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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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예롭지 못한 바락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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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2월호>

"므깃도"는 역사적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격전지 중의 하나였는데, 한때 이곳을 점령했던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는 "므깃도를 차지하는 것이 천 개의 성읍을 점령하는 것에 맞먹는 효과가 있다."라고 말했고, 1799년 이 지역에서 터키 군대와 일전을 치렀던 나폴레옹은 "전쟁을 위해 이곳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라고 했다. 장차 재림 때에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곳 므깃도 평원에서 그분을 대적하기 위해 모여든 적그리스도의 2억의 군대를 진멸시키실 것이다. 재판관기 4장에서는 "바락"이 므깃도로 들어가는 입구인 하로셋, 곧 키손 강 근처에서 그곳에 주둔한 시스라의 부대와 싸우게 된다. 당시에 시스라는 카나안 왕 야빈의 군대 대장이었는데, 900대의 철병거를 지니고 있을 만큼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13절). "철병거"는 철로 만든 마차에 철제 바퀴를 단 병거로서, 바퀴에 옆으로 길게 뻗어 나온 약 1m 길이의 철로 된 칼날이 달려 있어서 어느 한 곳에 운집해 있는 병사들 사이로 이 병거가 지나가면 그 칼날로 수많은 사상자를 낼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전차와 장갑차를 주력으로 하는 "기갑 부대"에 해당한다.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철병거가 큰 문젯거리였다. 여호수아 17:16에서는 에프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철병거를 가진 카나안인들로 인해 불평을 했고, 재판관기 1:19에서도 유다 지파가 그 철병거 때문에 골짜기의 카나안 거민들을 몰아내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사실 이것은 진짜 문제라기보다는 패잔병들이 자신의 믿음 없음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변명거리"에 불과하다. 시대를 막론하고 패자들에게는 항상 충분한 변명거리가 있어 왔다. 왜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왜 부분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는지, 변명거리들은 늘 차고 넘쳤던 것이다. 카데스바네아 사건 때는 "거인들"이 문제였고, 사울의 시대에는 "골리앗"이 문제였다. 재판관들의 시대에는 "철병거"가 문제였고, 오늘날에는 "가족, 건강, 직장, 스펙, 집, 자동차, 고난과 박해, 세상의 염려, 재물의 속임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욕심들 등"이 문제다.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고, 영적 전쟁에서도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음을 보여 줄 뿐이다. 왜냐하면 똑같은 상황에서 이런 동일한 문제들을 믿음으로 극복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데스바네아에서는 여호수아와 칼렙이 "거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외쳤고, 사울 때에는 다윗이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골리앗을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관들의 시대에는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철병거 부대를 괴멸시켰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믿음이다. 첨단 무기가 아니다. 뛰어난 전략도, 훌륭한 지휘관이나 용맹스런 장수도 아니다. 오직 승리의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요일 5:4). 성도들의 영적 전쟁에서, 패배자는 앞에 놓인 문제를 변명거리로 삼지만 진정한 승리자는 항상 믿음으로 극복하는 법이다.

