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부흥의 깃발 분류

부흥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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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11월호>

부흥은 위대한 역사다. 부흥은 위대하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일어나는 역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이룩한 “위대한 부흥”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할 때 부흥은 멈춰 버린다. 부흥을 추진하는 데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에 도취되어 교만에 빠지면 부흥은 그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부흥이 있을 때면 거의 항상 수반되는 일이 있는데, 바로 너무나도 교만하거나 세상적이어서 그 사역의 어떤 부분도 맡을 수 없는 사람들이 수면 위로 부각되는 일이다. 사실 그들은 “멀리 떨어져서 저들이 하겠다고 하는 그 일들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지켜나 보자.”라고 마음을 굳힌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품은 교만으로 인해 부흥이 멈추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부흥이 일어나느냐 지속되느냐의 여부는 팔짱을 끼고 관망하거나 옆에 와서 쓸데없는 참견이나 하는 사람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팔짱을 끼고서 상황을 관망하는 가운데 트집거리를 찾아내는 일 외에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역은 그러한 일을 개의치 않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여전히 멈추지 않고 진척된다.

- 교만 -


교회에서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뤄 낸 부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또 자신들이 얼마나 애쓰고 기도했는지, 얼마나 담대하고 열정적이었는지, 또 얼마나 선한 일을 이뤄 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사역은 기울고 말 것이다.


가령 신문들이 어떤 교회에서 얼마나 대단한 부흥이 있었으며 어떻게 회원들이 늘어났는지를 보도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찰스 피니가 사역하던 시대에는 교회의 부흥이 신문에 보도되곤 했다 - 편집자 주). 그러면 그 교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뤄 낸 그 “대단한” 부흥으로 인해 이 땅의 다른 모든 교회들이 자신들을 얼마나 높게 사 줄지에 대해 생각하게끔 된다. 그들이 이렇게 우쭐해져서 허영심을 품어 버리면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향유할 수 없다. 성령님께서 떠나 버리시고, 부흥은 끝나게 된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성령님께서는 부흥에 대해 뽐내는 영으로 인해 슬퍼하실 수 있다. 우리는 때로 부흥이 시작되자마자 신문에 광고가 난 것을 보곤 한다. 그러면 대개 부흥이 죽어 버린다. 이런 경우가 부흥이 시작되었던 이웃 주(州)에서 있었다. 부흥이 시작되자 사역을 담당하던 목사가 즉시로 부흥회에 대한 홍보 문구를 낸 것이다. 나는 그 글을 보고서 “이게 우리가 이 부흥에 대해 마지막으로 듣는 것이겠군.”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역이 끝나고 만 것이다. 그러한 광고를 내고서 교회가 우쭐해지고, 관련된 사람들이 너무도 교만해진 까닭에 부흥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이와 유사한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 사랑의 결여와 선입견 -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사랑의 영을 잃어버리면 부흥은 멈추곤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형제 사랑 안에서 행하기를 그친 사람들의 부흥에는 더 이상 함께해 주지 않으신다. 우리가 부흥의 영 속에 있을 때면 이러한 사랑이 느껴진다. 이때에 우리의 귀에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형제,” “자매”라고 매우 애정을 담아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사람들이 슬슬 차가워지기 시작하면 서로 간에 그러한 애정을 잃어버리고, 그에 따라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게 된다. 몇몇 교회들에서는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흥이 있는 곳에서는 그러한 호칭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또한 어떤 교파에 속해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수많은 교인들이 어떤 문제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선입견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바른 말씀이 제시되어도 그에 대해 읽거나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정신 상태로는 기도를 할 수가 없다. 사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당면하는 문제들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지 기도의 영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빛이 비친 적이 없다면, 그러한 점에 있어서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기도의 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빛이 있는데도 오기를 거부한 사람이라면 기도할 수 없다.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 개개인, 또는 교회 전체가 그러한 점에 있어서 진리에 항거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부흥이 일어나거나 그들이 성경적인 부흥을 이루어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일관성 없는 사역 -


