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의 비유들 분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2월호>

초림 당시 유대인들은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악의적인 질문을 자주 던졌다. 통상적으로 “질문”은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즉석에서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통한다. 질문을 먼저 던진 자가 승세를 거머쥐는 법이다. 사전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질문을 받으면 말을 더듬거나 얼버무리며 답변을 급조하기 마련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면이 전혀 없으셨고, 오히려 질문자들을 당황케 하는 대답과 질문으로 그들의 사악함을 처리하곤 하셨다.
누가복음 10장에는 한 율법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해 영생을 상속받는 일과 관련하여 질문을 드린 일화가 나온다. 『선생님, 내가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리이까?』(25절) 이 질문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종종 도마 위에 오르던 중요한 “교리적 논쟁점”이었다. 율법사는 주님의 답변 내용을 가지고 그분을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 했던 것이지만, 주님께서는 유대인의 최종권위로 주어진 율법을 언급하시면서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26절)라고 되물으셨다. 율법사는 그나마 율법을 아는 축에 속했기에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27절)라고 답변했고, 주님께서도 『네가 옳게 대답하였도다.』(28절 a)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 말씀이었으니, 주님께서 그를 역으로 시험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28절 b)라고 하신 것이다. 이에 율법사는 자신을 의롭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데 누가 나의 이웃이니이까?』(29절)라고 예수님께 또다시 질문했는데,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여긴 그는 자신에게 사랑이 부족하다는 점을 가리기 위해 되물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덫이 되고 말았다.


사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26절)라는 질문에 율법사가 대답한 내용은 매우 잘한 답변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께서 어느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답변하신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한 율법사가 주를 시험하고자 주께 질문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며, 큰 계명이니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모든 율법과 선지서들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느니라.”고 하시더라』(마 22:35-40). 이처럼 누가복음 10장의 율법사는 율법의 핵심에 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행하지 않는 위선자였다(약 4:17). 그는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지도 않고 자기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었기에,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라는 말씀 앞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고 “이웃”에 관한 둘째 계명을 빌미로 삼아 “누가 나의 이웃이니이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자신이 유대인인지라 “누가 주 나의 하나님이니이까?”라고는 질문할 수 없었고, 다만 둘째 계명을 구실로 “누가 나의 이웃이니이까?”라고 함으로써 주님의 명령을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주님께서 드신 비유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율법사의 위선을 신랄하게 꼬집은 비유였고, “누가 나의 이웃이니이까?”라는 매우 엉성하고 급조된 질문을 오히려 질문자 자신의 덫이 되게 만든 비유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히고 반쯤 죽은 채로 버려 두고 갔느니라. 그때 어떤 제사장이 우연히 그 길을 가다가 그를 보았으나 다른 편으로 지나갔으며 또 마찬가지로 한 레위인도 그곳에 있다가 다가가서 그를 보고 다른 편으로 지나갔느니라. 그러나 여행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와서 그를 보고 가엾게 여겨 그가 그 사람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싸매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그를 돌보아 주었느니라. 그 다음 날 그가 떠나면서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얼마가 더 든다 해도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으리라.’고 하였느니라. 너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들을 만난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생각하느냐?”고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기를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니이다.”라고 하더라. 그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고 하시더라』(눅 10:30-37).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과 교제가 없는(요 4:9) 혼혈 족속이었다. 그들의 기원은 앗시리아 왕이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 공격하여 멸망시킨 후 북왕국의 열 지파를 앗시리아로 사로잡아 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왕하 17:5,6). 앗시리아 왕은 사마리아에 몇몇 이방 민족들을 이주시켜 그곳에 살게 했는데(왕하 17:24), 바로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즉 사마리아에 거하기 시작한 이방인들이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자 주님께서 사자들을 보내시어 그들 중 몇을 죽게 하신 것이다(왕하 17:25). 그들이 그 땅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알지 못하여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을 안 앗시리아 왕은 사마리아에서 데려온 이스라엘 제사장 중 하나를 그곳에 파견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게 했다(왕하 17:26-28). 이렇게 해서 사마리아에는 이방 족속들과 이스라엘 족속이 섞여 살게 되었고, 그 결과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 족속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방에 사는 혼혈인들을 이방의 더러운 피가 섞인 족속으로 몰아붙여 천대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유대인들이 천대하는 사마리아인을 참 이웃으로 제시하는 비유였기 때문에, 인종적 우월감에 들떠 있던 유대인들을 낯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37절)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비유의 중심 진리를 요약해 주셨는데, 이 비유에 등장하는 장소와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이 대응시켜 적용할 수 있다.


