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부흥과 개혁 분류

배교한 시대에도 부흥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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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1월호>

부흥에 대한 향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계 3:15,16).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배교한 기독교계의 모습이다. 타락과 배교, 뜨뜻미지근함으로 인한 역겨움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참아 주실 수 없는 상태이다. 교회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부흥의 시대에 관해 조금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부흥과 개혁"만큼 간절한 것도 없는 것이다. 독자들은 조지 휫필드, 요한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찰스 스펄전, D.L. 무디, 빌리 선데이와 같은 혁혁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살아 계신 주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부흥과 대각성을 일으키신 일화 한두 개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아래에 찰스 피니의 사역 중에 일어났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1821년 아담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한 젊은 변호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믿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찰스 피니였다. 그의 회심으로 시작된 부흥은 주변 지방으로 퍼져 나갔고, 급기야 미국 동부 여러 주까지 뻗어 나가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피니가 설교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가 집회에 도착하기도 전에 역사하셔서 사람들이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목소리를 높여 울기도 했다. 어떤 때는 죄를 자각하고 애통해 하는 소리 때문에 설교를 중단하고 안정되기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목회자들 중에서도 회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수천 명의 죄인들이 새 사람이 되었고, 이런 역사는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

이처럼 교회들 안에 대각성이 일어날 때면, 그 도시에는 복음의 진리가 강력하게 선포되었고, 극장과 유흥업소들이 문을 닫았으며, 창녀들과 범죄자들은 물론 무신론자들까지도 "너희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시다."라고 말하면서 회심하는 일들 등이 일어났다. 이런 참된 부흥에 대한 향수는 거듭난 성도들의 마음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를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와 참된 부흥

혹자는 "우리나라에도 평양대부흥이 있지 않았는가?"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른바 평양대부흥은 "성경적인 부흥"이 아니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우리나라의 토속 신앙 및 샤머니즘과 혼합시켜 "한국식 기독교"를 만든 시발점이었다. 더군다나 처음에 국내로 들어왔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성경대로 피 흘려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셨다는 성경적인 은혜의 복음이 아니었고, 기독교라는 종교로 사회를 변혁하려는 "사회 복음"이었다. 또한 당시의 선교사들은 "구역"(舊譯)으로 불리는 "셩경젼셔"(1911년)를 만들어서 기독교의 근간을 놓으려 했지만, 그들 스스로도 순수한 신약 교회의 원문과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킹제임스성경>에 대한 올바른 믿음과 지식이 없었기에,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변개된 원문에서 나온 변개된 성경의 토대를 놓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의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흔히 한국 기독교의 경우 교회 수와 교인 수가 삽시간에 늘어났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성경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전무했다. 다만 누룩으로 전체가 부풀어 버린 가루 서 말처럼(눅 13:21), 변개된 성경과 변질된 복음과 거짓 교리로 몸집만 비대해졌을 뿐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나 기타 대형 교회들의 출현이 이를 입증해 준다.

과연 그런 교회들이 참된 복음과 성경적인 믿음과 바른 성경의 정착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부흥의 열매"가 아니라 부패한 한국식 기독교의 농한 고름이 터져 나온 환부들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교회들은,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면서도 평일에는 세상을 즐기며 사는 위선적이고 구원받지 못한 교인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경의 건전한 교리들에 대해서도 무지한 자들이며,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지도, 빛의 자녀들로서 살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그저 한국식 기독교의 "영험한"(?) 힘을 빌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세상의 성공이나 추구하고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리니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도다.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그 어느 곳도 성한 데가 없고 다만 상처와 상한 곳과 곪은 자국뿐이요, 그것들은 봉합되거나 싸매지거나 향유를 발라 유연하게 되지도 못하였도다』(사 1:5,6). 엄밀히 말해서 성경적인 복음과 바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단 한 번도 이 나라 전체를 뒤덮은 적이 없었기에, 한국 교회는 "부흥"(Revival)이라는 용어조차 쓸 수 없다.

