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과전쟁 분류

허영심으로 가득 찬 입다의 비극적 승리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10월호>

전쟁에서 최악의 군사 행동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쳐진 도시를 무조건 맹공격하는 것이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지휘관이 운제나 사다리를 이용하여 병사들을 성벽 위로 올려 보내면, 세 명 중 한 명꼴로 반드시 사상자가 나고, 결국 그 도시를 점령하지도 못하게 된다. 그래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전략"인데, 이 전략에 가장 부합하는 군사 행동이 이른바 "후방 교란 작전"이다.

간교한 마귀는 성도 개개인이나 지역 교회를 공격할 때 이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몰래 그 내부로 잠입하여 아무도 모르게 "파괴 공작"을 벌인다. 마치 흰개미가 목조로 만든 집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은밀하고 끈기 있게 목조를 먹어 치우면서 대들보와 버팀목에 큰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흰개미의 이런 작업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 결과는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인데, 집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라도 내부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면 오래 버티기가 힘들다. 한창 후방 교란이 진행되고 나면, 나중에는 적이 누구인지 분간조차 안 되어 적절한 대응도 할 수 없다. "주적 개념"의 혼란이 생기는 것인데, 결국 적들과 타협함으로써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경계가 무너질 때 그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죄악과 어두움이지 선한 것이나 빛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빛 대신 어두움을, 어두움 대신에 빛을 두며, 단 것 대신에 쓴 것을, 쓴 것 대신에 단 것을 두는 자들에게 화로다!』(사 5:20)라고 경고한다.

후방 교란 작전은 주로 "정보의 왜곡"과 맞물려서 진행된다. 즉 마귀가 자신이 꾸미고 있는 계략이나 현재 돌아가고 있는 영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고 정보를 왜곡시켜 주의력을 방해하고 분산시키는 것이다. 흔히 인간의 인식은 감정이라는 체를 통해 걸러진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대로 정보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마귀는 그런 사람의 눈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주면서, 진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혼합시켜 왜곡된 사실을 통해 그들의 정욕을 채워 준다. 이렇게 왜곡된 정보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속게 만들어서 진실을 허구에서 구분해 낼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허영심"이 생겨나게 된다. 말하자면 정보의 왜곡으로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심하게 부풀려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도 성도들이 자신을 본래 모습 이상으로 부풀려서 생각할까봐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내가 설령 자랑하려고 해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리니 이는 내가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이 나를 보는 것과 나에 관하여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 삼가노라』(고후 12:6).

