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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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을 멈추는 순간 위기는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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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7월호>

여호수아 10장의 기브온 전투는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위대한 승리로 끝이 났다. 적들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고, 전의를 상실하여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 다섯 왕은 도망하여 막케다에 있는 굴에 숨었더니 누군가가 여호수아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다섯 왕이 막케다에 있는 굴에 숨은 것을 발견하였나이다." 하더라』(16,17절). 그러자 여호수아는 그 왕들이 숨어 있는 굴 입구를 "큰 돌"로 막아 버렸고, 왕도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패잔병들을 추격하여 진멸시켰다(18-20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성도들의 영적 전쟁"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영적인 교훈들을 얻게 된다. 여기 굴 속으로 숨어든 다섯 왕은 우리의 삶 속에 숨어드는 죄들의 실상을 보여 준다. 물론 우리의 여호수아, 곧 군대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에서 벌어진 영적 전쟁에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어 그 죄들을 패주시키시고 물리치셨다. 그런데 그때 패배하여 달아난 죄들이 여기 막케다 굴 속에 숨어 버린 다섯 왕들처럼 우리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 왔다. 육신의 죄들의 몸 안으로 들어와 훗날을 도모하며 거점들을 구축하는 가운데 활동하기 용이한 요새들을 세워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탄에게 굴복했거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굴복하지 않은 영역은, 막케다에 있는 굴처럼 죄들이 자리 잡기에 무난한 장소가 된다. 한 번 죄들을 위한 거점이 마련되고 요새가 구축되고 나면 그것을 제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예 처음부터 그런 죄들이 우리 안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우리 안에 작든 크든 어떤 "캄캄한 굴"도 만들어 놓아서는 안 된다. 바위를 부수어 내는 큰 망치 같은 말씀으로 그 굴을 부수어 내든지, 말씀의 빛으로 굴의 구석구석을 환하게 밝혀 놓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죄들이 어디로도 숨어들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원수들이 그들의 성읍들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19절). 한 번 견고한 요새로 숨어들면 그들을 다시 끌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절에 의하면 원수들 중 일부가 방벽 친 성읍들로 들어갔으니, 한순간의 방심으로 놓친 적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놓쳐 버린 적들은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죄들에 해당된다. 말하자면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식으로 정당화했던 죄들이다. "남들도 다 하는데 어때? 누가 보지 않으니 괜찮아! 성경에는 꼭 그렇게 하지 말라는 내용이 없잖아. 이번 한 번만 하지 뭐! 죄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거야..."라는 식의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끌어들여서 자기 죄들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피터 럭크만 목사도 말했지만, 마지막 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들 중 하나는 "죄가 아니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즐기려 하는 것"에 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죄라고 분명히 명시되지 않은 것들이나 그저 선을 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즐기려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계속해서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참된 성도라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위해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을 부인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흔히 줄이 엉성하게 얽혀 있는 그물은 찌꺼기를 잘 걸러내지 못하지만, 촘촘하게 얽힌 그물은 작은 오물도 걸러낼 수 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삶의 자세가 간격이 좁고 고른 그물과 같아서 작은 죄까지도 하나님께 자백하고 버린다. 하지만 걸러내지 못하고 쉽게 간과해 버린 죄들이 우리 안으로 하나씩 스며들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성별의 기준을 낮출 때 종종 일어난다. 그래서 성경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임의로 낮춰서는 안 된다. 밥 존스 시니어 목사는 "미국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기준을 낮추는 데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이렇게 놓쳐 버린 적들은 죄들을 향한 공격이나 압박의 수위를 낮출 때라든지, 죄들과의 싸움을 집요하게 지속하지 않을 때도 생겨난다. 여호수아는 분명 19절에서 지체하지 말고 적들을 추격하여 그 후미를 쳐서 그들이 성읍들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적들이 성읍들로 들어갔다는 것은 지체했던 순간이나 끝까지 추격하지 못했거나 후미를 완전히 치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물론 20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큰 살육으로 이들을 진멸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순간의 방심으로 놓쳐 버린 적들이 몇몇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적들을 완전히 끝까지 진멸시키지 못하고 놓치게 되면, 나중에는 그 세력이 점점 커져서 제거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강력한 죄의 요새들이 되고 만다.

