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에 나오는 동식물 분류

늑대에게서 배우는 교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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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4월호>

성경을 읽다 보면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곳이 있다. 일례로 신약의 과도기적인 책이 그렇다. 교리적으로 어려운 책이기에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않은 채 말씀을 본다면 몹시 어렵고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이렇게 교리적인 측면에서 오는 어려움과는 색다른 어려움에 부딪히곤 한다. 바로 역대기상 1-9장에 나오는 계보별 사람의 이름들이나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나오는 바빌론 포로 귀환자들의 이름을 볼 때이다. 마치 끝이 없을 것 같이 언급되는 이름들을 읽다 보면 이내 지루해져서 그냥 건너뛰고 싶은 얄팍한 충동까지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 이름들을 기록하신 목적이 있으시며, 특정 이름들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신다.

이와 비슷하게 성경에는 여러 동식물의 이름도 나온다. 사람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동식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시거나 무엇인가를 그것들에 비유해서 설명하시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의 예표로 쓰신다. 또한 디모데전서 5:18에서는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하였고, 또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합당하니라.”고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역자를 소에 비유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아울러 소가 곡식을 밟아 떠는 것처럼, 사역자도 성도들이 먹을 영적 양식을 내어놓아야 하며, 주님의 일을 하는 일꾼은 하나님께서 그의 삯을 받도록 해 주신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죄인은 들나귀에(욥 11:12), 구원받지 못한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는 각각 개와 돼지에(벧후 2:1,22), 불굴의 기도의 용사는 날개를 쳐서 솟구치는 독수리에(사 40:31) 비유되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에는 어린양으로(요 1:29), 재림 때에는 포효하는 사자로(사 42:13, 계 5:5) 묘사되심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동식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이 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의 말씀에 관한 더 풍성한 이해를 가능케 해 준다. 따라서 앞으로 독자들과 함께 성경에 나오는 여러 동식물에 관해 하나씩 공부해 볼 터인데, 이번 글에서 처음으로 살펴볼 동물은 “늑대”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 한 번을 제외하고는(창 49:27) 모두 “이리”라고 번역된 “늑대”(wolf)는 창세기 49장에서 처음 등장한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마지막 유언을 하는 장으로, 여기서 그는 마지막 날들에 있을 일들에 관해 예언하되, 특히 자기 아들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예언한다. 그 예언에서 야곱은 베냐민 지파를 늑대에 비유하고 있다. 『베냐민은 늑대같이 먹이를 찾아 나서리니 그가 아침에 먹이를 삼키고 밤에는 약탈물을 나누리라.” 하더라』(창 49:27). 이 구절에서 우리는 늑대가 밤에 약탈물을 나누는, 즉 주로 밤에 사냥하는 야행성 동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약탈은 기본적으로 폭력을 써서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통해서는 늑대라는 동물이 폭력적이고 포악한 동물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여러 법칙 중 “첫 언급의 법칙”에 따라 이후로 성경에 등장하는 늑대, 곧 이리의 모습은 “야행성”의 난폭한 모습이다. 그래서 『저녁 이리들』(합 1:8)이나 『저녁의 이리』(렘 5:6) 등과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동족을 약탈하는 유대인 고관들의 모습은 『먹이를 약탈하는 이리 같아서 부정직한 이익을 취하려고 피를 흘리며 혼들을 멸하였』다고(겔 22:27) 묘사되고 있다. 또한 성읍 안의 재판관들을 『저녁 이리들』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뼈를 갉아먹되, 다음 날까지 남겨 두지 아니하는도다.』(슾 3:3)라고 한다. 이로써 무리 지어 다니는 늑대의 난폭한 야수성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칠고 사나운 늑대의 본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실 천년왕국 시대를 묘사할 때 “극적으로” 반전되기도 한다. 바로 어린양과 늑대가 함께 거하는 것이다! 『또한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사 11:6).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요』(사 65:25). 이처럼 만물이 새롭게 회복되는 때를 마태복음 19:28에서는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 세대[regeneration]』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새 세대』란 단어는 디도서 3:5에서 “개인의 새로운 출생, 즉 거듭남”을 말하는 데 쓰인 『중생』(regeneration)이란 단어와 같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통치하러 오시면 단순히 지상 환경을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바꾸시는 정도가 아님을 보여 준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 중생하여 완전히 새로운 속 사람이 태어나는 것처럼, 죄로 저주받은 땅과 짐승의 본성을 포함한 모든 것이 재림 때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는 무(후)천년주의자들은 모두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야만 지상에 실현될 수 있는 왕국이기 때문이다.

