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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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턱뼈만도 못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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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7월호>

예수님께서는 헌신된 일꾼이 부족한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면서 『참으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들이 적구나』(마 9:37)라고 말씀하셨다. 바울 또한 『모두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구하지 아니하느니라.』(빌 2:21)라고 말하면서 일꾼이 부족한 상황에 대해 적시했다. 이런 현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일꾼”과 연관된 문제는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대두되었는데, 일찍이 모세는 『주의 편은 누구냐?』(출 32:26)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것은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지체되는 모세를 기다리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을 부추겨서 만든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진노케 했을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죄에 가담하지 않은 성별된 주의 종들을 소집하는 “모세의 외침”이었다. 그만큼 모세가 자신의 일을 맡길 만한 신실한 일꾼이 부족했던 것인데, 모세의 빈자리를 대신했어야 할 아론조차 40일을 버티지 못했다. 물론 모세에게는 우상 숭배에 가담하지 않은 레위의 아들들이 있었고(출 32:26), 바울에게는 디모데나 에파프로디도와 같은 여러 동역자들이 있었으며(롬 16장), 예수님께는 82명의 제자들이 있었다(눅 6:13; 10:1). 그러나 이 정도로는 충분치 않았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일꾼들을 보내 주시라고』(마 9:38) 기도할 것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던 것이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일꾼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몸과 시간, 힘, 재능 등을 드리지 않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신다(롬 12:1). 몸을 『의의 병기』(롬 6:13)로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사실 헌신은 하나님의 명령임과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타락이 헌신하지 않을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굳이 헌신하지 않아도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교훈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구원해 주셨듯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이스라엘을 『능하신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과 표적들과 이적들로』(신 26:8) 구원하셨다. 이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지만, 처음부터 그들에게 그 땅 전체를 한 번에 다 주지는 않으셨다(출 23:29,30, 신 7:22).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땅을 유업으로 나누어 준 이후에도 카나안 거민들은 그 땅 곳곳에 남아 있었다. 대규모의 정복 전쟁이 끝났지만 남아 있는 거민들을 멸망시키고 정복되지 않은 땅을 차지해야 할 임무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재판관기 첫 장에는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순종”이 기록되어 있다. 즉 그들의 땅에서 마땅히 멸망시켰어야 할(신 20:16-18) 민족들과 성읍들을 그대로 남겨 놓았던 것이다. 일례로 베냐민 지파는 여부스인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지 않았는데(판 1:21), 그들은 다윗 왕 때 가서야 비로소 쫓겨났다(삼하 5:7).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서 완전히 멸망시키라고 했던 이방 민족들을 남겨 놓은 이유는 다양했는데, 싸움에서 이기지 못해 남겨 놓은 경우가 있었고(판 1:19), 승리는 했으나 조공을 바치는 자들로 삼기 위해 남겨 둔 경우도 있었으며(판 1:33),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더불어 살게 한 경우도 있었다(판 1:21).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카나안 거민들과의 공존을 선택했던 것이다(판 3:5-7). 결국 싸우려는 의지마저 상실한 채 그 민족들을 진멸시키기는커녕 그들의 풍조를 따라 살게 되었으니, 일찍이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던 대로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올무와 덫이 되었고(신 7:16, 수 23:12,13) 이스라엘을 타락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싸우라고 명령하신 대상과 싸우는 것을 포기한 결과가, 곧 주님께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지 않고, 또 싸우지도 않은 그 결과가 궁극적으로는 “타락과 배교”였다는 사실을 볼 때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달린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을 타락과 배교로 끝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반드시 하나님께 몸을 온전히 드림으로써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물론 이것은 길고도 쉽지 않은 싸움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완전무결한 승리가 있을 수 없다. 어느 정도 승리했다 싶으면 다시금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우리를 대적해 오는 적들이 계속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 고백처럼 우리도 매일 우리의 『육신을 그 열정과 정욕과 함께』(갈 5:24)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전시 상태의 군인처럼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며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경계 근무를 서듯이 깨어 있어야 한다(벧전 5:8).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찾아내어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신 13:12-15). 애석한 일이지만 인생의 모든 여정에서 이처럼 완벽하게 싸울 수 있는 성도는 드물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다니엘 등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조차 실패하고 넘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법이다(잠 24:16). 설혹 패배했다 해도 다시 일어서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절대로 “투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싸우려는 의지마저 상실한 성도를 “나귀 턱뼈”만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손의 일생에서 여자 문제는 지속적으로 발생했는데, 그중 첫 번째 사건이 재판관기 14장에 기술되어 있다. 당시 삼손은 그가 사랑했던 한 필리스티아 여인과 결혼하려고 했다. 그리고 관습에 따라 잔치를 베풀었는데, 삼손은 이 잔치에서 하객들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로 인해 수수께끼 대결에서 패배한 삼손은 너무 화가 나서 아내만 남겨 두고 홀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다시 아내를 찾으러 갔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기 딸이 삼손에게서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녀를 다른 사람, 곧 삼손의 친구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삼손은 필리스티아인들을 괴롭힐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곧 300마리의 여우를 붙잡아 꼬리에 꼬리를 묶고 두 꼬리 사이에 홰를 하나씩 끼워서 그들의 곡식밭에 풀어 놓았던 것이다. 이것이 발단이 된 싸움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고, 결국 필리스티아인들의 군대가 보복을 하기 위해 유다를 침공해 왔다. 삼손을 결박하는 것이 침공의 목적이었는데(판 15:10), 그 내막을 알게 된 유다 지파는 삼손을 결박하여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다시 말해 유다는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필리스티아를 두려워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재판관과 함께 적들과 싸우기보다 바로 그 재판관을 원수의 손에 넘겨줌으로써 잠깐의 평안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전의마저 상실하여 아예 싸우기를 포기한 현대의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의 실상을 잘 보여 준다. 이생의 염려에 억눌린 채 세상에 순응하고 일치하여 불의와 타협하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군사라 불릴 자격이 없다! 『악인 앞에 굴복하는 의로운 사람은 불결한 샘과 오염된 샘물 같으니라』(잠 25:26).

결국 삼손은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결박을 당한 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 넘겨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힘을 주셨고, 그가 끌려간 적들의 진영에서 『나귀의 새 턱뼈』(판 15:15)를 취하게 하시어 필리스티아인 천 명을 죽이게 하셨다. 즉 나귀 턱뼈로 이기게 하심으로써 자기 형제를 원수에게 넘겨준 유다 지파를 부끄럽게 만드신 것이다. 유다가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와 타협했을 때, 주님께서는 “죽음의 결과물”인 “나귀 턱뼈”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복수하셨다. 이렇듯 죄에게 “죽은 몸”(롬 6:6,11)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지도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도 않는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은 나귀 턱뼈보다 더 쓸모없는 사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몸을 내어 주신 목적은 우리의 “구원”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남은 생애를 기꺼이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데 있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5). 사실 우리는 마땅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원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원수를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 주셨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어 온전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해 주셨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언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베드로, 요한, 야고보, 마태 등과 같이 그 부르심에 대해 즉시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으며(마 3:9), 나귀의 입을 열어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도 하신다(민 22:28).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나귀의 턱뼈 같은 도구로 원수들과 싸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도움 없이도 일하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헌신하라고 권고하신다(롬 12:1).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분부하신다(딤전 6:12).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고 명령하신다(고후 5:15). 우리는 이 권위 있는(전 8:4) “왕의 명령”을 받은 성도들로서 나귀 턱뼈만도 못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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