사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한 사역자가 사역을 오랫동안 인도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교회에 방문한 사역자에게 그에 대한 호의로 강단을 넘겨주는 일이 생기곤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복을 가져오지 못한다. 이유는 자명하다. 그 사람들이 기존의 사역에 참여하기에 적합한 마음을 준비해서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중의 내적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어떤 설교를 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병중에 있는 어떤 사람이 매일 다른 의사를 부른다고 생각해 보라. 그 의사들 가운데에는 질병의 증상이 어떠했는지, 진료나 치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어떤 치료법이 효과적이었으며 환자가 어느 정도까지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환자는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어떤 모임을 여러 명의 사역자들이 승계해 가면서 맡는 것은 그 모임에 해로울 수 있다. 그 사역자들 중에는 모인 사람들과 동일한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대개 좋은 영향보다는 해를 더 많이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 시대에 맞지 않는 설교 -


오늘날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마음을 휘젓는 설교가 전보다 더 많이 필요하다. 이 점은 대개 사역을 하다 보면 점차 알게 되는 사실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그들의 말마따나 “새로운 기준” 탓이라고 불평한다. 새로운 기준들이 사람들의 입맛을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세대의 특성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역자들이 반세기 전에나 효과적이었던 진부한 설교 양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그러한 문제의 핵심이다.
초기 감리교도들을 보라. 감리교 사역자들은 점포나 농장에서 일하다가 사역에 투입된 사람들이었지만, 어디에서나 회중들을 모으고 혼들을 이겨왔다. 어디로 가든지 평범하고 신랄하고 단순한 설교로, 그러나 진심이 담긴 역동적인 설교로 언제나 회중들이 모여들게 했다. 우리의 설교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설교자라 할지라도 진지하게 설교하고 청중의 마음에 불을 지필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주변에 회중들을 모을 수 있다.

- 기계적인 사역 -


부흥을 진척시키고자 할 때 기계적으로 일하면 부흥은 끝나 버린다. 사역자들의 믿음이 굳세고, 그들의 마음이 열정으로 무르익었으며, 거룩함으로 충만하게 되어 기도하고, 그 말들에 능력이 있었을 때에는 사역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기도가 차갑고 감정 없이 드려지기 시작하면, 즉 그들이 기계적으로 수고하며 감정 없이 말하기 시작하면 부흥은 끝나게 된다.
교회가 계속해서 기계적으로 사역함으로써 점차 지치게 되면 부흥은 멈춘다.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의 때에 이 부분에서 큰 실수를 한다. 그들은 너무나도 생각 없이, 너무나도 미흡한 사리판단으로 자기 스스로 삶의 모든 습관들을 깨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적절한 식사나 잘 시간까지도 무시한 채 모든 즐거움을 스스로에게서 달아나 버리게 하는데, 그 결과 그들의 몸은 과로로 인해 금방 지쳐 버린다. 그러면 더 이상 사역을 지속할 수가 없다. 부흥은 종종 그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 중의 일부가 이러한 면에 있어서 무심하고 경솔하게 행함으로써 끝나곤 한다.

- 쇄신하지 않음 -


반복적으로 쇄신하지 않는다면 부흥은 쇠락하거나 멈출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부흥의 영을 가지려면 주기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계속해서 쇄신해야 한다는 개념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심지어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마음은 그 표면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한 고상한 열망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주님의 기름부음과 능력을 역사하게 하는 기도가 사라져 가면 반드시 다시 쇄신해야 한다.


그러한 영적 상태를 유지하려면 며칠에 한 번씩은 이러한 쇄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역을 계속하고 싶어 하며 부흥 사역을 담당하기에 적합하도록 갖춰지고 싶어 하는 어떤 사람이 그러한 회개의 과정을 2,3주에 한 번씩 거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사람과는 결코 함께 부흥 사역에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부흥을 방해하는 요소는 “복음 전파 사역”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자기들의 교회에만 관심을 한정한 채로 선교 소식지조차 읽지 않고, 복음 전파 사역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하라고 하신 가장 기본적인 명령조차 실행하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 그런 교회와 회중으로부터 떠나가 버리신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복음 전파는 교회가 부흥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실행해야 할 하늘의 과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