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부흥의 깃발 분류

지금은 부흥을 바라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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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2월호>

약 200년 전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미국의 영적 판도를 뒤흔들었던 위대한 부흥사이자 설교자인 찰스 G. 피니의 글을 소개하기에 앞서, “부흥”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부터 바로잡으려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는 영어 단어 “revival”의 번역으로 “부흥” 또는 “부흥 집회”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의 본래 뜻은 “다시 살아남, 다시 살아나게 함”이다. 바르게 보존된 <한글킹제임스성경>도 “revive”란 단어를 “다시 살다”(롬 14:9), “소생케 하다”(합 3:2), “되살아나다”(호 14:7) 등으로 번역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무생물인 기업체나 나라에 어울릴 법한 “부흥”이라는 단어가 생명과 관련된 “revival”의 번역으로 쓰인 것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다. 필시 한국 기독교 초기에 “사람 수가 물리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에만 집착하여 내놓은 졸속한 번역이 굳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독자들께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본 글을 읽기 바란다. 즉 진정한 “부흥”은 “교회에 사람 수가 늘어나는 일”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력이 다시금 넘치게 되는 일”을 의미한다는 점을 말이다.
마치 시체처럼 잠자던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나고(롬 13:11-14), 그렇게 각성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몸을 통해 나타내며(고후 4:11),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넘치는 활기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죽은 영을 살아나게 하는 것(엡 2:1-5),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흥”(revival)인 것이다[역자 주].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지옥의 불길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깨어 기도하는 것이다. 지금은 부흥을 바라야 할 때이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어 주의 백성들로 주를 기뻐하게 하지 않으시겠나이까?』(시 85:6) 믿는 성도들에게 형제 사랑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감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럴 때야말로 “부흥”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럴 때면 그분의 일을 소생시켜 달라는 하나님을 향한 요청이 크게 울리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불화, 시기, 악한 소문 등이 있을 때면 부흥을 바라야 한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엇나가서 계속 멀어져 버린 사실과 이미 부흥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징후들이다.


“부흥”은 교회 내에 세상적인 영이 가득 찼을 때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옷차림, 사교 모임, 세상적인 유희를 추구하는 것, 상스러운 소설들을 읽는 것 등에 있어서 세상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교회는 지금 타락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지체들이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죄들에 빠져든 것을 알았다면, 그때는 일어나서 하나님께 신앙을 소생시켜 달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소홀하지 않았는가?


죄인들이 부주의하고 어리석을 때면,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임무를 개시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과 관련하여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은, 불이 났을 때 소방관들이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만큼이나 막중한 의무이다. 교회는 악인들을 삼키고 있는 지옥의 불길을 진화해야 한다.
잠들어 버렸는가? 소방관들은 잠이 들어서 도시 전체가 불타 버리도록 내버려 두어도 되는가? 그런 소방관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소방관들의 죄는, 자기 주변에 있는 죄인들이 지옥의 불길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데도 잠이 들어 버린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비할 바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부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사실보다 더 크게 책망받아 마땅하다.

교회의 생명력


이러한 의무와 행보에 있어서 쇠락하는 교회는 부흥 없이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설령 교회가 새로운 회원들을 맞아들인다고 해도, 그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경건치 못한 사람들이 되어 버릴 것이다.


부흥이 없다면, 매년 회심하는 사람들의 수가 매년 죽는 사람들의 수만큼도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는 모든 회원이 죽어서 사라져 버린 교회들이 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회심시켜서 그들의 빈자리를 채울 만한 어떤 부흥도 없었기에, 그 교회는 서서히 죽어 갔고 모임은 해체되어 버린 것이다.
부흥이 없다면, 죄인들이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다 해도 그들은 계속해서 완고해질 것이다. 사람들을 회심시킬 만한 어떠한 부흥도 없다면, 당신의 아이들과 친구들은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은혜가 베풀어질 만한 계기도, 교회도, 성경도 그리고 설교도 없는 편이, 그들이 부흥이 없는 지역에서 살다가 죽는 것보다 더 나을지 모른다.


어떤 지역 교회가 성화되고, 은혜 안에서 자라나며, 천상을 위해 준비되는 데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은혜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 무엇인가? 설교를 듣고 신앙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 몇 개를 배우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런 것들 외에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더더욱 완고해지기만 할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을 일깨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른다.

