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구약의 교훈 분류

칼멜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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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2월호>

『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이 모든 것을 주의 말씀대로 행하였다는 것이 오늘 알려지게 하소서 』(왕상 18:36).

사람에게는 어떤 중요한 사건을 “장소”와 함께 기억하려는 성향이 있다. 시간은 흘러가서 멈출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지만, 장소는 다시 찾아가서 희미해진 기억을 되살려 볼 수 있고, 또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감정을 다시 느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부가 결혼 전에 만났던 장소나 신혼 여행지를 다시 한 번 찾아가는 것, 성공한 사람이 첫 성공의 기틀이 되었던 장소에 가 보는 것, 학창 시절의 교우들과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모교에 찾아가 보는 것 등 중요한 기억은 보통 장소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많다. 그러므로 장소는 과거의 “사건”과 마음속에 새겨진 “기억”이 만나는 “접촉점”이라 할 수 있겠다.

성경에서도 중요한 사건을 장소와 연결 짓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아브라함이 카나안의 세켐 땅 모레의 평지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시니, 그가 그곳에다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께 제단을 쌓았더라』(창 12:7).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려고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어떤 경우에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기념할 만한 무언가를 남기는 것은 물론, 아예 그 장소의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야곱이 파단아람으로 가던 중에 꿈을 꾸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어 여러 가지 약속들을 주셨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자기가 베개로 삼았던 그 돌을 들어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다 기름을 붓고 그곳의 이름을벧엘이라 불렀더니, 그 성읍의 이름이 처음에는 루스라고 불렸더라』(창 28:18,19). “루스”는 “아몬드 나무”라는 뜻이다. 야곱은 주님께서 꿈에 나타나셨던 그곳에 기둥을 세우고 장소의 이름도 “하나님의 집,” 곧 “벧엘”로 바꾸어 불렀다.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그곳을 벧엘이라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일을 계속 기억하게 되었는데, 결국 그곳의 지명이 벧엘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런 사건들 외에도 성경에는 많은 사건들과 많은 장소들이 나오며, 그 사건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매우 깊은 인상과 감명을 남겨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깊은 인상과 감명이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연결되어 우리 마음속에 오랜 여운을 남기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소들 중에서도 특히 극적인 인상을 주는 장소가 있는데, 바로 “칼멜”이다.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칼멜이 있다. 하나는 “남쪽의 칼멜”인데, 염해 서쪽에 위치해 있는 산지로서 다윗과 아비가일의 “첫 만남”의 장소였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파란 광야에 있을 때였다. 파란 광야에서 가까운 칼멜 지역의 부자였던 나발의 양들이 털 깎는 때가 되었을 때, 다윗은 나발에게 그의 양들과 목자들을 보호해 준 대가를 요구하였는데 나발이 이를 묵살해 버렸다. 심히 분노한 다윗은 나발의 집을 치기 위해 칼을 차고 병사 사백 명과 함께 칼멜로 출동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급히 음식을 준비했고, 다윗이 오는 길로 가서 그의 앞에 엎드려 다윗과 그 일행을 멈추게 함으로써 나발의 집에 임한 큰 재앙을 막았다(삼상 25:1-35).

아비가일이 나발의 집을 치기 위하여 칼멜로 오는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다윗을 위하는 진심 어린 마음과 솔직하고 설득력 있는 말로 그의 행보를 돌이켰는데, 약 열흘 후 나발이 죽자 다윗은 사람들을 보내서 아비가일을 데려와 아내로 맞이했다(삼상 25:36-43). 말하자면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아픈 기억의 장소가 될 수도 있었던 칼멜이 다윗과 아비가일에게는 극적인 첫 만남의 장소가 된 것이다. 완전 무장한 다윗과 그 병사들을 혼자의 힘으로 막아 낸 겸손하고 지혜로운 한 여인이, 섬세한 시인이자 노련한 전사인 한 남자를 만났는데 어찌 교감이 없었겠는가? 과연 다윗과 아비가일이 이 “첫 만남의 칼멜”을 잊을 수 있었겠는가?

또 다른 하나는 “북쪽의 칼멜”인데, 키손 강 서쪽 지중해에 접해 있으며, 아합의 때에 엘리야가 활약했던 곳이다. 성경은 아합에 대해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에 바알을 위하여 한 제단을 쌓았고 또 아합이 아세라를 만들었더라. 아합이 자기 앞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더욱 격노케 하였더라.』(왕상 16:32,33)라고 기록한다. 이 아합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시어 비가 오지 않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분노를 나타내셨다. 그러나 아합은 자신의 악함에서 돌이키기는커녕 오히려 비가 오지 않게 한 엘리야를 비난했다(왕상 18:17).

