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마귀의 이름들 분류

죽음의 세력을 가진 멸망시키는 자, 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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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12월호>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며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함이니라』(히 2:14,15).

출애굽 사건 당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집의 출입구에 바르지 않으면 그 집의 첫태생이 죽는 끔찍한 경험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부분을 주의 깊게 읽다 보면, 그 집행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첫태생을죽이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주께서 이집트인들을 치려고 두루 다니시리니 문 인방과 양쪽 기둥에피를 보시면 주께서 그 문을 지나치실 것이며 멸망시키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것임이니라』(출 12:23).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죽음”에 관한 임무를 위임할 한 종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이집트 전역을두루 다니시다가,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을 보시면 그 종으로 하여금 임무를 수행토록 하신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멸망시키는 자』였는데, 주님께서는 출애굽 이후에 이 『멸망시키는 자』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시기도하셨다(고전 10:10). 이 이름은 끝없이 깊은 구렁의 천사의 이름이며, 헬라어로 “아폴루온”(계 9:11)이라 불리는그자는 그 이름의 뜻이 “멸망시키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첫태생을 치실 때 데리고 다니셨던 종은 가브리엘이나 미카엘 같은“천사”가 아니라 바로 “사탄”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립 구도에만 익숙한 이들에게는 두 존재가 “함께,” “공동의 목적”을 이루는 장면이 어색해 보일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대상 29:11), 그분께서 사탄을 사용하셔서 무언가를이루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셋째 하늘의 하나님 보좌 앞에는 때로 사탄이 등장하기도 한다(욥 1:6-12;2:1-7). 제아무리 사탄이 그 몸뚱이를 움직이면 우주적인 규모의 일들이 벌어질 만큼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욥41장),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한갓 피조물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하라고, 혹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잠자코 따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비록 사탄 자신 안에서 만군의 주에 대한 시기와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을지라도 어쨌거나표면적으로는 그러하다. 다만 주 하나님 앞에 선 사탄의 세력들에게 전혀 발언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아래에서 무엇인가를 간청하기도 하고(막 5:7,12) 제안하기도 한다(욥 1:11; 2:5).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기도의 응답”으로 사탄에게 그가 쾌재를 부르며 할 만한 일을 허락해 주시거나 명령하시기도 한다. 예컨대 하나님께서는죽음의 세력을 사탄에게 넘겨주셔서 그분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범주 내에서는 그 권한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하셨다.사탄은 “멸망” 그 자체이기도 한데(살후 2:3-10,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듯, 사탄이 육화된 적그리스도는“멸망”의 아들이다), 멸망은 끝없이 깊은 구렁의 천사의 히브리어 이름인 “아바돈”(계 9:11)의 뜻과 일치한다(욥26:6; 28:22; 31:12, 시 88:11, 잠 15:11 등에서 “멸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아바돈”이다). 즉 장차 멸망의 아들로(살후 2:3) 인격화되어 나타날 사탄은 인류의 파멸을 위해 “사역”하고 있는것이다.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말년에 이스라엘을 계수하는 죄를 범하였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신하나님께서 다윗을 움직이시어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한 역대기상 21장에서는“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나 다윗을 충동했다고 말씀한다. 이를 통해 셋째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유추해 보자면대략 이럴 것이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은밀한 죄들을 늘어놓자, 하나님께서는이스라엘에게 분노하셔서 사탄에게 그들이 큰 벌을 받을 만한 계기를 만들라고 하셨다. 그 명령을 받은 사탄은 다윗의 마음에있던 교만을 비집고 들어가 이러한 말로 충동질했다. “네 군대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헤아려 보고 싶지 않아?” 하늘에서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까맣게 몰랐던 다윗이 자기 마음에 들어온 생각을 그대로 실행으로 옮겨 버렸고, 하나님께서는 그일을 계기로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강렬한 분노와 징계를 내보이셔서 칠만 명의 사람들이 죽도록 하셨다. 사탄은 아마도다음과 같이 다윗과 이스라엘을 걸어서 고소했을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고법칙을 정하지 않으셨습니까?(눅 14:11) 바로 그 법칙에 따라 저를 낮추지 않으셨습니까?(사 14:12-14) 법앞에 누구나 평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과 다윗은 지금 마음이 교만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낮추어짐이 마땅합니다!”주님께서는 그 말이 옳다고 판결하셨고, 사탄을 사용하셔서 다윗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 한번 그들의 하나님앞에 겸손해지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는 영적 전쟁에 대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른 각도의 조명을 준다. 사실 하나님의 진영과사탄의 진영 사이에는 명백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제아무리 사탄이 뛰어나다고 해도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여그분의 뜻을 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지혜나 명철이나 도모도 주를 대적할 수 없느니라』(잠 21:30).그렇다면 어째서 두 진영 간에 “전쟁”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사탄이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우회적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도 죽게 되는 것을 “직접적으로는” 원치 않으시지만(겔 33:11), 어떤 사람이 “죽을 만한일”을 저질렀다면 공의에 따라 심판하셔야 한다. 우리는 발라암의 계략(민 31:16)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탄의 전략을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발라암이 이스라엘을 직접적으로 저주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그러나 그의 “고용주”는 어떻게든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었다. 이에 발라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기막힌 “아이디어”를 도출해 냈다. 그렇게 설치된 우상 숭배와 음행의 덫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휘말려 버렸고, 하나님께서는그들을 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롬 6:23).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소송을 제기하는 존재가 아무리 사악하더라도 그 말의 옳고 그름에 따라 재판하셔야 한다. 이시대에도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교회 내에서 간증을 파괴할 만한 죄를 드러나게 지었다면그러한 사람은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몸이 파멸당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고전 5:5). 물론 그 사람이구원받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인해 지옥에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탄은 자신에게 속한 죽음의 권세를 죄를지은 그 성도에게 발휘하여, 그가 더 이상 지상에서 어떤 선한 일도 하지 못하게 그 육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슬퍼하시는 일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보셨을 때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주님의 직접적인 뜻이 꺾이고 대신 사망과 파멸이 공의로 세워져야 하는 까닭에 슬퍼하셨다. 죽음의이면에는 죽음의 세력을 가진 사탄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비통해 하셨던 것이다. 지금 이시대에도 때로 창조주께서는 동일한 이유 때문에 때때로 슬퍼하신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말이다. 『하나님의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우리는 이러한진리를 곱십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사탄의 계략을 분쇄시키며 영적 전쟁에의 투지를 불태울 줄 알아야 한다.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창조주의 눈에서 눈물이 두 번 다시는 떨어지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존재들인 우리가 감히 그분께 슬픔을 안겨 드려서야 되겠는가!

