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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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지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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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12월호>

성경에는 "거룩함의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세 번 등장한다. 우선 역대기상 16:29과 시편 29:2에서 다윗이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하라."라고 외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고, 역대기하 20:21에서는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압인들과 암몬인들을 향해 진군할 때 하나님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아름답게 여기신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시는데,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목적임과 동시에(살전 4:7) 성도를 향한 뜻이기도 하다(살전 4:3).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라고 명령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거룩해야 한다. 거룩함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이다.

그렇다면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이 용어는 "구별"이란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을 위해 따로 떼어 놓아 구별시킨 것은, 곧 거룩한 대상인 것이다. 같은 그릇이라도 사람이 쓰는 밥그릇이 될 수 있는가 하면 개 밥그릇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 구별되어 그 용도로만 사용되는 그릇도 있는데, 바로 이런 것이 거룩한 그릇이다. 무엇이든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시킨 것은 거룩한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의 성막에서 사용된 모든 기명들은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했다(출 40:9). 기름부음을 통해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거룩한 그릇으로 구별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신약에서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그릇에 비유하면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귀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어 거룩하여지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되느니라』(딤후 2:21).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기 위해서는 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즉 "성별"이 필요한 것이다.

악한 현 세상에서 구원받은 것이나 세속화된 교회들로부터 성별하여 성경대로 믿는 교회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성별의 시작일 뿐 "성별의 완성"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귀와 육신과 세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럽힐 수 있는 계기들을 알게 모르게 많이 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악한 것들은 성별이 쉬울 만큼 금방 분별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아주 탐스러우면서도 현명하고 선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칫 올바로 분별하지 않은 채 방심하고 있다가 그것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도 있는 것이다. 마귀가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일은 놀랄 일도 아니다(고후 11:14). 그렇기에 성도에게 있어서 "분별"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분별이 가능해야 "성별"도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분별이 없는 아름다운 여인을 돼지 코에 금고리 같다고 말씀하신다(잠 11:22). 돼지와 금고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분별이 없는 것은 아름다움과 결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즉 분별없는 성도는 "거룩함의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올바른 분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잠 5:1,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별과 성별의 중요성과 연관해서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왕으로서 우상 숭배 장소인 산당들과 아세라를 파괴했고, 레위인들로 하여금 주의 율법책,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했다(대하 17:3-9). 자신의 양떼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님의 면전에서 올바로 행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의 왕국을 강성하게 하셨고 평화를 주셨으며 필리스티아와 아라비아로부터 조공도 받게 하셨다(대하 17:10,11). 그러나 그에게도 흠은 있었으니, 곧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친족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대하 18:1). 만일 그가 하나님의 말씀들과 선왕들이 남긴 기록들에 계속 유념했다면 아합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었을 것이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 8:13). 『주를 사랑하는 너희들아, 악을 미워하라』(시 97:10). 그 부분에 있어서 여호사밧은 주님을 첫째로 사랑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아합이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 아하시야와 제휴를 맺음으로써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다(대하 20:35).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여호람이 보좌에 앉았는데(대하 21:1),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악한 왕들의 길로 행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아내가 아합의 딸이었다는 데 있었다(대하 21:6). 여호람은 그의 아내의 조언에 따라 그의 조상의 주 하나님을 버렸고, 유다의 산들에 산당들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음행하게 했으며, 심지어 그들에게 그런 가증한 짓을 강요하기까지 했다(대하 21:11). 결국 하나님께서는 불치의 병으로 여호람의 창자를 치셔서 창자가 빠져 나오는 고통에 시달려 죽게 만드셨다(대하 21:18,19).

여호람을 이어 보좌를 물려받은 왕은 아하시야였다(대하 22:1, 여호아하스 - 대하 21:17).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호람은 분명 40세에 죽었는데(대하 21:20), 그의 "막내아들" 아하시야가(대하 22:1) 치리하기 시작했을 때의 나이는 42세였던 것이다(대하 22:2).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아하시야는 여호람의 의붓아들로 여겨졌을 뿐 "문자적인 아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에 여호람의 모든 아들들이 사로잡혀 간 상황에서(대하 21:16,17) 그의 문자적인 아들이 아닌 아하시야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또한 여호람이 왕으로 있었을 당시 그의 형제들을 칼로 다 죽였기 때문에(대하 21:4), 아하시야는 여호람과 피를 나눈 형제들과도 혈통상 아무 관련이 없었다. 즉 아하시야는 "다윗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자로서 유다의 왕이 된 것이다. 성경은 이 "요주의 인물"의 혈통에 대해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의 딸 아달랴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대하 22:2).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마태복음>의 설명에 따라(마 1:8에 관한 주석 참조) 아하시야는 바알 숭배자인 아달랴가 이름 모를 씨를 받아서 낳은 아들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하시야는 다윗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음은 물론, 아합 집안의 피마저도 반쯤 섞인 우상 숭배자들의 열매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최초 여호사밧 왕의 분별없는 행동이 "유다 왕국"의 계보를 심각하게 틀어 놓은 것이다.

