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칼빈주의 분류

“저항할 수 없는 은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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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5월호>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에 따르면, 실제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단지 이 “은혜”의 결과일 뿐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해 사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 교리에 미혹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읽고 올바로 해석해서 올바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대부분 언약신학과 무천년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많은 구절들을 십자가와 연결시키는 은유적 성경해석 방법을 사용하므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절반 이상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시편에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가르치려고 붙잡는 두 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과 주의 거룩한 성전의 아름다움에 만족하리이다』(시65:4).

이 구절은 무조건적 선택을 입증하기 위해서도 빈번히 사용됩니다. 클라크(Clark)는 이 구절을 구원에 적용하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셨다는 구절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다면 그들은 결코 거절할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칼빈주의자가 이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앞에서 멈추고, 택하심과 가까이 오게 하신 목적은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편과 잠언, 전도서는 이 시대의 구원에 대해 교리적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들이 아침의 태로부터 오는 거룩함의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서 자원하리니, 주께서는 주의 젊음의 이슬을 가지셨나이다』(시110:3).

이 구절이 시편에서 칼빈주의의 근거가 되는 또 다른 구절인데,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권적 은혜 침례교
도’인 윌슨(Joe Wilson)은 이 구절을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확장시켜 이 구절에 대한 칼빈주의자의 해석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고 그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셨다. 그 분께서 그들을 구원으로 미리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구원에 대한 그 분의 목적을 완성시키셨는가?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진 유효적 부르심이 바로 그 해답인데 바로 이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과 상관이 없는 구절을 선택된 자를 향한 구원으로의 부르심인 것처럼 적용하여 사실을 오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라』(요3:3).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칼빈주의자들은 또한 요한복음 3:3, 5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그들의 이상한 구원 순서를 설명합니다. 모레이(Morey)는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을 하나님의 나라의 믿음을 갖기 전에 요구조건으로 두셨다. 그래서 우리는 믿기 때문에 거듭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거듭났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해석했다는 것은 혼의 구원이 믿음의 결과라는 베드로전서 1:9에 의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진노를 받도록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셨기 때문이라』(살전5:9)

이 구절도 칼빈주의자들이 자주 인용하는데, 본문의 진노는 영원한 지옥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이며, 본문의 구원은 선택된 자가 마땅히 가야할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며 본문에서 말하는 구원은“다가올 진노”(살전1:10)로부터의 구원이지 결코 지옥으로부터의 “선택된 자”의 구원이 아닙니다. “다가올 진노”는 지옥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휴거 이후 이 땅에 있을 대환란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 사람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요3:36).
칼빈주의자들의 교리와 반대로 사람이 성령의 이끄심을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에 아주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너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 조상이 한 것과 같이 너희도 늘 성령을 거역하는도다』(행7:51). 이에 대해 칼빈주의자 벤 바런(Van Baren)은 “스테판이 말한 것은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주어졌고 모두를 회개로 이끌었으나 많은 사람이 저항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성령은 성령이 보내신 거룩한 사람들이 저항받을 때 저항을 받으시는 것으로 묘사된다.”라고 해명합니다.
그렇다면 스테판이 거짓말을 하고 성경 기록자가 종이를 낭비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저항될 뿐만 아니라 은혜를 저버릴 수 있고(갈2:21), 모욕하며(히10:29), 헛되이 받고(고후6:1) 은혜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있으며(갈5:4), 은혜에 미치지 못하고(히12:15),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꿀 수도 있다(유4)는 것입니다. 알미니우스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다.”라고 말한 대로 이것은 분명한 성경적 사실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명확한 증거들을 직면했을 때 구원을 향한 두 가지 부르심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선택받지 못한 자”에 의해 저항되고, 하나는 “선택된 자”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저항될 수 있는 이러한 부르심은 “외적인” 또는 “일반적인” 부르심이라고 하며, 저항할 수 없이 받아들여지는 부르심은 “내적인”, “유효한”, “특별한” 부르심이라 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외적 부르심을 초청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이러한 부르심의 구분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복음서에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부르심을 살펴보면 칼빈주의의 주장은 즉시 무너질 것입니다.
『내 것으로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잘못이냐? 나의 선함이 네 눈에는 악하게 보이느냐?”고 하였느니라』(마20: 15).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많아도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적으니라.』(마22:14). 『너희는 가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배우라.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왔노라』(마9:13).
이와 같이 부르심이 선택 이전에 나온다는 사실은 여러 번에 걸쳐 지적됩니다. 이 구절들은 칼빈주의자의 “ordo salutis”(구원의 순서)와 완전히 반대됩니다. 또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택함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택함을 받은 사람과 거절당한 사람이 동일한 부르심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즉 한 사람에게 유효하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유효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9:13에서도 모든 죄인들은 동일한 부르심을 받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된 죄인들”은 부르시고 “선택되지 않은 자들”은 저버리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고, “죄인들을 회개시키시려고” 오셨습니다.
부르심과 관련해서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부르심은 두 가지로 구분되지 않으며, 칼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유효적” 부르심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ordo salutis”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칼빈주의자인 핑크(Pink)는 “신약 서신서에 나오는 부르심은 단순한 복음의 초청이 아니라 항상 내적이고 유효적인 부르심으로만 사용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1:9에서의 부르심은 구원 이후에 나오며, 베드로후서 2:10은 선택 이전에 부르심이 나오고, 유다서 1에서는 거룩하게 된 이후의 부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부르심”들이 내적이고 유효한 부르심이라면 TULIP의 체계는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성경에서 “부르심”은 대부분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롬1:1),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고전1:2),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롬9:26) “하나님의 아들들”로도 불립니다(요일3:1). 또한 거룩함에 이르는 부르심(살전4:7), 화평으로 부르심(고전7: 15), 자유에로 부르심(갈5:13) 등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으로의 부르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고전1:9, 갈1:6, 살후2:14)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부르심이나 구원과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며(행1:34),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드셨습니다(시33:15).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믿지 않는 자에게 머물러 있게 하셨습니다(요3:36).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구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인간을 향해 나타나신 것입니다(딛3:4).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요1:9). “효과적인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유효적입니다(딛2:11).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은혜를 영접하게 하려고 오신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선택된 자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에 의해 제한되지 않습니다. 회심을 가져오는 것은 유효적인 부르심이나 특별한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핑크는 이사야 14:24의 하나님의 뜻은 “절대적이고 유효한 하나님의 뜻으로서 항상 영향을 주며, 항상 성취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뜻(permi- ssive will)을 부인하는 칼빈주의자들은 그 분을 죄의 창시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품과 모순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뜻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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