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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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수 없는 은혜”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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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4월호>

극단적 칼빈주의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아담의 타락 전과 타락 후의 상태를 성경을 중심으로 보다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본래 사람을 정직하게 만드셨습니다(전7:29).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이나 악으로 기울어짐 없이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분명하게 성경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27, in his own image),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창 1:26, after our likeness), 하나님의 모습으로(창 5:1, in the likeness of God) 지음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가장 최적의 조건에서도 실패했습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불순종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하시니라』(창2:17). 여기서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들은 먹는 “날에는”(in the day), “반드시 죽으리라”(shaltsurely die)입니다. “먹는 날에는”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 날 24시간이 지나기 전을 의미합니다. 그 날 즉시 아담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명백히 죽음이라고 말씀합니다.
한편, 성경에는 다섯 가지의 죽음이 제시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혼이 육신과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민6:6, 히9:27).
둘째는 영원한 죽음으로 둘째 사망이라 불리며 계시록 20:6,14에서 나타나는 죽음입니다.
셋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그 영이 죽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순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이 살림을 받습니다(엡2:1, 요일3:14).
네번째 죽음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선언된 그 죽음입니다(롬6:2, 골3: 3).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 제시되는데 어떠한 기능이 마비되어 더이상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죽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롬4:19).
이 다섯 가지 죽음 가운데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했던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그 날 즉시로 일
어난 것은 영의 죽음이었습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는 결코 협박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요?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사람의 영은 죽었고,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전적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창1:26)과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이어받은 셋(창5:3)을 비교함으로 타락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사람에게 양심을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같은 영을 가졌는데 그가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짐승의 영(전3:21)과는 다른 사람의 영을 가집니다. 이 양심이 사람과 짐승을 구분짓는 한 요소가 됩니다. 양심이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라는 것은 아담이 고의적으로 범죄한(딤전2:14) 그 사건 이전과 이후의 아담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창2:25; 3:10). 이 양심의 기초 위에 복음을 듣지 못한 타락한 죄인들도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롬2:14 -15)
그러므로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모든 인류는 그 영이 죽었고 그 혼은 죄의 삯으로 인해 지옥과 불못(둘째 사망)으로 가야만 하는 운명인 것입니다. 전적 타락으로 인해 모든 사람의 혼은 구원받아야만 하며, 이것은 잘못된 출생으로 난 첫번째 생명을 버리고 복음을 통해 성령으로 거듭남으로만 가능합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입니다(벧전1:9).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실제로 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러한 은혜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워필드(Benjamin Warfield)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은혜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도록 영혼의 문을 열게 하거나, 이미 받은 은혜를 이용하거나 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면서 구원 과정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는 일은 칼빈주의에 위배된다.”
또한 핫지(Charles Hodge)는 그의 조직 신학에서 전적 타락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순서적으로 설명합니다.
(1)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을 잃었다.
(2) 하나님께로 돌아서려면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하다.
(3) 죄인은 이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거나 그것에 협조할 수 없다.
(4) 그러므로 누가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인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5) 따라서 하나님은 전적으로 주권적으로 행하신다.