첫째, 예루살렘에서 여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어떤 사람』(30절)은 “하나님의 복에서 떠나 하나님의 저주로 향해 가는 사람,” 곧 죄와 파멸로 내려가는 사람인 “죄인”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읍』(느 11:1)이고 여리코는 “저주받은 성읍”(수 6:26)이므로, 예루살렘에서 여리코로 이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에서 저주로 “내려가는” 것이 된다. 복에서 저주로 내려가던 유대인을 공격하여 그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히고 반쯤 죽은 채로 버려두고 간 『강도들』(30절)은 요한복음 10:10에서 『도둑』으로 묘사되는 마귀를 나타낸다. 또한 죄인들을 지옥으로 보낼 의도로 그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해 가는(눅 8:12) “마귀들”을 의미하는데,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히고 반쯤 죽은 채로 버려두고 간 일은, 죄인이 어떤 선함도 남겨지지 않은 채로 벗겨졌고(롬 3:10-18) 자기 의라고 하는 더러운 걸레를 입은 채로 버려졌으며(사 64:6) 이대로 죽는 일 외에는 스스로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사람은 “반쯤 죽은” 채로 버려진 것이기에(30절) 아직 숨은 붙어 있는 상황이다. 즉 “복음에 반응할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죄인은 비록 영이 죽었어도(엡 2:1) 의지를 가진 혼은 살아 있기에 “반쯤 죽은” 것과 같고, 따라서 복음에 반응할 수 있다. 죄인이 의지마저 전적으로 타락해서 복음에 반응할 수 없다는 “칼빈주의”는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다!


이 비유에는 반쯤 죽은 유대인을 도울 수 있는 “세 사람”이 지나가는데, 동료 유대인인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여행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이다. 제사장은 길을 가다가 상처 입은 그 사람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가 버렸다(31절). 그는 그와 같은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이 점은 인간의 “구원”에 관해 도통 무관심한 교황이나 사제 같은 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뒤에 등장한 레위인은 사건 현장에 있다가 “다가가서 그를 보고는” 다른 편으로 지나갔는데(32절), 이 점은 혼의 구원에 조금은 관심이 있는 듯하나 사실은 무관심한 종교 지도자들의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여행하던 어떤 사마리아인』(33절)은 마귀들에게 공격당한 죄인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초림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네가 사마리아인이며 마귀들렸다고 한 우리가 올바로 말한 것이 아니냐?』(요 8:48)라고 비방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주님께서 그분 자신이 비유 속의 사마리아인과 같음을 자처하셨다. 즉 여행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이 상처 입은 피투성이의 사람에게 서슴없이 다가갔던 것처럼(34절) 예수님께서도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죄인인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다(빌 2:5-8). 비유 속의 사마리아인이 그를 가엾게 여긴 것처럼(33절)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가엾게 여기셨고(마 9:36),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싸매 주었던 것처럼(34절), 예수님께서도 기름(눅 4:18, 히 1:9)과 포도주(행 2:13)로 예표되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다(행 10:45).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34절) 데려갔는데, “여관”은 그 쓰러진 사람을 돌보아 줄 사람들이 있는 장소로서 그 쓰러졌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돌봄 속에서 쉬며 회복할 수 있는 곳이다. 예수님(선한 사마리아인)께서 그 사람을 이동시키는 데 쓰셨던 “자기 짐승”은 “먼저 회심하여” 종으로 쓰임받고 있는 성도를 가리키는데, 곧 주님께서는 회심한 성도를 들어 쓰셔서 이제 막 회심한 성도를 성도들의 교제의 장소인 지역 교회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회심자는 바른 말씀을 통해 건전한 설교와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바른 교제로 옛 생활을 벗고 새 생활로 진입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바른 교회로 가야 한다.


사마리아인은 『그 다음 날... 떠나면서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얼마가 더 든다 해도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으리라.’』(35절)라고 했는데, 여기서 “여관 주인”은 “지역 교회에서 섬기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 또한 사마리아인이 모든 비용을 지불하듯이,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지역 교회 안에서 그분의 부르심에 순응하여 행할 때 필요한 모든 것을 “비용이 얼마가 더 든다 해도” 공급해 주신다(고후 9:8-10). 그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데리러 돌아오실 휴거 때에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행한 것들에 대해 보상하실 것이다. 마치 사마리아인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으리라.”라고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갚아 주시는 것이다(고전 3:11-14, 고후 5:10).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신 뒤 율법사에게 『너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들을 만난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라고 질문하셨고, 율법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니이다.』(37절)라고 답변하였다. 사마리아인의 선행에 대해서만큼은 반박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평소 사마리아인을 멸시하던 율법사가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입에 담지 않은 채 답변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비유 속 사마리아인은 죽어 가던 유대인의 이웃이 되어 주었건만, 그 율법사는 여전히 “사마리아인처럼” 이웃 사랑을 실행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37절)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가 그 명령대로 실행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성령님께서는 그 뒷일에 대해 말씀이 없으시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묘사되는 예수님에게서 배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명령은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며, 심지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눅 6:27,28). 무언가를 배웠으면 그것을 실행해야 위선자란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

전체 288 / 5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