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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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들 때”와 “시험에 빠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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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7월호>

“시험에 드는 것”은, 누군가의 미혹에 속아 옳지 않은 일을 행하거나 성경과는 전혀 무관한 비진리를 믿고 따르다가 타락하게 되는 것 또는 어리석은 탐욕으로 세상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여러 가지 “시험에 이끌려 들어가는 것”(being led into temptations)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험에는 반드시 마귀가 개입하기 마련인데,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신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을 때 시험을 당하는 것이니』(약 1:14). 말하자면 아무리 마귀가 개입했다 해도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넘어간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이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것은 마귀 때문에 그랬어요!”라고 하면서 마귀에게만 그 책임을 떠넘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험은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시험이고, 또한 분명히 피할 수도 있다.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가운데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롬 6:12). 이처럼 우리 자신이 죄의 유혹을 통한 마귀의 시험을 거부하고 통제할 수 있기에, 마귀가 내미는 “흙 묻은 사탕”을 단호하게 뿌리쳐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라고 명령하셨다. 주님께서 붙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큰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만큼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잠이 든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마 26:40,41)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바로 이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말았다. 이처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서” 사탄의 미혹을 물리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다 해도, 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하나님의 일들을 신실하게 수행하며 열매들을 맺고 있다 하더라도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지는”(fall into temptations) 일이 생길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한계 상황까지 우리를 몰고 가셔서 불가피하게 시험에 빠지는 일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가를 테스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님께서도 시험하신다! 다만 “악으로” 시험하시지 않을 뿐이다. 『누구든지 시험을 받을 때 “나는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하지 말지니, 하나님께서는 악으로 시험을 당하지도 아니하시고 또 그분 자신이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라』(약 1:13). 즉 마귀처럼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시험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시험에 빠지게 되면, 주변 상황을 우리의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욥”이 당면했던 시험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시험에 드는 것”은 “죄의 유혹”과 관련 있고, “시험에 빠지는 것”은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시험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그러한 시험에 빠진 것에 대해 기쁘게 여겨야 한다. 『나의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면 그것을 모두 기쁨으로 여기라』(약 1:2). 안절부절못하여 불안해하면서 불평불만을 쏟아 내거나 낙담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시험이 왜 왔는지를 침착하게 생각하고 상황을 주시해야 한다.


특히 베드로는 그런 시험이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잠시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크게 기뻐하는 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써 단련될지라도 없어져 버리는 금보다 훨씬 더 귀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1:6,7). 이러한 시험은 우연히 어쩌다가 주어지거나 단순히 재수 없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시험을 받을 만한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주어진다. “목적”이 없는 시험은 없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필요한 어떤 목적이 있으시기에 그러한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에 빠질 때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고난당할 때>의 저자 호레이셔스 보나르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가벼운 고통일지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우리가 그것을 하찮게 여기고 함부로 내팽개쳐 버릴 수 있겠는가? 고통의 세월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데려가서 그분의 사랑을 더 깊이 느낄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그 끝에는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한 아름 안고 계신 우리의 구주께서 만면에 미소를 지으시며 서 계신다.
둘째,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 그러나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가 온전하고 잘 갖추어져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 말하자면 그러한 시험은 인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진실한지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험이 때때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극심한 압박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인내로 이겨 내고 난 후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이 저 셋째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온 우주를 쏜살같이 가로질러 이곳 지상에 있는 우리 마음속으로 힘차게 밀려들어 오게 된다.


여러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위대한 명장” 피터 럭크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높은 하늘을 날 때마다 창밖을 내다보며 내 인생을 둘러싼 수많은 영적 일들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나에게서 눈을 떼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때로는 내 앞에서, 때로는 내 등 뒤에서, 때로는 머리 위에서, 또 때로는 나의 주변 어딘가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지켜보셨고, 등을 떠밀기도 하셨으며, 앞으로 끌어당기기도 하셨고, 옆에서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도 하셨으며, 때로는 머리 위에서 고함치기도 하셨다. 그리고 내가 말을 안 듣거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쓸데없는 생각을 했을 때, 주님께서는 호되게 꾸짖기도 하셨고, 후려치기도 하셨다. 이렇게 하시는 가운데 주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것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다.” 우리가 시험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인내”인 것이다.

특히 인내로 시험을 잘 견뎌 내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 『시험을 견뎌 내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는 그가 시련을 거친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반면에 죄의 유혹에 이끌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의 결말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절대로 이 엄중한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제멋대로 죄를 짓고 성별하지 않는 모습을 보실 때 아주 기막혀하신다. 에스라 9장에는,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당시 백성들, 특히 가장 거룩해야 할 제사장들과 고관들이 이방인들과 혼인하고 그들의 가증함을 따라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은 에스라가 너무 기가 막혀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얼마나 기가 찼는지 자기 옷과 외투를 찢고 머리털과 수염까지 뜯었다. 나중에 느헤미야는 이런 동일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너무나 기가 차서 자기 머리털과 수염이 아니라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한 당사자들의 머리털을 뽑아 버렸다(느 13:25).
오늘날 죄를 짓고 성별하지 않는 성도들의 머리털을 뽑아 버릴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런 에스라나 느헤미야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엡 4:30). 우리가 육신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죄를 짓는 동안 가장 슬퍼하시는 분은 온 우주에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눈물 흘리게 해 드리는 행동은 일종의 배신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과 질고를 지시고 지옥의 고통까지 맛보신 하나님의 사랑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인가?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기까지 사랑을 쏟아부으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로부터 배반당하실 때 얼마나 슬퍼하실지 진지하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성별은 거룩한 투쟁이요, 거룩한 싸움이다! 공중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그날까지 계속해야 할 싸움인 것이다!

성별과 분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나님께서는 성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하신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았고 우리의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 이상, 아무리 우리가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성령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께서는 무척 신음하시며 슬퍼하신다. 우리 안에 밝혀진 빛과 조명을 꺼 버리신다. 아무리 간절히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도 아무 응답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사라지게 하신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는 영적인 암흑과 불안과 초조가 밀려온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사라진 성전은 성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성령님을 슬프시게 만드는 성전 역시 성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성전을 어떻게 하시겠는가? 구약에서 그런 가치 없는 성전을 파괴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파괴하실 것이다. 곧 죽이시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죄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밤이 새도록 기도해도 부흥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능력 있는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별해야 한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도움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별은 거룩한 투쟁이요, 거룩한 싸움이다. 공중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우리가 반드시 지속해야 할 투쟁이요, 지속해야 할 싸움인 것이다. 죄와 나쁜 습관이 우리의 발아래 완전히 정복될 때까지 성별을 위한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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