“전적 타락”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주장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구원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사람은 자기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거부할 수 없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Soverignity)입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저항할수 없는 은혜에 대해 가지는 공통된 견해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 에드윈 팔머(Edwin Palmer)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적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한 사람 안에서는 성령께서 구속 사역을 행하지 않으셨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복음을 통한 외부적 초청을 듣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수십 번 읽는다 할지라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경우에는 성령께서 저항할 수 없도록 역사하시어 그를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 것과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충분히 깨달아 믿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자발적인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원하십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에서 멀어졌으며, 거듭난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에 성령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롬8:26). 만일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말대로 성령님께서 저항할 수 없도록 역사하신다면 성령께서 이처럼 탄식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가 자발적으로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그 분은 강도처럼 문을 부수고 저항할 수 없도록 침입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칼빈주의자 쿠스탕스(Custance)의 궁색한 변명을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역사하심이 강제적인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지를 순응적이 되게 하여 구원받지 못한 자가 ‘은혜에 의하여 기꺼이 스스로 다가오게’(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12장 1절) 또는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실 때 변화되고 성령의 달콤한 입김을 받은 의지가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갈망하고 행동하게’(의지의 노예 25장) 하는 설득의 형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극단적 칼빈주의 체계인 TULIP의 “I”에 해당되는 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able grace)는 그 의도하는 바를 감추기 위해 자주 다른 이름들로 불립니다.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유효적(effectual), 효과적(efficious), 극복할 수 없는(invincible), 특별한(special), 하나님의(divine) 은혜라든지 유효적 부르심(effectual calling)으로 불립니다. 또한 절대은혜주의(monergism)라고도 불리는데, 사실 인간의 어떠한 반응도 기대하지 않는 이 교리는 칼빈주의의 핵심입니다. 워필드가 말했듯이 절대은혜주의는 칼빈주의의 보증서처럼 여겨지는 예정설보다 칼빈주의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높이는 듯한 이 교리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의지 자체를 사용 불가능한 폐기물로 여기고 단순히 성령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능력만을 기다리는 로보트로 만들어 버리는 이 사상체계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구원계획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거스틴과 칼빈 계통에 속하는 개혁자들은 절대은혜주의를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제시 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절대은혜주의가 구령(soul winning)의 의욕을 상실케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할 바가 없다면 누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순종과 자발적인 자유의지의 사용을 원하십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믿으라”는 명령을 하시지, 성령이 믿게 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저항할 수 없도록 은혜로 어떤 개인들을 거듭나게 하신다면 믿음이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든 말든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이미 거듭나 있기 때문에 그는 이미 하나님의 가족이며 천국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비성경적인 교리를 성경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칼빈주의자들이 애용하는 구절은 루디아의 회심과 관련된 사도행전 16:14입니다. 『거기에 루디아라고 하는 여인이 었었는데, 두아티라 성읍의 자주 옷감 장사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여인이었으며, 우리의 말을 듣더라.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이 말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시니라』(행16:14).
에디 가렛트(Eddie Garrett)는 바울이 루디아에게 말씀을 전파할 때 루디아가 이미 거듭났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그녀의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이해하는 구원의 전형적인 순서는 거듭난 후에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렛트는 “복음은 거듭남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생명을 받은 이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요일4:19). 하지만 이것은 루디아의 경우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코넬리우스의 경우와 같이 사도행전 13:48의 무리에 속합니다. 하나님꼐서 그녀의 마음을 여신 것은 구원받은 다른 이방인들보다 더 그녀의 구원을 보증하신 것이 아닙니다(행14:27). 만일 하나님께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루디아를 압도하셨다면 왜 모든 죄인들에게도 같은 것을 입증해 보이시지 않겠습니까?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에 사용되는 또 다른 구절들은 요한복음 5:21과 야고보서 1:18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칼빈주의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에 비유해서 하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리신다고” (즉 구원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쿠스탕스는 설교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복종을 위한 필요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공개적인 초청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21에서의 죽음은 영적 죽음이 아니라 육체적 죽음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 “이보다 더 위대한 일” (요5:20)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나인 과부의 아들(눅7:14)과 야이로의 딸(눅8:54)과 나사로(요11:43)를 일으키셨습니다. 야고보서 1:18은 요한복음 1:13과 같이 육체적 탄생을 영적 탄생과 구분하지 못하는 칼빈주의자들의 또 다른 실수입니다. 새로운 영적 탄생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만(요1:13, 약1:18) 받는 것은 사람의 뜻입니다(요1:12, 약1:21).

다음으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가르치기 위해 사용되는 본문은 빌립보서 2:12-13입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 안에서 역사하셔서 그를 거듭나게 하여 그가 복음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신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워필드는 본문이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쓰여졌다고 옳게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하나님꼐서 역사하시는 이유는 다른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히13:21). 구원은 이미 그들의 것이고 본문은 구원을 얻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칼빈주의자 클라크(Clark)는 에스겔 37:1-6을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예로 제시하지만 그는 에스겔 37:11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천년주의자들과 같이 클라크는 이스라엘에게 하신 모든 약속들을 영적으로 해석함으로 구약성경의 절반을 잘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유사한 은유적 변개가 예레미야 31:3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핑크는 이것을 “선택된 자”에게 적용되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이스라엘 족속”(렘31:1), “이스라엘”(렘31:2), “처녀 이스라엘”(렘31:4), “이스라엘의 남은 자”(렘31:7)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론적으로 극단적 칼빈주의는 비성경적인 사상체계이며 그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결코 구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하신 사람을 만나도록 기도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성령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만 의존하여 등한히 하게 됩니다. 복음을 거부한 책임은 분명히 거부한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서 그에게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 대한 반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한 것이며, 또한 먼 곳에 있는 모든 사람과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실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더라』(행2:39).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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