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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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수 없는 은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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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7월호>

“저항할 수 없는 은혜”, “효과적인 부르심”, “주권적 은혜”에 의한 구원 에 관해 온갖 억지주장을 하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도 결국 복음전파와 이교도의 구원문제에 관한 깊이있는 질문 앞에서는 그들의 논리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TULIP 체계의 복음 전파에 대한 비난을 예견한 듯 페트리지(Fetriege)는 그의 반대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칼빈주의와 같이 강력한 복음전파의 능력을 가진 체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오히려 큰소리칩니다. 심지어 엥겔스마(Engelsma)는 개혁신앙만이 “성경적 복음전파”를 가르친다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성경적으로 살펴보았듯이 칼빈주의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또다른 복음”(갈1:6)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된(갈1:12)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은혜의 기초 위에서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입니다(고전15:2). 그럼에도 칼빈주의자들은 복음이나 말씀이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는 비정상적인 수단(저항할 수 없는 은혜)을 제시합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칼빈주의를 동일시하기 위해 TULIP 체계의 복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20:24)과 같게 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복음주의와 칼빈주의 신학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인식한다면 칼빈주의자들은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 아래 모든 일들이 발생하고 하나님께서 그 분의 판결에 의해 미래를 이미 고정시켜 놓으셨으며 구원받을 자들을 결정해 놓으셨다면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의무를 느낄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모든 사람의 구원을 보증한다면, 왜 복음전파, 즉 개인적 구령이나 선교에 대한 부담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말하든, 말하지 않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칼빈주의자들은 이탈자가 생기지 않도록 복음주의와 구령에 대한 교리적 방해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의 주장을 일순간에 뒤집습니다.
“선택의 교리에 대한 우리의 열심으로 인해 우리가 복음전파의 필요를 무시한다는 비판들에 대해 책임질 필요는 없다.”
“나는 선택받았으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더라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교리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그들이 복음을 듣든지 듣지 않든지 간에 구원하시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지식에 기초한 잘못된 결론이다.”
“칼빈주의적 선택의 교리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진리이다.”
“요한복음 6:37의 논쟁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든 집에 누워서 쉬든 선택된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하기를 꺼려하지만 그 중 어떤 사람들은 확실히 그러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 결론은 잘못된 것이며 논리적일지는 몰라도 육신적인 직무태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성경대로 믿는 믿음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롬10:17)과 우리 각자의 생각과 논리 중 어떤 것을 최종권위로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칼빈주의가 이미 많은 ‘훌륭하고 경건한’ 신학자들이 인정하고 많은 종교회의들로부터 공인된 논리체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권위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권위의 검증을 철저히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구상과 생각들을 맞춰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그럼에도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확고히 세운 화단의 한 송이 꽃(TULIP)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잘못되고 모순된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기체적인 살아있는(히4:12) 계시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1:1부터 요한계시록 22:21까지의 모든 말씀이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고, 완벽한 조화와 통일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완벽하게 복종하지 않는 모든 사상체계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딤후2:15) 일꾼들에 의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 가지 구상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역하여 스스로 추켜 세운 모든 높은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고후10:5).
진리가 아닌, 진리와 유사한 것들은 진리 그 자체에 의해 모순이 드러나고 말기에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다시 그들의 슬로건인 이사야 14:24을 제시합니다. 가장 성경적인 조직신학으로 자처하는 “칼빈주의”가 결국 “하나님의 비밀한 것”에 대해 알려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운 사람들이 스스로 거짓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성경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가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생각했던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내가 계획했던 대로 그것이 확고히 되리라』(사14:24).
칼빈주의자들은 앞에서 말한 대로 TULIP의 5개 항목에 따라 선택된 자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의해 압도되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
“선택받은 사람은 아무도 구원받지 않은 채로 죽지 않는다.”
“선택받은 사람은 한 명도 멸망하지 않고 반드시 모두 구원받는다.”
“하나님의 판결의 목적은 그의 선택받은 자들 모두가 회개에 이르는 것이고 그들 모두는 반드시 회개할 것이다.”

TULIP의 향기에 취한 사람들은 결코 구령의 열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께 선택된 자들을 만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할 따름이며, 성경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만을 기다리며 복음전도자의 직무를 태만히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라는 칼빈주의적 생각은 처음에는 구원의 기쁨과 감사로 다가올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향한 의지를 꺾어버리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모든 일들마다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는 자포자기적인 사람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때때로 구원의 확신까지도 의심하게 되고 모든 일들이 예정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으로 인해 어떠한 일에도 스스로 의지를 사용하지 못하기에 사탄이 그 의지를 관장해 버리는 어이없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에게만 제한된 특별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생각은 오히려 특권의식을 갖게 하고, 교만하게 만들며 따라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생각이 칼빈으로 하여금 국가교회와 교권주의를 가지게 한 것입니다. 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는 결국 거듭난 성도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각종 범죄들을 정당화시키는데 이용될 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예정되었고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특권을 지닌 선택된 자들만이 구원받음에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를 칼빈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를 택하기로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전도의 사명에 참여할 것을 우리에게 주권적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하찮은 이유가 될 수 없다” - 거스트너(John Gerstner).
“우리는 전파하고 증거한다. 우리는 외적인 부르심을 제공할 따름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내적으로 부르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나는 여기에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위한 구원의 목적을 미리 정하셨을 뿐 아니라 그 방편들도 미리 정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전도의 미련한 것이다” - 스프로울(R.C Sproul).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통해 칼빈주의자들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선택된 자들에게만 특별히 제공되는 제한된 은혜라는 것이며, 둘째, 이 은혜는 죄인들을 반드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인간의 어떠한 의지나 반응도 이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쿠스탕스(Custance)는 전적타락을 증명하고자 할 때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문자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 “하나님이 그들 중 일부를 살리시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반응할 수 없다.” 이처럼 전적타락의 결론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역시 복음전파는 구원을 위한 필수요소가 아니며 단지 순종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칼빈주의 복음전파자도 공개적인 초청을 믿지 않습니다. 칼빈주의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들의 군중들 중에 “선택된 자”가 있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칼빈주의자 에디 가레트(Eddie Ga- rrett)도 “하나님은 죽은 이방의 죄인들에게 전파된 말씀과 상관없이 생명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복음의 전파 없이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신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까요? 칼빈주의자들은 더욱 대담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 “복음은 거듭남의 수단이 아니고 복음은 이미 생명을 가진 자를 위한 것이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절대권위인 하나님의 말씀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시대”에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구원계획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100%) 이루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의 모든 노력과 반응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칼빈주의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은 “이 은혜가 어떻게 드러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행20:24)과 “그의 은혜의 말씀”(행20:32)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복음과 말씀이 우리에게 위임되었고 우리의 사역의 수단이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10은 이 진리를 명백히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그것이 드러났으니, 그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느니라.』 이것은“복음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된 것이지만(딤후1:9)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드러내실 때까지는 분명치 않았습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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