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구약의 교훈 분류

“주의 편”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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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1월호>

『그때에 모세가 진영 문에 서서 말하기를 “주의 편은 누구냐? 내게로 오라.” 하니, 레위의 아들들 모두가 다 함께 그에게로 모이더라』(출 32:26).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구속해 내신(대상 17:21)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복 받은 민족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내려오는 것이 지체되자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음란하게 우상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진노케 했다(출 32:1-10).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배교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믿음 없음”으로 인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진 백성들이 그 불안감을 우상 숭배와 음행으로 달래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한 믿음으로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내 불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약 1:8).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불안한 감정을 “육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인데, 이를 본 모세는 그들을 칼로 베어 버리라고 단호히 명령했다.

거듭난 성도 안에서 육신을 따르는 “옛 사람”과 성령을 따르는 “새 사람”이 항상 서로 반목하여 “새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을 “옛 사람”이 하지 못하게 하듯이(갈 5:17),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도 소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옛 백성”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새 백성”이 나뉘게 되었고, 이들이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 “새 백성”이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을 믿음 없는 “옛 백성”이 방해했다. 이를 지켜본 모세는 전이될 위험성이 큰 암세포를 잘라 버리듯이 “옛 백성”을 수술하도록 명령했고, 또한 그 수술을 집도할 “주의 편이 누구인지” 찾았다. 이는 주의 편이 아닌 자들은 수술을 통해 잘라 버려야 할 대상이었고, 또한 그런 수술은 오직 주의 편에 속한 백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배교한 교회 시대에도 용기 있게 암 덩이를 제거하고 수술할 수 있는 “주의 편”이 필요하다. 다만 그러한 수술을 할 수 있는 “주의 편”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 훈련을 받아라 ▣

“종이를 자르는 칼”조차도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다룰 때는 효과적이며 못하며,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는 당사자가 다치기도 한다. 하물며 “전쟁 무기로서의 칼”은 어떠하겠는가? 익숙하지 않은 칼로 적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 잘못 다뤘다가는 자기가 먼저 다치지 않겠는가? 훈련도 받지 않고 무기를 잘 다룰 수 있는 군인은 아무도 없다.

2007년 국회에서 열린 “공군 조종사”에 관한 한 세미나에서 10년 차 교관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 데 사관학교 4년의 훈련 기간을 포함하여 총 14년간 123억 원의 비용이 발생한다고 발표했다. 기능이 다양하고 유용한 고가 장비일수록 다루기가 더 복잡하고 까다롭기에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군인일지라도 적합한 훈련을 받지 않은 군인에게는 무기를 함부로 맡기지 않는다. 훈련받지 않은 군인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전우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가의 무기일수록 그것을 잘 다룰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하되, 그중에서도 특히 “훈련을 잘 받은 사람들”에게만 그 무기의 사용이 허용된다. 제아무리 완벽한 “사용 설명서”가 있다 해도 최신 전투기를 아무런 교육 훈련도 없이 조종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한들 얼마나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며, 또 얼마나 위험 부담이 크겠는가? 이처럼 무기를 다루는 데 있어서 “훈련”은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과정”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칼』(엡 6:17)로 불리며, 이 칼은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무기이다. 무기 없이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 없듯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성도 역시 “영적인 무기” 없이 전쟁에 임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기만 있으면 전쟁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인가?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전쟁 무기도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거늘, 하물며 “이 세상의 신”을 상대하는 영적 전쟁을 위한 무기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성도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살아 있고 능력 있는 “양날 가진 칼”(히 4:12)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그 칼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세밀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클라렌스 라킨, 스코필드, 피터 럭크만 등과 같은 “훌륭한 성경 교사들”이 깨달은 “향상된 지식” 덕분에 영적 전쟁의 무기인 성령의 칼을 능숙하게 다룰 정도의 수준까지 이르는 데 필요한 “훈련 시간”을 많이 절약하게 되었다.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성능을 자랑하는 무기,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마땅히 그것에 필요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따라 무기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주의 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훈련 과정을 온전히 마치라 ▣

