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칼빈주의 분류

그리스도인과 칼빈의 추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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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10월호>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 신학>은 9월호 특집으로 “한국교회 칼빈주의를 재평가한다”라는 제목으로 칼빈주의를 다루었는데 총 7개의 소논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66쪽에 달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기호를 만족시킬만한 요소(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용과 해석)가 전혀 없다는데 먼저 놀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일단 학자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칼빈주의란 말을 개혁주의, 신칼빈주의,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칼빈신학이란 말과 함께 들먹거린다. 처음부터 그들의 자세는 칼빈주의가 얼마나 성경적인가를 제시하기 보다는 단순하게 칼빈의 행적과 그의 <기독교 강요>, 칼빈주의를 기초로 작성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이라는 기준으로 접근을 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최종권위가 무엇인지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칼빈과 청교도들과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장로교 선교사들이다.

그들의 주장을 일일이 거론하기엔 너무 시간이 아깝다. 단지 너무나 비성경적인 주장들이 눈에 띄기에 몇 개만 인용해 본다. 첫 번째 글의 저자인 아신대 원종천 교수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칼빈의 영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문제가 아니라 칼빈의 영성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비슷하게 한국교회가 칼빈을(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떠난 것이 가장 뼈아프다고 말한다. 그는 예정론으로 인한 심각한 신앙적 피해(특권의식, 교만, 영적 무기력 등)에 관해 언급하면서도 결론은 좋은 쪽으로만 보자는 것이다. 그는 또한 “칼빈주의-알미니안주의 대립으로 형성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을 위주로” 보지 말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어짜피 구원받은 우리들,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서 구원받은 것이고 그 구원은 놓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안이해져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구원의 이면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리스도 신대 이오갑 교수는 더 심하게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다. 그의 말들을 들어보자. “신자의 삶은 끊임없는 중생의 과정이다...다른 말로 하면 이렇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확실하나 신자의 신앙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다” 그래서 수많은 칼빈주의를 기초로한 장로교회 교인들이 구원의 확신이 없이 교회만 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경은 분명히 거듭난 자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고후 13:5). 구원은 변개된 <개역한글판성경> 베드로전서 2:2에 나와있는 것처럼 서서히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 사건을 경험한 자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것이 없다면 누가 감히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구원의 확신은 성경적인 교리이다. 또한 그의 결론은 우리로 하여금 비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한다. “칼빈의 신학을 현대에 직접적으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많다...그의 예정론도 오늘날 직접 설교하거나 가르치기에 부적당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자세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과 너무 다르지 않은가? 성경적인 자세는 그가 믿고 있는 바를 고백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너희에게 전해 주었음이라.』(행 20:27).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고전적 칼빈주의로 불리든 신칼빈주의로 불리든 상관없이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한 죄악 때문에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하지 않은 한 가지 사실(요 16:9) 때문에 지옥으로 간다는 사실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성경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의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밝혔듯이 생명을 얻으려고 예수 그리스도께 오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요 5:40). 그들은 이 중요하고 기초적인 영적, 성경적 지식이 결여되어 있기에 거듭나지 못한 채 착하고 경건하고 열심인 종교인들만 늘릴 뿐이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지식을 따르지 않은 열성(롬 10:2)만 지니고 있으며, 거듭나지 못하고 경건한 코넬료(행 10장)와 같이 많이 구제하며 항상 기도하고(행 10:2), 좋은 평판을 들을지는 몰라도(행 10:22) 지옥으로 던져져야 하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것이다(행 11:14).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문화와 사회변혁이라든지 기독교적인 가치관의 심화라든지 교리적 연합같은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66쪽에 달하는 기나긴 글 중에 언급된 몇 안되는 성경구절 중 하나는 창세기 1:28, 2:15인데 이것을 근거로 카이퍼는 소위 “문화명령”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최종목표인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실제적인 왕국이나 우주의 회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는 기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는지 그들의 예정론만큼이나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요 17:9). 그들은 왜 제네바에다 하나님의 도성을 세우고자 하는 칼빈의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칼빈 이전에도 로마 카톨릭을 통해 있어왔고, 칼빈의 계승자들인 청교도들에게도 있어왔으며 앞으로도 UN, NCC등을 통해 계속 진행될 것이나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칼빈도 실패한 일을 20세기의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에서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지구호는 침몰되기로 예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이런 성경의 예언이야말로 분명히 성취되기로 예정된 것이다.
인간에 관한한 그 누구도 개인적으로 구원받기로 예정되지 않았다. 성경에서 예정(predestination)은 교회시대에 구원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위치와 관련해서 언급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잠든 자들은 부활하여, 살아서 주와 만나는 자는 변화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롬 8:29, 빌 3:21, 요일 3:2).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양자로 입양될 것이 미리 정해졌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업을 받는 것이다(엡 1:5,11). 이 두가지 사실이 우리에게 예정된 놀라운 사실들이다. 이것은 그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조건하에 가능한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요 6:28-29). 또한 추수할 밭에 나가서 수확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밭은 곡식을 추수하도록 이미 하얗게 되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그것이 주제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구원은 어느 날 저절로 하나님의 성령이 저항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임하셔서 구원시키는 것이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만들어 버린다. 자기자신도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모른다면 다른 사람의 구원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들은 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야 할 지옥이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곳인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전체과정에 있어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길 원하신다. 물론 성령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만 그럼에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전도의 어리석음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고전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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