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부흥의 깃발 분류

참된 기도의 능력을 발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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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10월호>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다.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것은 “기도”이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진리”이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동을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 바뀐다거나 그분의 의도와 성품이 바뀐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일이 그분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모순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의지를 일치시키는 일”이다.


어떤 죄인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는 것이 지당한 일이 되도록 해 주는 요소는 회개하는 그 당사자의 “마음의 상태”다. 그 마음이 진실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그 사람을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러므로 죄인이 “마음을 돌이켜” 진실로 회개하는 한, 하나님 편에서는 그를 용서하시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분께서 합당한 용서를 베푸시게 만드는 것은 죄인의 “진실한 마음의 회개”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보셨을 때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가 하나님의 생각을 바꾼다고 말할 만큼 “기도의 능력”을 잘못 강조하는 실수는 범하지 않는다 해도, 기도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무관하게 계속 헛되이 드려지면 기도를 통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해 버린다.

많은 사람이 “기도하려고” 홀로 골방으로 들어가지만, 대부분은 그저 습관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들이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동안, 날은 이미 밝아 온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또 어떤 시간이 되었든지 간에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다시 말해 어떤 말을 아뢰어야겠다고 정해 놓거나 기도해야 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릎을 꿇고 막연하게 떠오르는 생각 속으로 뭐라도 흘러들어 오면 그것을 붙잡고 기도할 뿐이다. 기도를 마친 후에는 무엇을 기도했는지조차 거의 기억할 수 없다. 이런 기도는 아무 효과도 없다!


효과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응답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자세로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순종”을 어떻게 응답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무관심”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흥 집회에 참석한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냉담한 사람이었으며, “기도의 영” 가운데 있지 않았다. 그는 주위의 다른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요청을 절대로 거절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의 믿음과 담대함”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그는 순종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이따금 순종과 무관심을 혼동했던 것이다.


기도는 하지 않고 순종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고 순종만 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는 바로 그 시간에 무슨 일이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당신에게 완고한 친구 하나가 있는데, 바로 지금 당신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그가 구원받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열쇠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열렬하고 담대한 기도”를 통해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되고, 주님께로부터 풍성한 복을 얻게 된다. 내가 알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 이런 “기도의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기도할 때 “이기적인 동기”는 매우 강력한 유혹이 된다. 이런 까닭에 많은 부모가 자기들의 자녀들을 위해 열렬하고 간절하게 구해도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 이런 점을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왜 그렇게 많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가에 관한 이유일 뿐만 아니라, 왜 그렇게 신실하게 기도하는 많은 부모의 슬하에 불경건한 자녀들이 있는가에 관한 이유이기도 하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그 동기를 “동정심”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선교사 대부분이 지옥을 향해 가는 죄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기도만 하려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말하자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열렬히 기도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오랫동안 씨름하면서 기도한다. 그러다 보면 “생각”이 점차 어떤 것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채워지는데, 결국 자기들이 바라는 바를 깊은 신음과 더불어 하나님께 털어놓는다. 이것은 마치 중병에 걸린 자녀를 둔 어머니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계속 신음하는 것과 같다. 만일 그녀가 기도하는 어머니라면 그녀는 온종일 하나님께 혼을 토로할 것이다. 아이가 쉬고 있는 방을 떠날 때도 생각은 여전히 아이에게로 향해 있고, 잠이 든 순간에도 생각은 여전히 아이에게로 향해 있다. 심지어 잠을 자다가도 ‘혹시 아이가 죽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 그녀의 모든 생각이 몸이 아픈 아이에게 온통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릴 때의 상태가 바로 이와 같다. 모든 생각이 기도하는 그 “대상”에 몰입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이의 혼을 위해 비탄에 잠긴 사람들의 영은 사도 바울의 영과 유사하다. 바울은 그런 혼들을 위해 사역했고, 다른 이의 혼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랐을 정도였다(롬 9:1-3).
시편 기록자도 이런 마음으로 그런 자들을 염려하며 기도했다. 『주의 법을 버린 악인들로 인하여 공포가 나를 붙들었나이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강물들이 내 눈에서 흘러내리나이다』(시 119:53,136).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죄들로 인해 엄청난 슬픔을 호소했다. 『나의 창자여, 나의 창자여! 바로 내 마음이 아프고 내 마음이 내 안에서 요란하여 내가 잠잠할 수 없으니 오 나의 혼아, 이는 네가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고를 들었음이라』(렘 4:19).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한 멸망으로 향해 가는 죄인들의 불쌍한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큰 소리로 우는 성도를 과연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겠는가?
어떤 혼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이러한 산고를 겪는 것은, 뜨거운 사랑을 가진 그리스도인들과 이제 막 구원받은 성도들 사이에 남다른 유대감을 형성시켜 준다. 갓 회심한 성도들은 자신들을 위해 이러한 영으로 기도했던 성도들을 향해 매우 각별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의 마음은 마치 어머니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 바울은 이런 감정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내가 다시 산고를 치르노라』(갈 4:19). 당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실족한 상태였고, 사도 바울은 방황하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로서의 고뇌를 모두 겪어야 했다. 부흥이 일어날 때면, 기도의 영을 가진 신실한 성도들이 이제 갓 회심한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구나 인지할 수 있게끔 드러나곤 한다. 이러한 사랑을 결코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여기에 쓴 글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종류의 기도를 요구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할 때 교회가 타격을 입지 않고 큰 복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준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티끌을 뒤집어쓴 채 깊은 고뇌의 기도 속에 있다면 복을 받는 그 순간에도 별 탈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가 혼의 깊은 겸손 가운데 있지 않으면 그런 복을 받을 때 교만으로 으쓱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에 있어서 “올바른 태도”를 갖추고 있어야 교회는 거룩함과 사랑과 겸손함 가운데 계속 성장할 수 있다.

어떤 사역자가 다년간 부흥이 없었던 어떤 마을에 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그 마을에 있던 교회는 활력이 거의 없었고,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했으며, 끝없는 황량함만이 그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 외딴곳에 말을 듣고 있기가 고통스러울 만큼 말을 심하게 더듬는 나이 많은 “대장장이” 하나가 살고 있었다. 어느 금요일에 홀로 대장간에서 일하고 있었던 그는 교회와 회개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마음이 매우 크게 요동쳤다. 고뇌가 극심하게 커지자, 그는 그날 해야 할 모든 일을 제쳐 두고 가게 문도 닫고는 오후 시간 내내 기도하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티끌을 뒤집어쓴 채 깊은 겸손과 고뇌 속에서 주님께 기도하는 교회는 거룩함과 사랑과 겸손함 가운데 성장하게 된다.

그는 해가 저물도록 계속해서 기도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교회의 사역자에게 집회를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망설이던 사역자는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염려가 되었지만, 그의 요구를 승낙해 주었다. 그날 저녁 어떤 큰 가정집에서 모임이 개최되었는데, 그 집에 다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운집했다. 모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중 한 죄인이 눈물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기도해 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뒤이어 또 다른 사람이 그렇게 부탁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계속 연이어 부탁했으니, 그 집에 온 모든 사람이 양심에 깊은 찔림을 받기에 이르렀다. 놀랄 만한 일이 또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이 언제 그러한 찔림을 받기 시작했는가를 돌이켜 보니 모두 다 그 나이 든 대장장이가 기도하던 바로 그 시각부터였다. 이로써 강력한 부흥이 뒤따랐다! “말더듬이 노인”의 열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그야말로 그 노인은 『통치자로서 하나님과 사람들과 더불어 겨루어』(창 32:28) 이긴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