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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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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9월호>

오늘날 무지한 한국 교회들 안에서 “주기도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매 주일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과 더불어 “헛되이 반복하고 암송하는 것”은 물론, 예배 때 주기도문으로 기도하지 않는 교회를 “이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무지는 “한국식 기독교”의 열매이자 심각한 폐해인데, 심지어 그들은 주기도문을 애지중지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암송하는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기까지 하다. 가장 큰 원인은 “변개된 성경” 때문이고, 그다음으로는 “교단 교리”로 신학을 가르치고 성경 구절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교단 교리는 “성경의 교리”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이른바 “주기도문”이 “언제” 드려야 하는 기도이고, “누가,” “어떤 목적”을 위해 “교리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드려야 하는 기도인지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고(故) “조용기 목사”는 “일상생활 중 기도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주기도문을 쫓아 기도를 한두 시간 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는 “기도의 정석”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주기도문으로 매일 기도하라. 중언부언하지 말고 한 단어, 한 단어에 집중하여 주기도문을 묵상하고 기도하라. 주기도문이 우리의 것으로 채워지고 소명이 될 때까지 기도하라. 주기도문으로 찬양하라. 곡조 있는 기도로 주기도문을 외울 때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신다. 자녀들과 함께 주기도문을 하라. 자녀들이 한 구절씩 말하게 함으로써 평생 기억하며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어라. 주기도문으로 중보 기도하라. 자신을 넘어서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드릴 때,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며 주님의 영광이 우리 모두의 목적이 될 것이다. 주기도문이 우리의 평생의 기도 제목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실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는 끝이 없다! 『죽은 파리들이 약제사의 향유에서 악취를 내뿜는 것같이, 조그마한 우매도 지혜와 존귀로 평판이 있는 사람에게 마찬가지니라』(전 10:1).

소위 “주기도문”이 언제부터 교회들 안에서 공식적으로 암송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확실한 점”은 베드로를 위시한 당시의 사도들이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기도 내용을 초대 교회들 안에서 “예배 공식 기도문”으로 작성하고 회람하면서 암송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기도는 “주기도문,” 곧 “주님의 기도”(Lord’s Prayer), “주님께서 하신 기도”로 잘못 알려져 왔는데, 오히려 이 기도는 “제자들이 해야 하는 기도,” 즉 “제자들의 기도” (Disciples’ Prayer)이다. 왜냐하면 『제자들 중 한 사람이』(눅 11:1)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했을 때, 주님께서 그 “제자”의 요청에 답변하시는 가운데 『그들』(눅 11:2), 곧 『제자들』(마 5:1, 눅 11:1)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기도, 곧 “주기도문”이 아니고 “제자들이 해야 하는 기도”였다. 그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절) 또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눅 11:2)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기도가 주님께서 기도하신 “주기도문”이라고 고집한다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불경스러운 죄를 범하게 된다. 이는 기도 중에 『우리의 죄들도 용서하여 주시오며』(눅 11:4)라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주님께서 친히 하신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데,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개인적인 기도”를 직접 드리셨다(요 17:1,5,11,21,22,25).


칼빈주의자 “아더 핑크”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눅 11:2)라는 말씀을 근거로 마치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을 암송해야 하는 것처럼 주장했지만,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을 하나의 본으로 삼아 기도하라”는 의미이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이 기도 내용 그대로를 “주문” 외우듯이 따라 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에 앞서서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7절)라고 경고하셨다. 이교도들은 “헛된 반복”을 하면서 기도한다.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해야 자기들이 믿고 섬기는 신들이 기도를 잘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인데, 사실 그런 “헛된 반복”은 기도가 아니라 “주문”(呪文)이다. 일례로 불교의 “천수경”이 그렇다. 그들은 천수경에 나오는 대로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을 헛되이 반복하면서 주문을 외운다. 로마카톨릭에서 하는 “로사리오기도”도 마찬가지다. 특히 그들은 묵주를 돌리면서 기도하는데, 묵주의 “열한 번째 큰 구슬”이 돌아올 때마다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암송하는 것이다. <틴데일성경>은 로마카톨릭의 그런 “묵주 기도” 같은 것을 “옹알이하는 것”이라고 빈정대며 조소했다. 티베트의 라마승들도 “전경기” (prayer wheel, 기도나 명상을 할 때 돌리는 바퀴 모양의 경전)를 사용한다. 이것은 기도 제목들을 적어 놓은 작은 종잇조각들이 붙어 있는 일종의 “바람개비”이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와 바람개비를 돌릴 때마다 그들이 거기에 써 놓은 기도 제목들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일반 교회들에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반복적으로 암송하는 것은 이처럼 주문을 외우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기도는 “교리적으로”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의 휴거 이후, 지상에서 펼쳐질 “환란 기간”에 이제 곧 다가올 “천년왕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 간절히 드려야 할 기도로 적용된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기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9절, 눅 11:2)라고 말하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기도에서는 “우리”나 “너희” 같은 복수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표현은 이것이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로 다가설 때 “우리” 같은 복수 표현을 잘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복수 표현은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하나님을 부를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특히 “우리”와 “너희”는 “율법하에 살고 있는 유대인 제자들”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이 기도는 “구약적인 기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 “다윗 왕”은 성전 건축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을 때,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주께 한 전을 건축하려고 준비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으로부터 왔으며 다 주의 소유니이다.』(대상 29:16)라고 기도했다. 유대인들이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가』와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사 63:16)께서 “지으시고”(신 32:6) “만드시고”(사 64:8) “낳으신”(신 32:18) 『아들이요... 첫태생』(출 4:22)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출생,” 곧 “거듭남”을 통해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요 1:12)이 된 사람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인 것이다.