아하시야가 죽은 이후에 그 왕위를 찬탈한 것은 그의 어머니 아달랴였다. 그녀는 예후의 손에 자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다 집의 왕의 모든 씨를 멸했다(대하 22:10). 그러나 아하시야의 아들들 중 하나인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6년을 하나님의 전에서 숨어 있었다. 요아스가 일곱 살 되던 해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죽이고 바알에게 통째로 바쳐졌던 유다를 다시 개혁했다(대하 23:16-18). 그러나 바알 숭배자의 후손이요, 혈통상 유다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없었던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자 아세라와 우상들을 다시 섬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여호야다의 아들 스카랴가 그의 죄악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는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베푼 친절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여 버렸다(대하 24:20-22). 결국 요아스는 신하들의 모반으로 죽임당했는데, 『주께서 이 일을 살펴보시고 갚아 주소서.』(대하 24:22)라고 외쳤던 스카랴의 마지막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요아스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른 아마샤 역시 그의 신하들의 모반으로 살해되었다.

이후 웃시야가 왕이 되었는데, 마태복음 1:8의 왕의 계보에 따르면 그 계보가 여호사밧에서 요람(여호람)을 지나 곧바로 웃시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여호람과 웃시야 사이에 보좌에 올랐던 "아하시야 - (아달랴) - 요아스 - 아마샤"가 왕의 계보에서 제외된 것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그들이 다윗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아합 집안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웃시야는 어떻게 왕의 계보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그가 "다윗의 씨"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성경에는 웃시야(아사랴)가 아마샤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왕하 14:21, 대하 26:1). 어떻게 아합 집안의 아마샤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씨"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앞선 아하시야의 경우처럼 웃시야가 아마샤의 "문자적인 아들"이 아니면 된다. 즉 양자였거나 사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웃시야는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다가 등장한 다윗의 후손이었던 것일까? 역대기하 21:1-4에 의하면 여호사밧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여호람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여호람의 아들들은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일부가 사로잡혀 갔고, 남은 일부는 모두 예루살렘 진영에서 살해되었다(대하 21:16,17; 22:1). 또한 아하시야가 죽은 이후에는 아달랴가 유다 집의 왕의 모든 씨를 멸절시켰다(대하 22:10). 아하시야의 아들들뿐 아니라 여호람에게 죽임당한 그의 형제들의 자손들이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아달랴에 의해 죽임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다윗의 후손들로는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사로잡혀 간 여호람의 아들들이(대하 21:17)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들의 후손들 중 하나가 웃시야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여호람의 아들들이 아라비아로 끌려간 것은 여호람에 대한 징계이기도 했지만, 다윗의 씨를 보존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계획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끌려가지 않았다면 분명 아달랴의 손에 모두 죽임당했을 것이다.

어쨌든 여호사밧의 분별없는 행동에서 기인하여 여호람 사후에 완전히 틀어지기 시작한 "왕의 계보"를 하나님께서는 웃시야 때에 와서 다시 바로잡으신 것이다. 단순히 성경에 제시된 왕들의 연수만 계산해 보면 다윗의 씨인 여호람이 죽은 이후부터 다윗의 씨인 웃시야가 다시 왕위에 오르기까지 무려 76년이 흘러갔다. 그 긴 기간 동안 다윗의 씨와는 전혀 상관없는 왕들이 유다를 치리했고, 그러는 사이 유다는 배교의 길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남왕국 유다를 무너트리기 위한 마귀의 계략에서 기인한 것이었는데, 그 배교가 바로 여호사밧의 분별없는 행동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다를 도탄에 빠트린 시발점이 되었음은 물론, 메시아의 계보까지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뻔했다.

이상 언급한 왕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왜 성별을 해야 하고, 또 그 성별을 왜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교훈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구원받았거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대열에 들어왔다고 해서 성별이 끝났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미혹에 이끌려 견고한 입장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진리의 지식 안에서 계속 성장하고(벧후 3:17,18),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영적 감각을 단련함으로써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성도가 되지 않는 한, 그 성도는 언제라도 배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수치스런 일이다. 여호사밧처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적인 역사에 누를 끼치는 부끄러운 자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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