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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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예루살렘/유대 사역 (2) - 장막절에 예루살렘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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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9월호>

#115 [ A.D. 29년· 유대 베다니 · 마 / 막 / 눅 10:38-42 / 요 ] 마르다가 주님을 섬기는 데 동생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한 것에 대해 주님께서 답변하셨다.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유대로 오신 예수님께서 유대 지경에서 무리를 가르치고 고쳐주셨는데(#109-114 항목), 이제 본문에서 유대 베다니에 오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지도 - "후기 예루살렘/유대 사역" 참조). 누가복은 10:38의 "어떤 마을"은 마르다가 사는 베다니였으며(요 12:1), 주님께서 오시자 마르다는 자기 집으로 영접했고,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들었으나, 마르다는 접대하는 일이 많아서 경황이 없었다. 마르다는 주님께 마리아가 자신만 접대하는 일을 하게 하고 돕지 않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자, 마르다가 수고하고 있으나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했으니 그것을 빼앗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는 좋은 일을 선택한 사람에게 다른 일을 하라고 권고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원하여 선택할 것을 존중하되 특히 그것이 말씀과 연관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한다.

#116 [ A.D. 29년 9-10월 · 예루살렘 · 마 / 막 / 눅 / 요 7:10-13 ] 장막절에 드러내지 않고 비밀리에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 기록상의 차이가 많이 나는데, 후기 예루살렘/유대 사역의 시작 부분에 대한 기록도 그렇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으로 오시고 그곳에서 가르치신 것은 다루지 않고 있다. 반면 갈릴리에서 주님의 형제들이 장막절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제안한 것에 대해 거부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으나(요 7:1-9), 장막절이 되자 예루살렘에 가신 것부터 다루고 있다. 요한복음은 주님의 형제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간 후, 주님께서도 명절에 가셨으나 드러내지 아니하고 비밀리에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요 7:10). 따라서 요한복음 7:9과 7:10 사이에는 앞서 살펴보았던 #109-115 항목의 행적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를 원치 않으셨다. (장막절은 9-10월에 있는 명절인데, 교리적이고 예언적으로 보면 장막절은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초림하신 때이며 또 앞으로 재림하실 때이기도 하다.) 당시의 장막절에 예수님께서 "드러내지 않고 비밀리에" 가신 것은 대환란이 끝나기 직전에 있게 될 일종의 휴거 때를 암시하는 것으로, 장막절 이전 대환란 성도들의 "환란 후 휴거"를 위해 주님께서 대환란이 끝나기 직전 은밀히 나타나시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계 10장).
요한복음 7:11-13은 장막절에 유대인들이 주님을 찾았고, 무리들이 주님에 관해 수군거렸으며 서로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무리들은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을 두려워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믿음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유대교의 체제에서나 현재의 교단 체제에서나 마찬가지다.

#117 [ A.D. 29년 9-10월 · 예루살렘 성전 · 마 / 막 / 눅 / 요 7:14-31 ] 장막절 중간쯤 되었을 때, 성전으로 올라가 가르치셨다.
장막절의 중간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성전으로 올라가 가르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교리에 놀랐다(15-17절). 그들은 『이 사람은 전혀 배운 적이 없는데 어떻게 글을 아는가?』라고 말했는데(15절), 이는 자신들에게서 성경을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아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소위 제도권 안에 들어와 그들의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성경을 아는 것에 대해 놀랐던 것이다. 나중에 사도행전에 보면 유대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는 것을 보고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로 알았다가 놀라게 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에 유대인들은 이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행 4:13).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상황에 종종 놓이게 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워하는 유대인들에게 『"나의 교리는 나의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리라.』(요 7:16,17)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교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깨닫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그들의 배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아시고(출 20:13) 그것을 말씀하자 그들은 예수님을 마귀들렸다고 말했다(20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의도가 정면으로 지적받자 예수님을 비방하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이런 그들의 의도는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25절). 요한복음 5장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을 트집잡았고, 또 죽이려고 모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으셨다. 할례는 모세의 율법 이전부터 행해져 내려왔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표였지, 모세로부터 기원된 율법의 규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할례를 모세의 율법과 연관지어 생각하여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이 할례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안식일에도 행했는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하신 것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마가복음 3:4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나 생명을 구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말씀하셨고, 유대인들은 대꾸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요한복음 7장에서도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예루살렘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대인들, 관원들로 불리는 종교지도자들보다 더 잘 안다고 착각하며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 어디서 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으나(27절)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미 5:2, 마 2:4-6). 이들도 성경에 무지하면서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을 판단하고 있으며,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셨으나 아무도 주님을 붙잡거나 제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아직 주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30절). 십자가의 고난은 아직 약 6개월 후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던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었고, 『그리스도가 온다 해도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은 기적을 행하시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31절).

#118 [ A.D. 29년 9-10월 · 예루살렘 성전 · 마 / 막 / 눅 / 요 7:37-53 ] 장막절의 가장 큰 날인 마지막 날에 자신을 "믿는 자"에게 주실 성령님에 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장막절의 마지막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아주 특별한 말씀을 하셨다(37,38절). 이것은 주님께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직 성령을 주지 않으신 시점이었다(39절).
이 말씀으로 인해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 분열이 일어났다(40-44절). 즉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가 오리라는 예언에 따라(신 18:15) 오신 바로 "그 선지자"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씨이며,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알고 있었다(41,42절). 무리 중에는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 무리 가운데 있던 경비병들이 그때 선임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을 붙잡아 오지 못한 것을 보고하자 소위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경비병들에게 왜 붙잡을 수 없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경비병들은 『"이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아직껏 아무도 없었나이다."』(46절)라고 말했는데, 최소한 이들은 범상치 않은 예수님의 언행으로 인해 그분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말에 대해 『"너희 역시 미혹된 것이 아니냐? 관원들이나 바리새인들 가운데 어느 누가 그를 믿은 적이 있느냐? 그러나 율법을 모르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47-49절).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통해 그분을 알았으나, 자신들의 종교적 입지를 지키려고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경비병들에게는 그들이 미혹된 것이라고 몰아세우며 관원들과 바리새인들 중에 누가 믿은 적이 있느냐, 또 율법을 모르고 미혹된 무리가 저주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말들은 모두 거짓일 뿐이며, 모두 육신적인 대응이었을 뿐이다. 요한복음 12:42에 따르면, 상급관원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으나 바리새인들 때문에 주님을 시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주님을 시인하면 회당에서 출회당하기 때문이었다. 또 율법을 모르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아는 자들이 율법을 통해 죄를 알고, 율법이 정죄하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쟁이 있을 때, 요한복음 3장에서 주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을 설득했다. 그의 설득은 율법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준 것이었다. 즉 율법은 당사자로부터 들어 보고 그가 하는 일을 알아 보기 전에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모임을 끝내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50-53절). 니코데모는 필요한 때에 율법을 제시함으로써 주님에 대해 살기를 가진 자들을 해산시켰다. 비록 니코데모는 "너도 갈릴리 출신이냐"고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미약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로 주님의 편에 서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는 공개적으로 주님을 시인했다. BB

복음서와 그리스도의 생애 18 /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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