둘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9,10절, 눅 11:2)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왕국』은 재림 때 이 땅에 세워질 “정치적인 왕국”이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리적으로” 통치하시는 “실제적인 왕국”인 것이다. 이 왕국은 믿는 성도가 거듭날 때 들어가는 “영적인 왕국”(요 3:5)이 아니다. 성도들 안에 있는 “내적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눅 17:21)가 아닌 것이다. 특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받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아버지의 왕국”은 이 땅에 임하기를 간구할 수 있다. 특히 왕국이 임하기를 간구한다는 것은 상황 자체가 왕국이 임하기 직전, 곧 왕국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임을 보여 준다. 초림 때처럼 “미래의 재림 때”에도 왕국이 임하기 직전인 “대환란 기간”에 이제 곧 도래할 천년왕국을 기다리면서 그 왕국이 임하기를 기도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교회 시대에 적용되는 기도가 아니고, 대환란 기간을 통과하는 유대인 성도들이 간구해야 할 기도이다. 어리석은 “조용기 목사”나 “오정현 목사”처럼 주기도문을 쫓아 한두 시간 기도하거나 자녀들과 함께 한 단어, 한 단어에 집중하면서 주기도문을 묵상하고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셋째, 『오늘[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1절, 눅 11:3)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 단위”로 양식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 광야를 통과하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매일” 일정한 양의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다(출 16:4,5,11-36). 이것은 환란 시대에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부양받게 될 것을(시 78:2,24,25, 계 12:14, 미 7:14,15) 미리 보여 준 사건으로, 본문의 기도는 대환란 기간에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광야로 도망쳐 나왔을 때(마 24:15-21) “매일의 양식”을 위해 간절히 간구해야 할 기도인 것이다. 대환란 기간에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물건을 매매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적인 방법이 없으면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환란 시대에는 매일의 양식을 위한 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해진다. 따라서 이 기도는 “교리적으로” 교회 시대를 향한 말씀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 기도를 교회 시대에 “영적으로”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 이 시대에 그 누구라도 육신의 양식이든, 영적인 양식이든 매일의 필요한 양식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를 드리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여러 번 기도했고, 또 그때마다 매번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고아원 사역”에 필요한 물질을 공급받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다.


넷째,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들도 용서해 주시오며』(12절),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들도 용서하여 주시오며』(눅 11:4)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이 기도에 따르면 “죄를 용서받는 근거”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 역시 교회 시대의 교리로 적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신뢰했을 때 죄들이 용서되기 때문이다(골 1:14, 행 13:38,39). 물론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엡 4:32).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는 절대적인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은 이후에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죄 자체를 용서받는 조건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섯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들지 않게 하시옵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13절, 눅 11:4)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는 그리스도인들도 드릴 수 있다. 하지만 “교리적으로” 적용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여기서 “시험”은 유대인들이 직면하게 될 “특정한 시험의 기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히 3:8, 계 3:10). 즉 “대환란 기간”에 유대인들이 “주님을 버리고 적그리스도와 그의 형상에 경배하라는 시험”(계 13장)을 받게 된다. 특히 유대인들이 구해 달라고 간구하는 “악”은 “마귀”를 말하는데, 이는 악의 화신인 마귀가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죽이기 위해 추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이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그들이 기적적으로 구출받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중세 암흑시대에 “모세 보타렐”이라는 한 유대인 노인이 이 “주기도문”을 기억하는 가운데 스페인의 로마카톨릭 왕에게 자기를 불태운다 해도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그는 “바싹 타버리고” 말았다. 또 다른 한 유대인 노인이 예멘의 모슬렘 왕 앞에서 모슬렘들이 자기의 머리를 잘라 버린다 해도 자신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목이 잘려 죽고 말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현재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환란 기간이 시작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다시 이 땅에 돌아와서 유대인 남은 자들을 메시아께로 회복시킬 때 이 기도는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악의 화신인 적그리스도의 박해와 시험에서 유대인 남은 자들이 기적적으로 구출되는 것이다.


여섯째,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13절). 이 왕국은 앞선 두 번째에서 언급한 “아버지의 왕국”으로 장차 이 땅에 실제적으로 세워질 것이며, 그 왕국은 영원무궁한 왕국이 될 것이다.


한국 기독교계 안에 어리석고 무지한 군상들이여, 이제 그만 “주기도문”을 멈추라! 더욱이 “주기도문” 내용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헛된 반복”만 일삼고 있으니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듣는 데서 귀를 돌이키는 자는 그의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리라.』(잠 28:9)라고 경고하신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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