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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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성령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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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6월호>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 일을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믿는 사람들 안에 내주하시고 인도하시도록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또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선물이라고도 말씀하셨다.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만 믿을 뿐 “성령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단지 성령님을 하나님의 종이나 심부름꾼 정도로 여기고, 심지어는 소름이 돋게 하거나 이상한 방언이나 하게 하여 무아지경으로 끌어들이게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결코 열등하시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을 전기와 같은, 생명이 없는 물리적인 힘으로 생각하여 살아있는 인격이 없는 존재로 격하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은 영향력이 아니라 한 인격이라는 사실을 살펴보겠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은 성령님께서 살아계신 인격이므로 그 분께 다가갈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 분을 신뢰할 수도 있지만 의심할 수도 있다. 그 분을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 찬양받으시는 대상이기도 하
지만 모욕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 분을 슬프게 할 수도 있고 그 분께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성령에 관한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성령님은 살아계신 인격이시다. 만일 성령님이 살아계신 인격이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면 당연히 동등하게 경배 받으셔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축도는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성령의 이름은 축도와 침례의식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등장한다. 마태복음 28:19에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각각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인 단수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은 “주”(Lord)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주이다. 아들 하나님은 주이다. 성령 하나님은 주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성령의 이름이 아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다. “여호와”는 아들의 이름이 아니다.
이 하나님의 신격을 잘못 이해하여 혼동함으로 커다란 두 이단 종파가 생겨났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의 신격을 구성하는 3위는 모두 동등하지 않고 두 종류의 신이 있어서 하나는 다른 신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리안주의(Arianism)이다. 다른 하나는 은사주의 단체들로서 예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라고 가르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곤하기도 하고 졸리기도 하고 피를 흘리기도 하고 죽기도 하였던, 한 ‘사람’의 이름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울지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죽지 않으신다. 그 분은 구약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적으로 혹은 인간적으로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은 한 영이시다. 하나님께서 열등한 하나의 신(god)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는 이단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그들은 지옥도 없다고 한다. 또 예수님 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이단들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으므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 두 이단들이 하는 거짓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이들은 성경에 없는 말들로써 성경을 가르치려고 한다.
만일 성령님이 단지 힘이나 영향력뿐이라면 우리는 그 분을 “it”로 취급해야 한다. 이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옳다. 성경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을 언급할 때에만 성령님에 대하여 “it”라고 기록되었다. 인격으로 언급할 때면 항상 인칭 대명사 “he”로 기록되었다. 사역이나 영향력에 있어서 성령님을 “it”로 말하는 것은 옳지만, 성령님은 하나의 영향력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령님은 영향력을 소유하신 인격이지, 성령이 곧 영향력이라는 말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영향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격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성령님은 인격이시다.
만일 그 분이 인격이시라면 우리는 좀 더 그 분과 친밀해져야겠고 보다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겠다. 성경에서는 인칭 대명사로 성령님을 언급하셨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5:26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위로자가 오시면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6: 8에서는 그 분이 오시면 세상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6:13에서는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 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에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요한복음 16:14에서 『그 분이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 분이 내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임이라.』고 하셨다. 영(spirit)이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프뉴마(pneuma)인데, 이는 중성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친히(itself)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거니와”에서처럼 성령님을 중성으로(itself) 말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님의 ‘사역’을 언급할 때 중성을 쓰는 것은 명백히 옳다. 다만 ‘인격’을 언급할 경우에는 인칭대명사로 써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에서만도 성령님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가 열 두 번이나 나온다. 인칭 대명사로 쓰여 지지 않은 구절은 먼저 보았던 『성령이 친히(itself) 우리의 영과 함께 ... 증거하시거니와』의 로마서 8:16과 로마서 8:26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고치겠다고 하여 뜯어 맞추는 타락하고 사악한 현대의 성경 번역자들은 이 구절이 틀렸다고 하여 “itself”를 “himself”로 고쳐놓았다. RSV, New ASV, 기타 배교한 성경들에서 확인하여 보라. 그들은 하나님을 고칠만큼 똑똑한 사람들이다. 즉 이들은 성령을 언급하는 데 있어서 “himself”로 쓰여 질 곳에 “itself”로 잘못 쓰여 졌다 하여 하나님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서 고쳐버린 것이다. 여러분이 킹 제임스 성경에서 이 ‘유감스런 실수’를 읽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유감스런 실수’를 읽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 자체는 중성이다. 영에 대한 말인 “itself”도 중성이다. 영 그 자체(pneuma)를 언급할 때는 중성으로 쓰여 지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인격으로서의 성령님을 나타낼 때는 물론 “he"가 정확한 것이다.
성령님이 인격이신 것은 인격적인 성품을 소유하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령님은 능력이 있으시고, 사랑할 수 있고, 슬퍼할 수 있고 , 지성과 지식과 의지력이 있으시다. 거절당하실 수도 있고, 성령님께 거짓말 할 수도 있으며, 슬퍼하시게 할 수도 있다.

성령님은 의지력이 있으시다.
성령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신가? 무엇보다도 성령님은 의지력이 있으시다. 고린도전서 12:11에는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그 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느니라』고 쓰여 있다. 즉 성령님은 결정을 내리신다.