각 나라의 모든 “특수 부대”는 두 가지 교육 훈련을 시행하는데, 곧 “선발 교육”과 “양성 교육”이다. “양성 교육”의 목적은 전투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에 있지만, “선발 교육”의 목적은 지원자들을 “탈락시키는 것”에 있다. 양성 교육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상당수 지원하기 때문인데, 선발 교육을 통해 그런 사람들을 걸러 낸 후에 양성 교육을 시행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특수 부대 중 하나인 미국의 “네이비실”(Navy SEAL)은 육해공 어느 경로로도 침투 및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받고 있으며, 선발 과정에서도 “탈락률”이 높기로 유명하다. 이들의 훈련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 대부분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라고 볼멘소리를 하는데, 이는 교관들이 시키는 훈련 강도가 너무나 혹독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훈련받는 장면을 보면 멋지고 강인하며 용감한 군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너무 힘들어서 게거품을 물고 눈은 간신히 뜬 채 달리기를 한다든지, 심지어 기절하고 울기도 하며 겁을 집어먹어 벌벌 떨기까지 한다. 이렇게 망가져 버린 가련한 모습은 결코 “건장한 군인”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이게 훈련이냐?”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온몸이 부서질 듯한 하루하루의 훈련을 끝까지 견뎌 낸 훈련병들은 처음 입소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강한 특전사”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훌륭한 군인을 만들어 내는 “아주 좋은 훈련”인 것이다.

“선발 교육”의 애초 목적이 “탈락시키는 것”에 있기에, 그 교육을 받는 지원병들의 목표 역시 “끝까지 견뎌 내는 것”이어야 한다. 멋있게 교육받고 좋은 점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고 버텨서” 수료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훈련받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해서든지 낭비하지 않고(엡 5:16) 모든 시간을 주님 안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땀 흘려 일하고, 시간을 사서 얻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끝까지 견디다 보면, 피곤하고 지치고, 또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싶었던 날들을 뛰어넘어 반드시 강한 군사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군사의 무기인 “성령의 칼,” 곧 성경을 공부하느라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는 훈련 기간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바쁘지 않고 여유가 넘치는 “특수 부대 훈련 과정”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끄럽지 않은 “주의 편에 속한 군사”로 인정받을 만큼(딤후 2:15) 강해지기 위해서는 처음 시작한 훈련을 끝까지 마쳐야 한다.

부끄럽지 않은 주의 편으로 인정받도록 강해지기 위해서는 시작한 훈련 과정을 끝까지 견뎌 내야 한다.

▣ 옛 사람을 과감하게 수술하라 ▣

영적 무기의 사용법을 배웠다면, 그다음으로는 그 무기를 누구에게 사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아무에게나 막 사용한다면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된다. 과연 이 “성령의 칼”을 누구에게 겨눠야 하는가? 당연히 그 대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존재”이어야 한다. 그런 존재가 누구인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인정을 받으려 하는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감정을 드러내기 좋아하고, 수군거리는 것을 즐기는 존재이며,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존재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이 땅에서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려는 존재이다.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핑계를 대면서 남의 탓을 잘 하고, 잘된 일에 대해서는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존재이며,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다 해도 남보다 자신을 더 낫다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그야말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요일 2:16)에 푹 빠져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존재는 항상 성경을 대적하고 성경 말씀에 불순종하며, 높아지려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 “성령의 칼”은 바로 이런 존재를 대적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그 존재가 바로 우리 모든 성도 안에 있으니, 곧 “옛 사람”이다.

모세는 “새 백성”을 위해 “옛 백성”을 수술을 통해 과감하게 도려냈다. 거듭난 성도들도 자기 안에 있는 “새 사람”을 위해 “옛 사람”을 과감하게 수술해야 한다. 주위에 있는 다른 지체들을 수술대에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의 “옛 사람”을 먼저 올려놓고 “성령의 칼”을 대야 한다! 이런 수술은 매일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매일 죽노라』(고전 15:31). 그래야 “주의 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군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주의 편”에 서서 주님과 함께 싸우는 격전지이다!

특수 부대원들의 전투 위치는 “최전방”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곧 “적진 한가운데”인 것이다. “성령의 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도록 훈련받은 그리스도의 군사 역시 적진 한가운데로 침투하여 전투를 벌이는 특수 부대원이다. 이렇듯 모든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해서 전우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좀 더 충분한 준비를 위해 안전한 후방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군사에게는 “후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미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전한 후방에서만 주님을 섬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곳 역시 안전한 곳이 아니라 마귀가 이미 장악하고 있는 “위험한 전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렇게 위험한 전장에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지난날 우상을 숭배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안전해지고 싶은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인가? “주의 편”에 서서 주님과 함께 싸우는 격전지가 가장 안전한 곳이다. 당신은 거기에 서 있는가? 거기에서 적들과 싸우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렇게 물으신다. 『주의 편은 누구냐?』(출 32:26)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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