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과 예언 분류

성막을 통해 계시된 초림과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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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12월호>

해 아래서 구원받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축복이자 특권은 어느 때나 신뢰할 수 있는 주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고, 또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께 부르짖는 모든 일에 가까이 계심같이, 하나님께서 그처럼 가까이하시는 그렇게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느냐?』(신 4:7)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그런 민족이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이집트로부터 구속되었고, 주님께로부터 율법과 명령과 규례들을 받았으며, 모세의 언약하에서 그분의 "독특한 보물"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기 위해 모세를 통해 성막을 세울 것을 명령하셨다(출 25:8). 말하자면 이 세상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가장 "가깝게" 이스라엘과 더불어 거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성막이 세워진 목적은, 하나님께서 가까이하시려는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심으로써 그들이 주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며 살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출애굽기 25:22에서는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계명들로 줄 모든 것들에 관하여 "교제"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 성막으로 친히 내려오시어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다(출 20:24).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시며, 불멸하시고 어떤 사람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분, 곧 영원한 존귀와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과 성막을 통해 함께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영예요, 가장 위대한 특권이었다.

그런데 초림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막이 아니라 직접 "육신의 몸인 장막"을 입으시고 백성들 한가운데로, 이전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셨다. 구약 시대에는 회중의 성막이 진영 중앙에 세워져 있긴 했지만, 백성들은 성막 둘레로부터 "멀리 떨어져서"(민 2:2) 장막들을 쳐야만 했었다. 물론 다른 민족들에 비하면 이 정도도 가까운 거리라 할 수 있겠지만, 초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정말로 가까이서 대면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고 말씀하셨다. 이에 관하여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살폈으며, 우리 손으로 직접 만졌던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라』(요일 1:1). 이렇게 가까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한 특권이지만, 요한은 그보다 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즉 그는 마지막 유월절 날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요 13:23). 그 품 안에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요한은 정말로 아주 "가까이"에서 영원하며 참 생명이신 분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요한이 얼마나 큰 놀라움과 흥분에 사로잡혔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자, 이상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로 오셔서 그들과 가까이하시려는 "하나님의 성막"과 "하나님의 몸"의 관계를 보게 된다. 즉 하나님의 성막이 구약 시대의 "장막"이라면, 그분의 성육신하신 몸은 초림 때의 "장막"인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장막"의 관계를 통해 위대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는데, "그리스도의 오심," 곧 초림과 재림에 관한 놀라운 계시이다.

우선 요한복음 1:14에서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하나님이신 말씀께서(요 1:1) "육신의 몸"을 입으신 것을 의미한다(성육신). 그런데 여기에서 "거하시므로"(dwelt)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케노오"인데, 이는 "장막을 치다"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초림 때에 이 땅에다 육신의 "장막"을 치시고 그 몸을 통해 임재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초림 때 탄생하신 시점이 이스라엘의 일곱 가지 절기 중에서 일곱 번째 달에 있는, 곧 양력으로 9-10월에 있는 "장막절"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소위 "12월 25일"로 잘못 알려진 예수님의 탄생일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약 삼십 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셨는데(눅 3:21-23), 이때 역시 "장막절"이었다. 이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이 총 "3년 6개월"이기 때문이다. 곧 장막절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 해 유월절(요 2:13)까지가 "6개월"이고, 그로부터 유월절이 "세 번"(요 5:1; 6:4; 11:55) 더 지나가게 되는데(총 "3년"), 예수님께서는 이 중 마지막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세상 죄를 제거하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다(고전 5:7).

이처럼 주님께서는 초림 때에 장막절에 오셔서 "유월절"에 생을 마감하신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예수님의 초림을 기념하는 절기는 장막절이 아니라 유월절이다. 특히 유월절은 초림 때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보여 준다. 또한 신약 성도들의 구원도 예표한다. 출애굽 당시 첫태생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유일한 조건은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이었는데, 마찬가지로 교회 시대에도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이 피가 묻어 있는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넘어가게 된다(pass over). "유월절"(the passover)에서 "유월"(逾越)은 "넘어가다"는 의미이다.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가는 "둘째 사망"이 넘어가고, 육신의 죽음인 "첫째 사망"도 넘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도 육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다(살전 4:14). 이는 영원히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몸으로 반드시 죽음에서 다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장막절은 재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래서 재림과 천년왕국의 내용을 다루는 스카랴 14장에서는 "장막절"을 세 번이나 언급한다(슼 14:16,18,19). 흔히 신약의 구원론을 다룰 때는 성전보다 성막을 예표로 설명한다(히 9장). 그래서 성막으로는 초림 때의 속죄사역을 제시하고, 성전을 통해서는 재림과 천년왕국을 다룬다. 이는 성전이 왕국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및 왕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치 이 사실을 보여 주는 듯, 광야의 성막은 "유월절"이 들어 있는 "첫째 달"에 세워졌고(출 40:17), 솔로몬 성전은 "장막절"이 포함된 "일곱째 달"에 완공되었다. 특히 성전이 완공되었을 당시 백성들은 "장막절"에 솔로몬왕에게로 모여들었었다(왕상 8:2). 배교하기 전의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의 가장 위대한 예표가 된다. 또한 신약에서는 야고보가 이 성전을 구약을 인용하여 "다윗의 장막"이라고 부르면서(행 15:16) 장차 재림 때에 천년왕국 성전이 세워질 것을 증거했다.

이처럼 재림은 장막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이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하늘에도 있다. 말라키 4:2에서는 재림하시는 예수님께서 "의의 태양"으로 묘사되는데, 시편 19:4에서는 이 태양을 위한 "장막"이 하늘에 세워져 있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5절에서는 『태양은 신랑방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경주하는 강한 남자처럼 기뻐하는도다.』라고 말씀한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이와 연관된 사실을 변형산에서 직접 목격했다. 당시 그들은 "해"처럼 빛나는 용모로 변형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재림 때의 모습)을 보았는데(마 17:2), 베드로는 이 광경이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각각 "장막" 셋을 짓겠다는 실언을 했다. 비록 그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한 말이었지만(막 9:6), 성령께서는 이 말을 통해 "의의 태양"과 "장막"을 의도적으로 연결시키심으로써 재림이 장막절과 연관되어 있음을 계시하셨다.

이처럼 장막으로도 불리는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의 오심과 연관된 위대한 진리를 계시하는데, 초림이든 재림이든 "장막절"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그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이라면, 이 위대한 계시를 결코 놓칠 수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재림을 보여 주는 변형산 사건 때 하늘에서 들려왔던 그 음성(벧후 1:17)을 기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매우 중요한 권면을 한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빛에 주의하듯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 1:19). 가장 잘 사는 인생이란 바로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며 사는 삶"이다. 언제까지 그래야 되는 것인가? "샛별," 곧 "태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이다. 말하자면 눈 깜짝하는 순간에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때까지이다. "밤이 많이 지났고 의의 태양이 떠오를 낮이 무척 가까이 왔다"(롬 13:12)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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