다음으로 성령님은 지성이 있으시다. 느헤미야 9:20에는 『주께서는 또 주의 선하신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향력”은 지식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성령님은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는 중보하시기 때문에 영의 생각을 아신다. 성령님은 살피시고 무엇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이상은 느헤미야 9:20과 로마서 8:27에 잘 나타나 있다.

성령님은 지식이 있으시다. 고린도전서 2:11,12에는 『사람의 일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 기록되었다. 성령님은 지식이 있으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인격이시다.

성령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사도행전 1:8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은 능력으로 고집불통의 고기잡이인 시몬 베드로를 성령 충만한 설교자로 변화시키셨다.

성령님은 사랑하신다. 로마서 15: 30에서는 “성령의 사랑으로”라고 하였고 로마서 5:5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부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성령님은 슬퍼하실 수 있다. 에베소서 4:30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였다.

성령님께 거짓말할 수도 있다. 사도행전 5장 1-6절을 보면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 성령께 거짓말하게 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여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거짓말하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 대상은 바로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하나님 한 분 안에 세 인격이 계신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자세한 성경적 교리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겠다.
성령님은 인격이시므로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인지하시고, 목적이 있으시고, 의미가 있으시고, 가르치시고, 사랑하시며, 슬퍼하신다. 성령은 분명히 어떤 영향력이 아니어서 성령님을 절대 의심하거나 모욕하지 말도록 하자. 믿음과 사랑과 찬양으로 끊임없이 성령님께 나아가도록 하자.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였다.
성령님은 인격을 가진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성경은 성령님이 단지 영향력이 아니라 참된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평범한 열가지 사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해 준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통찰하신다.
우선 고린도전서 2:10에 보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통찰하신다. 기도를 통하여,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컴퓨터는 없다. 이 세상에서 거듭나는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또 욥기 40장과 41장에 나오는 리비야단(Leviathan)을 알 수 있는 컴퓨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어떤 컴퓨터라도 아담과 이브가 먹었던 것을 말해줄 수 없다. 가장 복잡한 기계를 고안할 수 있는 IQ가 150~180인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고전 2:14).

성령님은 말씀하실 수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성령님은 부르짖으실 수 있다. 갈라디아서 4:6에서 바울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고 말하였다. 성령님은 인격인 것이다.

성령님은 중보 하신다.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롬8:26). 여기에서 잠깐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성경적으로 살펴보면, 성령님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고 중보 하셔서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간구의 말로 옮겨 주신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기도하는 법을 아시는 분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지상
의 현재 상태에서 우리가 기도할 줄 모를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중보하실 수 있는 분이 계셔서 그 분이 “친히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신다”는 점이다. 가끔 방언으로 인해 성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성령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재고의 가치도 없는 소리다.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중보”하신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생각하는 그 어떤 말들로 말을 한다면 명백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중보하실 때,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는가? 자 화내지 말고 해당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라.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롬8:26).

성령님은 증거 하신다.
다음으로 성령님은 증거 하신다. 요한복음 15:26에서 예수님은 『위로자 곧 진리의 영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면 그가 나에 관하여 증거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은 가르치신다. 요한복음 14:26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위로자 이신 성령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능력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6:13과 느헤미야 9:20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지식이 있으시고, 지식을 축적하시고, 지식을 밝혀주시고, 지식을 전달하여 주시고, 확인시켜 주시며 또한 우리가 지식을 잊었을 때 생각나게도 하신다.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컴퓨터 한 대가 내장되어 있어서 어떤 것도 다시 생각나게 할 수 있는 완전 기억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자 하여 시간을 투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필요한 때에 생각나게 하신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을 시간 낭비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솔로몬이 말했던 것과 같이 숨겨진 금과 같은 지혜나 다이아몬드나 루비 같은 진리를 찾는 데 시간을 보낸다면, 그리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며 다른 어떤 보물을 찾는 것보다도 진지하게 시간을 보낸다면 성령님께서는 그 분의 보고로부터 모든 것들을 꺼내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그리하여 필요한 때에 “모든 것을 언제나 너희가 필요한 대로 가질 수 있게 하심으로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신다(고후9:8). 이는 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강제로라도 공부하게 하지만 그들은 말씀을 읽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정작 문제에 빠졌을 때 아무 말씀도 생각나지 않는다. 자신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 계획에 관한 아무런 성경 말씀도 제시하지 못한다. 성령님은 여러분을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고 이러한 것들을 생각나게 하시려고 오셨다.

성령님은 인도하시고 지시하신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롬8:14).

성령님은 명령하신다. 사도행전 16:6,7에서 성령님은 바울과 실라가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금하셨다. 선교 여행을 떠나려는 두 선교 팀들이 있었고 성령님은 『그리로 가지 말고, 이리 오라』고 말씀하신다.
성령님은 그들이 어떤 곳에 가는 것을 금하시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인도하시고, 지시하시고, 명령하시는 성령 하나님이다. 성령님께서 그들이 아시아에서 전하는 것을 금하셨다. 이것이 한 인격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님은 사람들을 불러서 일하게 하시고 특정한 일을 주신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3:2에서 성령님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내게 따로 구별해 놓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시다. 바로 성령님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바로 성령이다! 사도행전 20:28에서 바울은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셨으며...”라고 말하였다.

성령님은 오신 목적대로 사역을 하신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진리의 영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면 그가 나에 관하여 증거 하시리라』(요15: 26).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