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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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길을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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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2월호>

시편 95편은 대환란을 통과하여 천년왕국으로 들어간 환란 성도들에게 하는 이야기와(1-6절) 대환란을 끝까지 견딤으로써(마 24:13) 멸망하지 않아야 할(히 10:39) 환란 성도들에게 주시는 이야기를(7-11절) 담고 있다. 본 시편에는 대환란 후에 천년왕국이 오게 되는 시간적인 순서가 뒤바뀌어 있으므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오, 오라, 우리가 주께 노래하자. 우리가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해 즐겁게 부르자. 감사함으로 그의 면전으로 나아가며 시로 그에게 즐겁게 부르자』(1,2절). 성도는 『주께』 노래해야 한다. 로마카톨릭의 “마리아”는 노래의 대상이 아니다. 마리아는 성당 밖 세상 무대에서도 숭배받는데, 곧 “아베 마리아”(Ave Maria, 마리아여, 문안드립니다.)라는 노래를 통해서다. 마리아가 “이 세상의 신”인 것이다.

아베 마리아는 “슈베르트”가 “월터 스콧”의 서사시에서 소위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부분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로, 세상은 무대 위에 올라선 가수의 그런 노래에 감동하며 가슴에 손을 얹는다. “아베 마리아, 온화한 이여! 거칠고 험악한 이 세상, 성모의 보호를 비오니 우리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베 마리아, 거룩한 이여! 죄인들이 여기 있지 못하오니, 인자하신 당신의 눈길 죄인에게 주옵소서.” 이 얼마나 가증하고 반성경적인 가사인가! 그것은 『오, 오라, 우리가 주께 노래하자. 우리가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해 즐겁게 부르자. 감사함으로 그의 면전으로 나아가며 시로 그에게 즐겁게 부르자.』(1,2절)라는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있다. 마리아가 『주』란 말인가?

로마카톨릭이 칭송하는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렘 7:18; 44:17-19,25)이라 불리는 “마귀”이다. 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아니라 로렐라이, 메두사, 비너스, 다이아나, 아스타르테, 아스토렛, 이쉬타르, 미네르바 등 수많은 “가명들”을 가진 마귀인 것이다. 세상은 이 마귀에게 올리는 가증스러운 노래에 찬사를 보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려 왔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크겠는가!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녀 앞에 제물로 술을 붓던 일을 그만둔 뒤로 그들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고 칼과 기근으로 진멸을 당했다고 말했지만(렘 44:18), 선지자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그들이 행한 악과 그들이 범한 가증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으셨기에 그들의 땅을 거민이 하나도 없이 황폐와 놀람과 저주가 되게 하신 것이라고 책망했다(렘 44:22).

또한 그들이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면서 주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주님의 음성에 복종하지 않고 그분의 율법과 규례들과 증거들대로 행하지 않았기에 그런 재앙들이 일어난 것이라고 꾸짖었다(렘 44:23). 이 세상 역시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는 로마카톨릭에 동조한 죄로 대환란이라는 전무후무한 대재앙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지혜로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되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 또 말에 있어서나 행실에 있어서나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 3:16,17).

『이는 주께서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신들 위에 계신 위대한 왕이심이라』(3절). 우리가 마리아가 아닌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위해 시를 지어 불러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위대하시고 모든 신들 위에 계시는 위대한 왕이시기 때문이다. “이방 신들”도 하나님께서 실제로 존재하시는 것처럼 실제로 존재한다. 한편 성경은 실제로 존재하는 그 신들에게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명령한다. 『조각한 형상들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 낭패를 당하리니 이는 그들이 우상들을 자랑함이라. 너희 모든 신들아, 그분을 경배하라』(시 97:7). 이 세상 신들은 “우상들”이지 하나님이 아니며,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나 외에 하나님이 있더냐? 정녕, 다른 하나님은 없나니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하노라』(사 44:8). 그래서 본 시편에서는 『땅의 깊은 곳들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힘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요, 그가 만드셨으며 또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 오라, 우리가 경배하며 절하자. 우리가 우리를 만드신 주 앞에 무릎을 꿇자. 이는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초장의 백성이요, 그의 손의 양임이라.』(4-7절)라고 말씀하면서 백성들을 경배의 자리로 부르는 것이다.


“신들”은 뱀이 여자를 유혹했을 때 최초로 언급되었는데(창 3:5), 이 신들은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욥 1:6; 2:1; 38:7)이라 불리던 천사들 가운데 “타락한 천사들”(신들)이 대홍수 이전에 땅에 내려와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갔고, 그들에게서 “용사들”이라 불리는 유명한 사람들, 곧 “거인들”이 태어났다. 『사람들이 지면에서 번성하기 시작하고 딸들이 그들에게서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들로 삼으니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않으리니, 이는 그도 육체임이라. 그래도 그의 날들이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창 6:1-4). 자기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고 그들 자신의 처소를 떠난(유 1:6) 천사들이 육화되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육체가 되어 “피조 세계”를 망쳐 버린 신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셨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너희 모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손들이라. 그러나 너희가 사람들처럼 죽게 될 것이며 통치자들 중의 하나같이 쓰러지리라.” 하였도다』(시 82:6,7).