주님께서 사탄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죄로 인해 악한 일을 당하도록 하실 때, 그것이 반드시 위와 같은 인과 관계에 의해서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시고 사람을 괴롭게 하셔야 할 때도 종종 사탄에게 그 일을 위임하시기때문이다. 심지어는 사도인 바울에게 주어졌던 질병 또한 “사탄의 사자”라고 불렸다(고후 12:7). 바울에게 사탄의사자가 주어진 이유는 그에게 주어졌던 계시들이 너무나도 풍성해서 그가 자칫 교만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이처럼 사람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지도하실 때 사탄을 사용하시기도 한다. 모세가 지녔던 막대기, 곧 “하나님의막대기”(출 4:20)가 “뱀”으로 변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진리에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적그리스도의예표가 되는 시스라, 산헤립, 느부캇넷살 등의 인물들, 곧 이스라엘을 괴롭힌 군대의 수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보내신“진노의 막대기”였다(사 10:5, 애 3:1). 이와 관련하여 벌어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는데, 이는 “양과목자”의 관계를 노래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받는 시편 23편에도 “위로를 주는 주의 막대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그런데 이 위로의 막대기가 바로 “사탄”이다(욥 9:34, 사 10:5). 따라서 구원의 확신도 없는 교인들이 시편23편의 막대기로부터 “위로”를 얻었노라고 주장한다면 쓴웃음이 절로 나오게 된다.


거듭난 성도들은 징계나 고난을 통해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인 사탄을 통한 징계나 고난이 우리를엄습해 올 때,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의 세력이 주는 죽음을두려워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사탄이 기껏해야 우리 몸을 죽일 수 있을 뿐 혼에는 손가락하나 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시편 23편의 위로를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사탄이 아무리 고난과 시련을퍼붓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사탄 위에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이다. 사탄을 영원한 불길 속에서 멸하실 권세를 쥐고 계신분께서(마 10:28) 징계와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무언가를 깨닫고 얻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성도이며, 그러한 사람은 조롱과 박해를 당해도, 심지어 화형대 위에서 불태워진다 해도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성도는 사탄이 관장하는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함을 지닐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험한 골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그분과 동행하기 때문이다(시 23:4).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죗값을대신 치러주신 구주로 영접하고, 그 뒤로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세상을 두려움 없이통과할 수 있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