재판관기에는 허영심이 강했던 두 인물이 나오는데,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과 길르앗인 "입다"이다. 아비멜렉은 재판관기 9장에서 자신의 어머니의 형제들인 세켐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은 70개로 "허영심이 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70명의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4,5절). 반면에 재판관기 11장에서는 암몬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재판관 입다가 등장하는데, 힘센 용사였던 그는 처음에 창녀의 아들이란 이유로 형제들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바로 이 시기에 "허영심이 강했던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3절). 다만 아비멜렉과 차이가 있다면, 둘 다 허영심이 강한 자들이 모였다 해도, 아비멜렉을 추종했던 자들은 돈으로 고용된 "폭력배들"에 불과했고, 입다에게로 몰려온 자들은 입다처럼 "용감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입다와 함께 이스라엘의 원수를 대적해서 싸우러 나갔던 것이다. 마치 사울 왕을 피해 아둘람 굴로 피신한 다윗에게로 모여든 400명의 용사들 같았다(삼상 22:2).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니고 있던 "허영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당하게 쫓아낸 길르앗의 장로들이 암몬인들로부터 구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해 왔을 때, 입다는 허영심에 따른 육신적인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즉 암몬을 대적하여 싸우러 가겠다는 그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던 것인데, 순전히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해 싸우러 간 게 아니었고, "그들의 우두머리와 대장이 되는 조건"을 내걸고 참전했던 것이다(9,10절). 이것이 바로 허영심이 강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인데, 항상 높아지기를 좋아하고 우두머리가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어떤 조직이든지 "으뜸이 되길 좋아하는"(요삼 1:9) 디오트레페 같은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밀레토에서 에베소의 목사들을 모아 놓고 고별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떠나고 나면 교회 안에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왜곡된 것을 말하여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쫓게 할 것이라.』(30절)라고 경고했다. 교회 내부에서 마귀가 세운 "야심찬 지도자들"이 일어날 것인데, 이들에게는 "정보를 왜곡"시키는 특징이 있다. 즉 그럴듯한 말로 속여 성경적 교리를 왜곡시킨다든지, 그동안 함께 섬기고 교제했던 담임목사나 형제자매들을 향해 거짓되게 비방하며 왜곡된 말로 그들의 인품을 깎아내린다. "사랑이 허다한 죄들을 덮는다."(벧전 4:8)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한 채 인간적인 실수들을 꼬투리 삼아 교회를 불평하고 대적하며 떠나기 위한 근거로 삼는다. 더 나아가 오히려 그들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했고 버림을 받았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절대 혼자 나가지 않는다. 반드시 자신이 포섭한 무리들도 함께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남의 어항에서 물고기를 빼내고 훔쳐가는 자들이며,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 같은 자들이다.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동조한 무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쫓도록 만든다. 물론 이들도 성경적 성별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적인 권력을 맛본 사람들의 가식적인 명분에 불과하다. 권력의 맛을 한 번 맛본 사람은 그 단맛을 떨치기가 어려운 법이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맛에 취해 버린 사람은 그들의 양떼가 어떻게 되든지 관계없이 그 양떼가 자기 자신만 쫓아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입다는 우두머리와 대장의 자격으로 암몬 자손들과 싸우러 나갔다. 처음에는 대사들을 보내서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것이 재판관기 11:12-28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 부분을 통해 우리는 입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훌륭한 믿음과 용기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특히 그의 뛰어난 역사적인 인식도 발견할 수 있는데, 철저하게 왜곡된 역사적 사실로 트집을 잡아 싸움을 걸어 온 암몬 왕에게 성경에 따른 올바른 역사관에 근거한 정확한 지식으로 최후통첩을 보냈던 것이다. 1. 위대하신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아모리인들을 쫓아내신 그 땅을 감히 암몬 족속이 차지하겠다는 것이냐?(23절) 2. 주 하나님께서 차지하라고 하신 그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지 않겠느냐?(24절) 3. 그대보다 더 뛰어난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과 싸운 적이 있느냐?(25절) 말하자면 발락보다 못한 암몬 왕이 함부로 까불었다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멸망을 결단코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4. 지난 300년 동안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계속해서 살아왔는데, 너희는 그동안 그 땅을 회복하지 않고 뭐하고 있었는가?(26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나 네가 나를 대적하여 싸우려고 잘못 행하고 있도다. 심판관이신 주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를 심판하소서』(27절). 입다가 사자들을 통해 보낸 이 경고의 메시지는 상대방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큼 무시무시한 최후의 통첩장이었다.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적을 향해 강력한 펀치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믿음과 용기 그리고 성경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성경적 지식에 관한 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능력 있는 용사가 되어서 그 누구를 만나든 진리의 말씀으로 제압하고 굴복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진리의 말씀을 모르면 비겁한 겁쟁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어리석게도 암몬 왕은 입다가 보낸 이 마지막 경고를 무시했고(28절), 입다는 주님의 영을 힘입어서 암몬 자손과 싸워 그들을 궤멸시켰다. 20개의 암몬 성읍들과 포도원의 평지를 굴복시켰고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다(32,33절). 그러나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의 결말은 늘 그렇듯이 매우 비참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아비멜렉은 성읍의 망대 위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짝에 머리를 맞아 비참하게 죽었고, 입다는 성급하게 내뱉은 "끔찍한 서원"(30,31절) 하나를 지키려다가 자신의 딸을 허무하게 죽게 만들었다. 사실 그는 잘못된 서원은 지킬 필요가 없고, 또 그것으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율법의 내용(레 5:4-6)에 대해 무지했다. 말하자면 제멋대로 율법을 지키는 자였던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판 17:6). 이것은 허영심이 낳은 또 하나의 폐해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결코 허영심으로 부풀려져서는 안 된다. 성경은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허영을 따라서 하지 말고 오직 생각의 겸손함으로 남을 자신들보다』 존중하라고 말씀하는데(빌 2:3), 하나님의 손 아래서 겸손할 때 마귀가 부풀리는 허영심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BB

성경과전쟁 18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