바락 역시 믿음으로 이 힘든 장애물을 이겨 냈고,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은 믿음의 전당에 오르게 되었다(히 11:32).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야빈의 극심한 압제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로 바락을 부르셨는데, 그것은 "여자 재판관" 드보라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성경은 기본적으로 여자들이 재판하고 지배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고 있다(사 3:12). 따라서 주님이 드보라를 재판관으로 세우신 것은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적어도 중북부 지역에 "남자"로서 재판관이 될 만한 적임자가 없었음을 암시해 준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기본적인 질서가 있기 때문에(고전 11:3),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재판하는 임무로 누군가를 세우시고자 했다면 당연히 남자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을 수행할 만한 남자가 없었기에 드보라를 재판관으로 세우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후 에스더를 쓰셔서 하만의 계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여자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하시는가? 어린아이를 사용하신다. 초림 당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기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에 대해 기뻐하며 감사하셨고(눅 10:21), 보리빵 다섯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에도 "한 소년"(요 6:9)을 통해 그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다. 어린아이도 없을 때는 짐승을 사용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 발라암의 미친 짓을 막기 위해 말 못하는 "나귀"로 하여금 사람의 음성으로 말하게 하셨던 것이다(벧후 2:16). 그런 짐승조차 없을 때는 무생물을 쓰신다. 마태복음 3:9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했고, 여호수아 24:27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 그것을 들은 증인들로 무생물인 "돌"을 내세우기도 했다. 누가복음 19:40에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하는 제자들을 꾸짖어 달라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침묵을 지킨다면 돌들이 즉시 소리를 지르리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전할 명령과 말씀이 있으실 때, 언제든지, 어떤 도구라도 쓰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락은 여자 재판관 드보라를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인데, 재판관기 4:6,7에서는 시스라와의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매우 간결하게 구체적으로 하달되고 있다. 이 전쟁에 "누가" 선두에 서서 참전해야 할지, 『너는』, 곧 "바락"이 가야 하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가야 할지, 곧 『납탈리 자손과 스불룬 자손』을 데리고 가야 했다. 출정해야 할 병력은 "몇 명"이면 되는지, 즉 『일만 명』이 필요했다. "어디로" 가야 될지, 목적지는 『타볼 산』이었다. 물론 타볼 산은 시스라와 싸울 격전지가 아니었고, 아군의 집결지였다. 그리고 "어디에서" 적들과 싸워야 하는지, 이것이 바로 적들과 싸우게 될 격전지인데, 하나님께서는 시스라의 군대를 『키손 강』으로 이끌어 내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내용인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까지 말씀해 주시는데, 시스라와 그의 중무장한 900대의 철병거를 『네 손』, 곧 바락의 손에 넘기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상관의 명령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 "출정 명령서"에는 철병거에 대항하여 싸울 "무기"나 "전략과 전술"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물론 백성들이 아무런 무기 없이 전장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름대로 전략과 전술을 구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명령을 하달하실 필요가 없었다. 이는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무기나 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승리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바락은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통해 하달하신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최고 사령관이신 주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6절)

그러나 바락은 믿음이 나약한 장수의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리이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8절). 드보라가 함께 출전하지 않으면 그냥 집에나 있겠다는 심산이다. 바락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와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한 여인"을 신뢰했다. 하나님께서 전쟁에 나가 싸우라고 명령하신 대상은 분명히 드보라가 아닌 바락이었다. 시스라와 병거들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한 대상도 드보라가 아니라 "바락의 손"이었다. 그러나 바락은 자기에게 명령하시는 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전쟁에서 900대의 병거를 완전히 패주시킴으로써 위대한 승리를 이룩하는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영예는 바락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야엘"이라는 아주 평범한 "한 여인"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네가 취한 여정이 너의 영예는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라』(9절).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믿고 실행하는 데 있어서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다. 그대로 믿고, 그대로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다. 진정한 믿음에는 진정한 승리와 영예가 뒤따르기 마련인데, 바락은 이 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비록 이런 아쉬움을 남기긴 했어도, 바락은 다른 나머지 명령에 있어서만큼은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했다. 『일어나라. 이는 오늘이 주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준 날임이라. 주께서 네 앞서 나가시지 않았느냐?』(14절)라는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들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주님의(15절) 능력으로 시스라의 모든 군대를 전멸시켰던 것이다(16절). 결국 모든 부하들을 잃고 혼자서만 간신히 살아남은 시스라가 켄인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으로 피신해 보지만 거기에서 최후를 맞고 만다. 야엘에게 "누가 자기를 찾거든 없다."라고 거짓말을 당부하면서 피곤함으로 인해 깊은 잠이 들었는데, 그것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잠이 되었다(20절). 육신의 잠이 육신의 죽음으로 이어져 버린 것이다. 시스라는 치열한 전쟁과 패전이라는 치욕 속에서 어리석게도 방심하고 말았다. 장수로서 다시 출전할 재기의 기회조차 놓치고 말았다. 즉 야엘이 망치로 "장막의 못"을 시스라의 "머리"의 관자놀이에 박아 그를 죽였던 것이다(21절). "여자의 씨가 뱀의 씨의 머리를 부술 것"(창 3:15)이라는 예언에 따라 시스라는 적그리스도의 예표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 때 므깃도에서 적그리스도의 머리를 부수실 것이다. 또한 "못"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것은 원수인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진리의 말씀인 성경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현명한 자의 말들은 찌르는 막대기들 같고, 집회의 선생들에 의해 박힌 못들 같으니, 한 목자에게서 받은 것이라』(전 12:11). 흔히 못은 물건을 벽에 고정시키는 도구인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하다가 뒤늦게 야엘의 집에 도착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연약한 여인의 손"에 죽은 시스라의 시체였다(22절). 이 순간에 그는 전쟁의 승리의 영예가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를 기억하고 후회했을 것이다. "영예"와 더불어 얻는 승리만이 진정한 승리라는 사실을 반드시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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