연관된 "앗시리아의 역대 왕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우선 "살만에셀 3세"(B.C. 859-825)는 성경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동시대의 왕이었다. 그는 지중해를 향한 서부 원정에서 시리아 연합군들과 접전한 적이 있었고, 여기에는 아합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영박물관 6호실에 있는 "살만에셀 3세의 석비"에는 당시의 시리아 연합군, 곧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시리아 왕 벤하닷 1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온다. 『나는 카르카르로 진격하여 파괴하고 정복하고 왕족들을 사로잡았다. 다마스커스의 하닷에셀(벤하닷 1세)이 돕기 위해 전차 1,200대, 기병 1,200명, 보병 20,000명... 이스라엘 왕 아합은 전차 2,000대, 보병 10,000명을 보냈다.』 아합과 벤하닷은 기본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3년간 전쟁이 없던 기간에(왕상 22:1) 살만에셀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잠시" 연합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합은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왕을 끌어들여 다시 벤하닷을 공격했다가 전장에서 죽고 말았다(왕상 22:34,35).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후에 등장한 "살만에셀 5세"(B.C. 726-722)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장본인이었다. 그 땅을 모두 점령하고 수도인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한 끝에, 그가 죽기 바로 직전인 B.C. 722년에 그 성읍을 함락시켰다(왕하 17:1-6). 뒤이어 왕위에 오른 "살곤 2세"(B.C. 722-705)는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고, 다른 이방 민족을 이스라엘 땅에 심는 정책을 펼쳤다. 사실 살곤 2세는 세속 역사에서 실제 인물로 취급받지 못했다. 그 이름은 성경에만 나온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타르탄이 아스돗에 왔던 해, (앗시리아 왕 살곤이 그를 보냈을 때,) 그가 아스돗과 싸워 그것을 취하였으니』(사 20:1). 그런데 1843년 프랑스인 보타가 이라크의 코르사밧 유적지에서 살곤 2세의 궁전 일부를 발굴했다. 그 벽에는 위 말씀대로 당시에 아스돗을 포획한 사실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그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기록도 발견되었는데, 그의 업적이 기록된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통치의 시작, 내가 다스리기 시작한 첫해에... 사마리아를 에워싸 빼앗았고 그곳에서 살던 27,290명의 거민을 데려갔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땅을 차지하게 했으며, 관리들을 그들 위에 두어 이전 왕의 조공을 부과시켰다.』 이것은 열왕기하 17:24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살곤 2세의 아들인 "산헤립"(B.C. 704-681)은 B.C. 701년경에 앗시리아의 속국들 가운데 반역한 나라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하여 본보기로 삼으려고 서부 원정에 나섰는데, 이때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예루살렘까지 압박해 들어갔었다. 당시의 유다 왕은 히스키야였는데,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산헤립의 공격을 막아냈다. 또한 현명하게도 침공을 대비하여 "수로 터널"을 팠는데, 열왕기하 20:20에는 그가 수로를 만들어 성읍 안으로 물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즉 예루살렘 밖에 있는 "기혼 샘"에서 지하 수로를 통해 성 안으로 물을 끌어오게 한 것인데, 이것이 성 안쪽의 "실로암 못"으로 연결된다. 이 수로는 처음에 여부스인들이 판 것이었고, 다윗왕은 이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차지할 때 이것을 이용했다(삼하 5:6-10). 히스키야왕이 앗시리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지하 수로를 다시 만든 이유는, 전쟁에서 식량과 더불어 "물"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루살렘을 포위한 앗시리아 군대가 물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성읍 안에도 물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히스키야가 산헤립이 와서 예루살렘을 치고자 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고관들과 용사들과 의논하여 성읍 밖에 있는 물의 근원을 막으려 하니 그들이 그를 돕더라. 그리하여 많은 백성이 모여 모든 물의 근원과 그 땅의 가운데를 흐르는 시내를 막고 말하기를 "어찌 앗시리아 왕으로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하더라』(대하 32:2-4). 이후 30절에서는 "히스키야가 기혼의 상류 물줄기를 막아 다윗 성읍의 서쪽으로 끌어왔다."고 말씀한다. 이런 성경적 사실은 오랫동안 감추어졌다가 19세기 말에 들어와서야 고고학적으로 발굴되었다. 이는 1880년 실로암 못에서 수영하던 한 소년이 우연히 비문 하나를 발견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탐험가 에드워드 로빈슨은 기혼에서 실로암 못까지 연결되는 수로를 찾아냈다. 이것은 소위 "히스키야 터널"이라고 하는데, 길이가 약 533m에 달하고 모양은 S자로 굽어 있다. 이 터널이 언제 건설되었는지 그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글귀도 벽면에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발굴로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임이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었고, 또 어떻게 히스키야가 주님께서 주신 지혜로 그런 수로를 만들 수 있었는지도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세계를 재패할 만큼 막강했던 산헤립의 군대가 끝내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는 히스키야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사 36,37장) 보호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의 천사가 나가서 앗시리아 진영에 있던 185,000명의 사람들을 죽였고, 결국 산헤립의 군대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왕하 19:35-37). 이러한 예루살렘 침공의 실패에 대한 내용은 1830년경 니느웨의 폐허 속에서 테일러가 발굴한 실린더 모양의 한 비석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히스키야가 내게 복종하지 않았기에, 나는 46개 도시와 그 주변에 있는 작은 도시들을 점령했고, 히스키야를 새장에 갇힌 새처럼 예루살렘에 속박해 두었다.』 하지만 산헤립은 예루살렘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선 아무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당시 "산헤립의 전투 부대가 갑자기 크게 줄었다"고 말하면서도, 그 원인에 대해서는 들쥐 떼가 몰려와 각종 무기들을 갉아 먹어서 그랬을 것이라고만 추측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나마 나은 주장을 했는데, 칼데아인의 역사가 베로수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급성전염병 때문에 포위 첫날밤에 185,000명이 그들의 장군과 함께 죽었다."라고 했다. 방법이 무엇이었든지, 성경은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때에 주의 천사가 나가서 앗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더라.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보라, 그들이 모두 죽은 시체더라』(사 37:36). 『전쟁이 주의 것』(삼상 17:47)이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모르면, "역사의 진실"은 영원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데 있다. 여전히 성경의 역사성에 대해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충분한 증거들을 보고서도 믿지 않겠다고 떼쓰는, 편견으로 가득 찬 고집쟁이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적 증거들이 오류로 판명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불신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시키지도 못한다.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이다(롬 3:3,4). 어떤 고고학자도 성경을 결코 이길 수 없고, 또 능가할 수도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