어쨌든 일단 숨어 버린 적들은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당시 여호수아는 어떻게 했는가? 굴 속에 숨어든 다섯 왕들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여호수아의 해결책은 우선 그들이 숨어 있는 굴 입구를 돌로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입구를 견고히 지키는 것이었다. 굴이나 요새 안으로 숨어든 적들을 끌어내서 제거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우선적으로는 막아 두고 봉쇄해야 한다. 다시는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다시는 우리 안에서 고개를 제멋대로 쳐들지 못하게 완전히 차단하고 감금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약간의 여지도 남겨 놓아서는 안 된다. 잠시라도 그런 적들을 풀어 주거나 자유롭게 활보하도록 놔두게 되면 언젠가는 그것이 세력을 강화하여 우리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다. 이 굴 속에 숨어든 왕들의 수는 "다섯" 명이다. 다섯은 "죽음의 숫자"다. 우리 자신을 파멸시키고 죽일 수 있는 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죄들이 다시는 쏟아져 나오지 못하도록 그 앞에 파수꾼을 세우고 견고히 지켜야 한다.

이렇게 숨어든 적들을 봉쇄한 사이에 아직 숨지 못한 패잔병들을 추격하여 진멸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서 숨지 못했던 남은 적들이 진멸되었다면, 그 다음은 우리가 봉쇄해 놓았던 그 숨은 적들을 처리할 차례다. 『그후 여호수아가 말하기를 "굴의 입구를 열어 그 굴에서 그 다섯 왕을 내게로 끌어내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여 굴에서 그 다섯 왕을 그에게로 끌어내었으니 예루살렘 왕, 헤브론 왕, 야르뭇 왕, 라키스 왕, 에글론 왕이라. 그들이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을 부르고 그와 함께 간 전사들의 대장들에게 말하기를 "가까이 와서 너희 발로 이 왕들의 목을 밟으라." 하니 그들이 가까이 와서 그들의 발로 그 왕들의 목을 밟으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두려워 말고 낙심치 말며 강건하고 담대하라. 이는 주께서 너희가 대적할 모든 너희 원수들에게 이같이 하실 것임이라." 하니라』(22-25절). 왕들의 목을 밟았다는 것은 정복과 승리를 보여 준다. 적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재림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실 것』이다(계 19:15).

이렇게 적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담대함과 자신감을 심어 주었을 것인데, 이는 영적 전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가운데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다만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들처럼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롬 6:12-14). 죄가 우리 위에서 군림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죄 위에서 군림하는가에 영적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죄들을 주님께로 끌고 나와야 한다. 백성들이 이 다섯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냈듯이 우리도 죄들을 주님의 보혈 아래로 가져와 그 아래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 죄를 굴복시키고 그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 또한 우리가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 승리를 맛보았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죄와 싸우는 데 있어서 자신감과 담대함을 더해 줄 것이다. 럭크만 목사는 "성도들이 믿음의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끈덕지게 따라붙고 괴롭히며 해를 끼쳤던 그 죄가 우리의 발밑에 짓밟혀 정복당하는 모습을 볼 때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날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지체들을 죽일 때(골 3:5) 가능한 일이다.

이제 여호수아는 26절에서 그 목을 짓밟은 왕들을 끌어내서 죽이고 나무에 매달았다. 즉 승기를 잡았을 때 완전히 끝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전쟁의 승리는 그것을 완전히 종결지었을 때 얻을 수 있다. 흐지부지하게 끝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승리했다는 자만 속에서 어중간하게 영적 전쟁을 멈춰서는 안 된다. 완전히 진멸시킬 때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놔두면 원수들은 반드시 훗날을 도모할 것이다. 『해질 때에 여호수아가 명하니 군인들이 그들을 나무에서 내려서 그들이 숨어 있던 굴 속으로 던지고 그 굴 입구를 큰 돌로 막았더니 그것이 바로 오늘까지 남아 있더라』(27절). 이것이 바로 기브온 전쟁의 완전한 종지부를 찍는 말씀이다.

자,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대적(마귀, 세상, 육신) 가운데 하나인 "육신과의 싸움," 이 육신을 거점으로 공격해 오는 죄와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종결되지 않은 싸움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구속될 때까지 지속해야 할 싸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로 입대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싸움을 지속해야 하는 영적인 군인들이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죄와의 싸움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우리 역시 죄와의 싸움을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맹세하신(출 17:16, 아말렉은 영적으로 육신을 나타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육신과의 싸움을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실 때까지는 우리 임의로 전쟁의 종지부를 찍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스라엘 역시 기브온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카나안 전쟁이 끝난 게 아니었다. 이에 여호수아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백성들을 이끌고 카나안 남부 지역을 정벌하러 출정하게 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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