이러한 아합에게 엘리야가 말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 아버지의 집이 한 것이니 즉 당신들이 주의 계명들을 버린 것과 당신이 바알들을 따른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이제 보내어 온 이스라엘을 칼멜 산으로 내게 모으소서. 또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들의 선지자 사백 명도 모으소서』(왕상 18:18,19). 이후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들의 선지자 팔백오십 명과 홀로 대결하여 그들을 몰살시키고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므로 이 북쪽의 칼멜은 바알과 아세라들의 선지자들에게는 “죽음의 칼멜”이 되었고, 엘리야에게는 “승리의 칼멜”이 된 것이다.

칼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들의 선지자 팔백오십 명과 대결했을 때,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이 모든 것을 주의 말씀대로 행하였다는 것이 오늘 알려지게 하소서』(왕상 18:36). 엘리야는 이 기도를 통해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고자 하는 엘리야의 믿음의 자세가 잘 드러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세 가지가 “오늘” 알려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 세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는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신 것』이 “오늘” 알려지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치리자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배교와 우상 숭배로 만연된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선지자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러한 선지자에게는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신 것』을 자기 민족에게 알리는 일이 “내일” 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라 반드시 “오늘” 해야만 하는 가장 시급한 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거리설교와 구령 현장에서 혼들에 대한 강한 연민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할 때, 오늘 밤에 죽을지도 모르는 그 혼들에게 그 말씀이 “오늘” 알아도 되고 “내일” 알아도 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반드시 “오늘” 알아야 할 말씀이고 반드시 “오늘” 영접해야 할 말씀인 것을 전하지 않는가? 이러한 심정이 “그날” 엘리야가 자기 민족을 향해 갖고 있던 바로 그 심정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내가 주의 종인 것』이 “오늘” 알려지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미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바알을 구분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엘리야를 그저 “더 능력 있는 또 다른 바알의 선지자” 정도로만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하나님께서 선정하신” 선지자임을 분명히 알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서 구원의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생각을 전하는 것처럼 받아들일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지한 목사들이 자기 생각을 성경 말씀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종과 사탄의 종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었기때문이다.

셋째는 『내가 이 모든 것을 주의 말씀대로 행하였다는 것』이 “오늘” 알려지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엘리야는 “오늘” 바알과 아세라들의 선지자 팔백오십 명을 죽일 계획이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성경은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너희가 얼마나 더 두 의견 사이에서 지체하려느냐? 주가 하나님이시면 그를 따르라. 그러나 만일 바알이면 그를 따르라.” 하니 백성이 그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더라.』(왕상 18:21)라고 말씀한다. 백성들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눈치를 보고 있었든지, 믿음이 부족했든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었든지 간에 모두 “혼미한 상태”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금 엘리야에 의해 수행되는 일들이 『주의 말씀대로』 행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엘리야는 자신의 뜻도 아니고 “바알의 말”도 아닌 『주의 말씀대로 행하였다는 것이』 “오늘” 알려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야는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그 “혼미한 상태”에서 구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믿지 않는 교인들과 대화를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에게는 바른 말씀에 대한 갈망이 전혀 없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은 매우 혼미하다. 그들은 “하나님”이든 “바알”이든, 그저 사람이 많은 곳에만 가서 적당히 섞여 있어도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그들은 진리에 갈급하지도 않다. 그래서 “오늘” 받아들여야 할 “성경에 대한 믿음”을 영원히 “내일”로 미룬다. “진리”를 알 필요가 없으니, “썩은 성경”을 들고 다닌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엘리야는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고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위협에 낙담하여 광야로 피신했다. 바알과 아세라들의 선지자들 팔백오십 명과 홀로 맞대결했던 위대한 엘리야는 어디로 가고 나약한 도피자 엘리야만 남은 것인가? 누구든지 낙담하면 겁쟁이가 된다. 용기 없는 자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섰을 때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다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늘 기억하라. 『강건하고 담대하라. 무서워 말고 낙심치 말라. 이는 주 네 하나님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함이라』(수 1:9).

당신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 구주로 영접했던 장소는 어디였는가? 당신은 그 기쁨과 감사함을 여전히 기억하는가? 혹시 그 “첫 만남”의 기쁨과 감사함이 희미해지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첫 만남의 칼멜”로 다시 돌아오라. 그 아름다운 “첫 만남의 칼멜”로 돌아오라. 주님께서 바로 그 “첫 만남의 칼멜”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당신이 육신과 죄와 사탄에게 승리했던 곳은 어디였는가? 당신은 그 통쾌한 “승리”의 장소에 지금도 머물러 있는가? 혹시 그 “승리”의 기쁨과 감사함에서 멀어져 “광야”를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승리의 칼멜”로 돌아오라. 그 통쾌한 “승리의 칼멜”로 돌아오라. 주님께서 바로 그 “승리의 칼멜”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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