대홍수로 심판받아 죽임을 당한 그 신들은 홍수 이후에 “형상 숭배”를 통해 경배받고 있지만, 사실상 영원한 사슬에 묶인 채 큰 백보좌 심판 때까지 지옥에 갇혀 있을 뿐이다. 『또 자기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주께서 영원한 사슬로 묶어 큰 날의 심판 때까지 흑암 속에 가두어 두셨느니라』(유 1:6).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그런 천사들조차 아끼지 않으시어 지옥에 던지셨고 흑암의 사슬에 내어 주시어 심판 때까지 가두어 두셨는데(벧후 2:4), 성경은 바로 이 사슬에 묶인 신들을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너희는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세상이 너희에게 심판을 받을진대 너희가 지극히 작은 일들을 심판할 역량도 없느냐? 너희는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물며 이생에 관한 일들이랴?』(고전 6:2,3)


한편 사슬에 묶인 신들을 심판할 그리스도인들은 현 교회 시대에 주님을 섬기기 위한 “영적 사슬”에 묶여 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가 입을 열어 담대하게 복음의 신비를 알리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그를 사슬에 묶인 대사가 되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의 신비에 관해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하도록 하시려고 주님께 종속되게 하셨다는 것이다(엡 6:19,20). 바울은 감옥에서 실제 사슬에 묶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주신 사명 자체가 사슬과 같아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사슬에 묶인 노예나 죄수처럼 그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언제 무엇을 하다가도 또다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었다. 바울은 복음 전파의 사슬에 묶인 “그리스도의 대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도 이 사슬에 묶여 있는가? 사슬에는 무게가 있다. 당신은 그 무게를 감당하면서 그 살갗이 쓸리는 냉혹한 고통도 견뎌 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사슬에 묶인” 숙명인 것이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의 때와 같이 또 광야에서의 시험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그때 너희 조상들이 나를 부추겼고 나를 시험하였으며 내가 한 일을 보았도다. 사십 년 동안 내가 이 세대를 싫어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기에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노라.” 하였으며 내가 내 진노 가운데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7-11절). 7절의 “오늘”은 구약 시대가 아닌 이스라엘의 “현세대”(마 24:34)를 가리킨다. 그들은 교회가 휴거된 이후 대환란으로 들어갈 것이고, 그때 대환란을 통과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왕국 복음”(마 24:14)이 전파되는 대환란 기간에 모세와 엘리야의 설교를(계 11:3)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그 믿음에 더하여 율법의 행위로(계 12:17; 14:12) 대환란을 끝까지 견뎌야 한다(마 24:13). 대환란 기간에는 구원에 있어서 교회 시대와 달리 “믿음과 행위,”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한 것이다.


과거 출애굽 제1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미혹된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이 그분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는데, 이 점은 대환란을 통과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다.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는 그 기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을 인내로 끝까지 지켜야 왕국에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 그때 그들의 조상들처럼 “마음이 미혹되어” 적그리스도가 제시한 길에 동조한다면, 그 유대인들 역시 안식에 못 들어가고 조상들처럼 멸망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교회 시대 성도들에게도 “세상의 길,” 곧 “인간의 길”이 미혹의 미끼를 드리우고 있다. 일례로 여기에 세상이 선망하는 “인간의 길”이 있는데, 곧 미국의 시인이요 철학자인 “랠프 왈도 에머슨”(1803-1882)의 “무엇이 성공인가”란 시에 제시된 “멸망의 길”이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 내는 것 /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다는 사실로 인해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시에 감명을 받아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려고 봉사와 기부를 해 왔지만, 그런 “인본주의적인 길들”의 끝은 “죽음”이었다(잠 16:25). 반면에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하나님의 길”이고 그 길을 깨달아 영원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에서 구원을 보고, 성경의 일점일획 속에서 역사의 행로를 보며, 다시 오신다는 주님의 약속 속에서 휴거와 재림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을 깨달아 영원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삶과 현 세상을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삶은 오롯이 그리스도인의 것이다. 이런 삶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다. 흉내 낸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길을 깨닫고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 주님의 모든 길은 그분의 언약들과 증거들을 지키는 자에게 자비와 진리이며, 주님께서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그가 택할 길을 가르쳐 주신다(시 25:10,12). “하나님의 길,” 곧 그 “바른길”을 택할 때,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서 영원토록 해처럼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마 13:43).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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