늑대는 혼자 있을 때는 다소 소심한 동물이며, 난폭성과 폭력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는 대담하게 먹잇감을 사냥하기보다는 남겨진 사체를 먹거나 누군가의 먹이를 몰래 훔쳐서 달아나곤 한다. 하지만 무리를 이룰 때면 달라진다. 무리 지어 먹이사냥을 하며 공격할 때는 훈련된 사냥개처럼 완벽하게 먹이를 제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늑대가 무리를 이루면 먹잇감으로 삼은 동물을 거의 놓치는 법이 없다. 특히 시편 22:16에서는 『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악인의 무리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그들이 내 손과 내 발을 찔렀나이다.』라고 말씀하는데, 개는 늑대와 관련된 동물로서(늑대는 갯과의 짐승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상황이 마치 개들이 무리를 지어 난폭하게 둘러싼 상황처럼 묘사된다. 즉 무리 짓는 늑대의 포악한 습성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계신 것이다.

이와 같은 늑대 특유의 본능은 죄인들이 죄를 범할 때 항상 “동료”를 구한다는 것에 비견될 수 있다. 그래서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젊은이들은 으레 또래 집단을 형성하여 “동료”들을 만듦으로써 죄를 짓는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를 정당화하고 자기가 만든 동료 집단과 함께 죄의 방탕함으로 떨어지기 일쑤다. 비단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 교단 교회들에 다니는 교인들도 “동료”를 원하기는 마찬가지다. 서로 구원받지도 못했고 서로 변개된 성경을 쓰는 것을 보면서도 서로 간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영적 소경 상태에 눌러앉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복음을 전하고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제시하면 불안해하며 이단으로 몰아세우고 배척하기에 여념이 없다. 심지어 “동료”를 추구하는 늑대의 무리 짓는 습성은 바른 말씀과 바른 진리를 믿고 실행하는 참된 신약 교회에서 배교하여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배교하여 교회를 떠날 때 결코 혼자 이탈하지 않고 항상 함께 떨어져 나갈 “동료”를 만들어서 무리 지어 나간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이 육신적인 본성을 결코 변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주변에 있는 “늑대 같은” 사람들에게 휩쓸려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동조하느니 차라리 혼자 남는 것이 낫다. 설령 당신 혼자만이 진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이 스며들더라도 결코 위축되거나 낙담하며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다수는 진리를 실행할 수도 없고, 밥 존스 목사의 말대로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당신이 바로 다수가 되기 때문이다! 악한 사귐은 좋은 행실을 부패시킨다는 말은 진리이다(고전 15:33). 이 말씀을 무시한 채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 “동료”들을 만들어서 곁에 둔다면 그 사람은 그로 인해 어리석은 자들의 친구가 되어 종국에는 멸망하게 될 뿐이다. 『현명한 사람과 동행하는 자는 지혜롭게 될 것이나, 어리석은 자들의 친구는 멸망하리라』(잠 13:20).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에 유의해야 하며, 절대로 늑대와 같은 “난폭함”을 지닌 자들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난폭함은 반드시 물리적인 난폭함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입술로 선동하여 악을 이루는 것도 난폭한 일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난폭한 사람은 자기 이웃을 꾀어 선하지 않은 길로 인도하느니라. 그는 비뚤어진 일들을 도모하려고 눈을 감고 그의 입술로 선동하여 악을 이루느니라』(잠 16:29,30). 자기 입술로 비뚤어진 일들을 도모하는 모습은 소위 기독교계 안의 삯군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늘 정중한 말과 그럴듯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데(롬 16:18), 그들 거짓 목사들은 결국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늑대에 지나지 않는다(마 7:15). 그들이야말로 거짓 교리와 인간의 전통으로 교인들을 꾀어 선동하는 “늑대 인간”들인 것이다.

사실 야곱이 베냐민 지파를 무리 짓는 습성을 가진 난폭한 늑대에 비유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베냐민 한 지파가 이스라엘의 나머지 열한 지파를 상대로 두 번이나 큰 싸움을 치렀고, 두 번 다 열한 지파에게 큰 피해를 줬기 때문이다(판 20:13,14,21,25). 병력의 수만 보자면 26,700명이 400,000명을 상대했으니 15:1의 싸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싸움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베냐민 지파의 전투 본능은 재판관기 20:15,16과 역대기상 12:1,2 등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더욱이 베냐민 지파는 두 명의 사울을 배출했는데, 둘 다 양극단으로 걸출한 인물들이었다(사울 왕과, 또 사울이라 불린 사도 바울). 비록 사도 바울은 군인 출신도 아니고 물리적인 전쟁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 무기,” “하나님의 전신갑옷,” “전쟁,” “군사” 등 군인의 삶으로 묘사했다(고후 10장, 엡 6장, 딤후 2,4장). 군인 지파 출신으로서 그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군인 정신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즉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고난을 견뎌 내라. 전쟁에 임하는 자는 아무도 이생의 일들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이처럼 늑대 같은(창 49:27) 베냐민 지파였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에게 제시한 군인의 모습에서 얻을 수 있는 “늑대의 교훈”이 있다면, 우리도 적을 향해서는 늑대처럼 사납고 무서워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마귀를 대적함에 있어서, 죄를 멀리하고 증오하며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경대로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주님의 양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도 때로는 늑대처럼 맹수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우리가 믿고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은 그분의 진노를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어린양”이시기 때문이다(『어린양의 진노』, 계 6:16).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사나워져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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