배교한 시대의 자화상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딤전 4:1). 바야흐로 우리는 교회 시대의 끝에 와 있다. 종교 개혁의 시작과 세계적인 부흥과 선교 운동으로 특징 지워진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영광스런 사역이, 1881년 영국의 영어개역본(RV)과 1901년 미국의 미국표준역본(ASV)의 출간으로 급격하게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지 벌써 오래다. 현대 교회들은, 사도들의 시대부터 종교 개혁을 지나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까지 이어져 온 순수한 신약 원문(표준원문)과 변개되지 않은 자국어 성경들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로마카톨릭의 치맛자락 안으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그런 절정에 달한 배교의 모습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부흥이 가능하겠는가?

근본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그래도 부흥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전 세계적인 부흥을 꿈꾸고 있다. 심지어 참된 부흥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도 갖추지 않았으면서, 자기들의 사역과 운동을 통해 뭔가 대단한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칭 그리스도인들, 곧 어떤 진리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요, 참된 믿음을 상실한 영적 가난뱅이들이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영적 벌거숭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활보하고 있는바, 지금은 예수님께서 교회 문밖에 계실 수밖에 없는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임을 직시해야 한다!(계 3:14-22) 우리는 지금 바울이 예고한, 바로 그 『마지막 날들』(딤후 3:1)에 살고 있는 것이다. 기념비들과 건물들, 다양한 운동들과 프로그램 및 의식들 등은 즐비하게 들어서 있지만, 세상을 이기는 믿음,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모두 다 죽어 버린 껍데기들뿐이다.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1-5).

이처럼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이, 수치도 모르면서 소위 부흥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자화상인 것이다. 세계적인 부흥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이 성경의 예언이며, 작금의 현실은 그것에 대해 재론의 여지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른 성경과 진리의 지식을 저버린 배교한 교회들이 로마카톨릭과 연합하여 교황을 전 세계적인 교회의 지도자로 추대하는 일이다. 물론 거듭난 성도들은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릴 대환란 이전에 주님을 공중에서 뵙게 될 것이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살후 2:3).

성도 개개인의 부흥

전 세계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배교의 루비콘 강을 건너 버렸다. 그렇다면 부흥은 이제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어둡고 차가운 숙명론의 감옥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그 어떤 부흥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거듭난 성도들 개개인의 부흥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마지막 날들에 있을 배교와 당대의 배교자들에 대해 지적한 후, 디모데를 향해 『그러나 너는』(딤후 3:10,14)이라고 말했다. 즉 배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바로 그 대목에서 "그러나 너는!"이라고 반복하여 말하는 가운데, 그 "개개인"이 어떻게 하면 배교에 맞서서 살아 있는 믿음의 신비를 견지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능력과 더불어 동행하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해 그 길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딤후 3:10 -17). 요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뜨거운 심장을 가졌던 바울을 닮아서 그가 가르친 진리대로 실행하라는 말인데, 우선 하나님의 변함없는 진리와 은혜와 생명을 담은 순수한 말씀의 건전한 교리들을 믿으라는 것이다. 또한 그 성경으로 자기 자신을 책망하여 바로잡고 의로 훈육함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고 철저하게 무장하며, 바울을 통해 제시된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세와 섬김과 참된 신약 교회의 실행들을 마음으로부터 배워 굳건히 서 있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성경의 불같은 말씀을 매일 받아먹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뜨겁게 간직한 마음에는 차가운 배교의 기운이 쉽게 엄습하지 못하는 법이다.

1814년 미국 침례교해외선교회가 제작한 작은 배지에는, 한때 예수님을 향한 사그라지지 않는 열정으로 전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갔던 모라비아 형제단의 상징이 그려져 있다. 즉 한쪽에 쟁기가 있고 그 옆에는 제단이 있으며 그 둘 사이에 황소 한 마리가 그려진 그림인데, 그 아래에는 "어느 쪽이든 준비되어 있습니다!"(Ready for Either!)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목숨을 바쳐 주님을 위해 일하든, 주님을 위해 자신을 순교자로 드리든, 주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으로 어떤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진정한 성도는 배교한 세태를 탓하면서 자신의 안일함을 위한 변명거리로 삼지 않는다.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이 식고, 세상의 정욕이나 세상일에 대한 염려로 마음이 압도되어 있는가? 말씀을 공부하는 기쁨이나 구령의 열정이 사라지고 종교적인 의무감만 남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신에게는 성경적인 부흥이 필요한 시점이다! 『잠자는 자여 깨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엡 5:14).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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