부흥을 위한 기도의 영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을 위한 기도의 영”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부흥을 기대할 수 있다. 기도하는 그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자기들의 마음이 “부흥에 완전히 매여 있는 것처럼” 기도한다면 말이다.


기도의 영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열렬한 말들과 많은 기도들인가? 아니다! “기도의 영”은 “마음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계속 열망하는 상태이며, 심지어 사람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 심리적으로 보면 마치 사람이 세상적인 흥밋거리에 관심을 가질 때 보이는 상태와 비슷하다.
이런 기도의 영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혼들에 관해 관심을 가진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생각 속에는 언제나 혼들이 있는 것이다. 그는 낮이면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밤이면 그들이 나오는 꿈을 꾼다. 『쉬지 말고 기도』(살전 5:17)한다는 것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의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는 그의 마음에서 물처럼 흘러나와 『오 주여... 주의 일을 소생케 하소서.』(합 3:2)라는 말씀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대부분 감정의 깊이가 매우 깊다.


이러한 깊은 감정은 어떤 면에서도 “광신”과 전혀 무관하다. 이것은 바울이 “산고를 치렀다”(갈 4:19)고 말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다. 혼들에 대한 이러한 산고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붙잡고 복을 구하면서 그 복을 받을 때까지 그분을 놓아드리지 않을 때 느끼는 고뇌처럼 매우 깊다. 기도의 영을 갖는 데 있어서 이렇게 깊은 고뇌가 필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부흥에 필요한 기도의 영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깊고 지속적인 신실한 열망에서 비롯된다.

자백, 희생, 결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죄들을 서로에게 시인하기 시작했을 때 부흥은 가까이 다가온다. 흔히 사람들은 뭉뚱그려서 전심을 다 하지 않은 채 죄들을 자백한다. 혹여 감동적인 말들을 사용할지 모르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죄들을 자백할 때 진정으로 마음이 깨지고 쏟아져 나오면, 수문은 곧 터져 열리게 되고 구원이 곳곳에서 넘쳐흐르게 될 것이다.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부흥을 감당해 내는 데 있어서 희생제물들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 우리는 부흥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감정, 사업, 시간 등을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일에 희생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그들의 활동 범위를 확장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반드시 꾸밈없고 신실하고 진실한 말로 완고한 사람들을 언짢게 하는 것을 기뻐해야 하며, 어쩌면 언짢은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을 지역 교회 안의 수많은 사람을 향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부흥에 관한 한 견고한 입장을 취해야 하고, 자신이 취한 그 견고한 입장이 가져올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교회 안의 완고하고 냉랭한 회원들의 애정을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 일을 계속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어서 자신의 사역지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해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반드시 대쪽같이 나아갈 것을 확고히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결심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모든 결과는 주님의 손에 맡긴 채로 말이다.

나는 한 청년과 함께 “부흥 사역”을 하던 목사 한 명을 알고 있다. 그 청년은 꾸밈없이 진리를 설교했고, 악한 회원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이러했다. “우리는 우리 목사님을 좋아하니까, 그 청년이 설교하는 것은 듣고 싶지 않군요.” 결국 불평이 쏟아지자 목사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통보했다. “교회의 사역에 대단히 많은 돈을 지원하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자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여러 말들을 늘어놓고 있다네. A 형제도 그렇고, B 형제도 그렇더군. 그 사람들은 자네가 계속해서 설교하면 교회가 분열될 것으로 생각한다네. 그러니 내 생각에는 자네가 이 교회에서 더 이상 설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사역자들은 부흥에 관한 한 견고한 입장을 취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대쪽같이 나아가야 한다.

그 청년은 떠나 버렸지만, 그 결과는 그 목사의 기대와 아주 달랐다. 하나님의 영께서 즉시 그곳에서 철수하셨고 부흥이 멈춰 버렸다. 그 목사는 불경건한 자들의 악한 열망에 한발 양보함으로써 성령님을 교회에서 몰아내 버린 것이다. 그 사역자는 혹시라도 마귀가 자신의 양 무리로부터 자신을 몰아내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런 식으로 마귀를 만족시켜 줌으로써 그는 하나님을 언짢게 해 드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 사건들을 일으키셨고, 결국에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목사도 그의 양 무리를 떠나도록 만드셨다. 그 사역자는 마귀와 하나님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사역해 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해고해 버리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